내가 읽은 시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

미송 2016. 9. 25. 11:11

     

     

     

    살롱 드 멕시코 /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

    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

    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

    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

    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

    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

     

    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

    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

    이태원을 무작정 배회하고 싶다

    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

    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

    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

    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

     

    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리라

    가슴에 매단 망각의 손수건으론 연신 업보의 콧물 닦으며

    체력장과 사춘기 그리고 지루한 사랑의 열병을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 앓아야만 하리라

    , 난데없이 내 맘 속에서 인류애가 솟구친다

    이 순간 내 욕정은, 그리움으로 잘 위장된 내 욕정은 온데간데 없다

    이게 제정신인가

    아님 무슨 인류애라는 신종 귀신이 날 덧씌운 것인가

     

    그날 살롱 멕시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

    딸라 한닢 없던 외삼촌만이 명랑하게 딸랑거렸다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시키고 나서

    용케 합석시킨 지아이의 붉은 뺨에 뽀뽀하던 외삼촌,

    그립다, 어수룩한 그 백인 병사마저

     

    엘 살롱 드 멕시코

    이젠 자꾸만 들어가고 싶은

    그래 캠프 페이지 위병초소의 산타클로스와 함께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 나,

    성조기는 사라져도 그 단맛만은 영원하리라

     

    나의 엘 살롱 드 멕시코를 적시는

    외삼촌의 스트레이트 위스키처럼, 여태 숙취로 남은 그 취기처럼,

    그 옛날의 그리움에 어느새 난 샌드위치되어 있다

    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

    엘 살롱 드 멕시코

     

    - 진이정 (1959~1993)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20131015-20160925

 

나는 지금 겨울 해변을 걷는다. 누구랑? 혼자! 쓸쓸? 쓸쓸해!

... 모래 속 사금파리가 반짝인다. 눈을 감아야지. 아프지 않아, 네가 너무 많이 아파주어서 아프지 않나. 이상. 기형도. 진이정. 요절한 시인들이 더 오래 산다. 일찍 죽어야겠다. 아니다 일찍 죽어야 했다. 내가 너를 지나가고 있는지 네가 나를 잠시 건드리다 가는지 모르겠다. 더러운 그리움과 하염없이 반짝이는 시가 칼빛으로 아우성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