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락ROCK
그림- 박치성화백
락ROCK / 오정자
지금 내 옆에는 약간은 시큰해진 허리를 기댈 의자가 있고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다리를 꼬아야 약간은 편안해지는 회전의자가 있고 다시 왼쪽 손으로 잡을 찻잔이 있고 마실 수 있는 커피가 있고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으나 가만히 헤아리면 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들이 있다. 즐비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일렬의 종횡을 따지거나 묻거나 물건 혹은 대상이나 과거의 답答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을 느낌들이 있다. 존재하므로 노닐 수 있는 이, 조요롭고 아, 귀貴한 것들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않는다 는 이, 순간에 또 무엇이 다녀갔을까.
머리를 긁적이고 대나무 효자손으로 사방 등을 긁적이고 얼굴을 지압하고 오른쪽 다리를 요염한 사선모양으로 기대고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물어보려는 찰라 손끝은 조물락조물락 피아노 건반을 더듬듯 강타하지 못한 채 어렵사리 부르는 노래처럼 자판을 만지작거린다. 콘돔처럼 한 꺼풀 씌운 불투명 비닐 위를 사부작거린다. 치마 속을 들치듯 그리고 가끔은 비닐을 들먹여 주는데 그것은 막과 모음 사이 물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을 들게 하여도 내가 아끼는 건반인지 자막인지에는 물기가 서려있곤 하는데, 왜 그럴까 하며 가끔 그래 가끔 그저 비닐을 걷어냈다 덮어준다.
두 개의 음악이 번지고 있다. 어제는 호호백발의 아저씨가 다녀갔다. 아저씨는 심수봉이 대학가요제에 나가 불렀던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을 딩딩 옛날 전국노래자랑에서 3등 먹었던 바리톤목소리로 불렀다. 기타소리는 쳐졌고 목소리는 죽여주었다. 왜 오자마자 앉자마자 노래부터 불렀을까, 왜 옆방 남의 여자를 의식하였을까. 내 맘대로 상상이지만 내 맘대로 상상하기로 들면 세상은 얼마나 재밌어지는지 재밌는 영화장면으로 돌변하는지, 입장을 바꿔 생각을 좀 해 봐 하는 것처럼 생각도 바꿔치면 상황과 인물설정이 달라지기도 하니, 생뚱맞아져 장면이 돌변한다는 것이다. 최근 제이가 너무 조르기에 또 악기점 사장 앞에 앉은 제이 기죽는 꼴이 보기 싫기에 카드를 긁어 기타를 질렀다. 기타 이름은 테일러. 테일러가 만들어서 테일러기타, 마틴이 만든 건 마틴기타, 신나서 제이가 설명을 해주었다. 장미목으로 만들었다는 테일러 기타. 주인 이름 붙인 물건이 명품이 되면 만든 이의 보람은 배가되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시를 짓는 시인들의 이름을 생각했는데, 자기 작품에 목줄을 건냥 읊조려 대는 모습을 보자면 왜 연민이 솟는지 모르겠다 고, 구원이 경전 속에 있지 않듯 시가 시집 속에 있지 않다 고 생각하였는데,
아무튼, 그런 것에 이제는 관심을 좀 줄이기로 하면서 또 나의 오전은 이렇게 한가롭게 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관념이 두뇌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필시 잡고 놓지 않으리란 찻잔처럼 사사로운 듯 사사롭지 않은 카이로스의 개입도 있는 것이어서 약간은 시크해지는 감정을 거두기 위해 낙엽인지 낙서인지 알 수 없는 필체로 낙樂을 더하는 것이니,
검은 블루스의 상처로 검색했던 글자를 검은 상처의 블루스로 정정한다. 호호백발 아저씨 아니 오빠라고 불러주면 더 좋아했을 그 남자의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테일러 기타의 찰방찰방한 음색과 잘 맞을 것 같았던 그 목소리. 사실 찰방찰방한 음색으로 연주하는 블루스가 또 제 맛인 것은 기묘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검은 얼굴, 검은 손, 검은 눈물의 사람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경쾌한 달관의 음音을 하얀 종족들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함부로 모창하였던가. 카피와 원본 사이에서 음악을 즐긴다. 즐긴다는 표현은 또 얼마나 낙관적인 자기애의 발로인가. 어쩔 수가 없으니 즐긴다 가 아니라 즐길 수밖에 없는 고도(godot)의 기다림 속 탐미의 기술. 그것이 저절로 생겨난 것인지 반복과 습관이 낳은 신생의 결정인지 생명의 가산으로 온 덤인지, 묻는 건 생략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 이꼬루 질문 많은 학생이란 공식은 교육의 오류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문자의 배열, 사고의 흐름, 손가락의 놀림, 호흡의 연장 플러스 방만한 모양의 자유스러움, 이러한 것들로 그냥 순간을 조합했다 착각하기로 한다. 착각. 초침이 휘어짐도 없이 넘어갔다. 과거 속에 살지만 미래에 닿지 못했지만 우리에겐 순간의 착각이 있다. 어떤 음률 보다 신선하고 고마운 착각. 착한 눈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