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안현미 - 기억의 재구성 ; 데드 슬로우

미송 2014. 3. 16. 10:09

 

기억의 재구성 ; 데드 슬로우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낯선 여자의 손을 잡고 도착한 나는 다섯 살 훗날 그 낯선 여자는 친언니로 밝혀진다

 

   녹슨 가위를 들고 동맥을 오리는 나는 열여섯 살 피 흘리는 동맥을 보고 기절하는 나는 열여섯 살 훗날 그것은 동맥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밝혀진다

 

   방금 출시된 최신형 기억을 들고 맥락을 잃어버린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마흔 두 살 훗날 그 여자는 무면허 기억판매자로 밝혀진다

 

   (열여섯부터 마흔둘까지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

 

   간혹 데드 슬로우(죽을 만큼 천천히) 죽고 싶었을 뿐

   그 중 어떤 것도 거짓은 아니리라

 

   더 이상 출시되지 않는 1997년산 기억에 의하면 친언니로 밝혀진 여자는 은행원의 아내였으나 더 이상 은행원의 아내가 아니며 동맥이 아니라 기억을 오린 녹슨 가위는 녹슨 가위가 아니라 녹슨 기억이었으며 맥락을 잃어버린 여자가 무면허로 판매한 기억은 훗날 진품으로 감정된다

 

   (열여섯부터 마흔둘까지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

 

   간혹 데드 슬로우(죽을 만큼 천천히) 살고 싶었을 뿐

   그 중 어떤 것도 거짓은 아니리라

 

   계간 문예중앙2013년 겨울호 발표

 

 

1972년 강원도 태백에서 출생. 2001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곰곰(렌덤 하우스, 2006) 등이 있음.

 

 

'하룻밤 사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생겨나게 된 일화가 여럿 있다. 그 중 하나를 떠올린다. 아침 쌀을 씻으며 떠올린다. 간발의 차이로 비타민이 되기도 아저씨가 되기도 시가 되기도 한다. 결론은 생각보다 빨리 날 수 있다. 쌀이 불른 동안 약 10분 동안 시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살 오른 얼굴 아래다 끄적임을 남긴다. 건강해야죠, 혼자 사시니요. 중얼거린다. 목록 열기 닫기를 한 시간쯤 하다보면 가끔 시 하나 건진다. 비타민 보다 아저씨 보다 더 좋다고 발광을 해대는 시. 주인도 없이 마구 나대는 내 기억들까지 토동토동 재구성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위무했을 노래가 내게도 유용해진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