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심보선 <변신의 시간> 外 4편

미송 2014. 3. 17. 16:17

 

1

변신의 시간

 

아무 거리낌 없이 인생은 시작됐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죽어갈 때

나는 양미간을 찌푸려

그 가냘픈 육신들을 이마 위에 옮겨 심었다

시간의 무덤에 꽃과 향과 초를 바치는

번제(燔祭)의 밤마다

나는 백 일치의 기억을 불태우곤 했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늙어갔지만 늙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죽기는 싫었다

모든 방황은 무익했으며

모든 여행은 무가치했다

파도의 음계는 어느 바다인들 다르지 않았고

구름의 울음은 어느 그림자도 흔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어이 머물 수 없음이여

또한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이여

오래전 길 위에서 만난 어느 현자는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일만 사천 개 섬들은

모두들 하나씩 화산구를 지니고 있다네

그대는 멸망으로 나아가는 그대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오래된 현자의 말을 떠올렸지만

하얀 얼굴로 밥을 떠먹는 너를 바라보며

강퍅한 결심 하나를 몰래 거두어야 했다

너는 내 옆에서 아이처럼 잠들었다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인간의 침묵에서

벌레의 침묵 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멸망에 관한 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잎사-귀로 듣다 

 

매혹의 순간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사랑은 모든 계획에 치밀하였노라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에서

너는 내게 물었다

나무들은 입사-귀가 너무 많아요

바람 소리를 어떻게 견딜까요

너의 어리석음도

구름의 한계 안에서는 당당하여라

사랑은 삶을 과장하니 좋아라

너는 고풍스런 잠언이 밴 표정으로

잠이 들었고 어리석고

어리석었던 나는

불가피한 내일의 파국을 떠올렸고

내가 울기 전에

네가 먼저 운다는데

이별과 재회 중에 하나를 걸었노라

잠에서 깬 너는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 개의

잎사-귀로 들었지요

먼저 운 것은 결단코

나였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리라

 

 

3

지금 여기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는다

신은 얼마나 많은 도형들을 이어 붙여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는지!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에서 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4

호시절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

그때는 좋았다

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

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

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

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

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

그때는 좋았다

격렬한 낮은 기어이

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

오늘의 탑을 높이높이 쌓아 올렸다

그때는 좋았다

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

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5

외국인들 

  

  이 길은 아버지의 메모들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고(遺稿). 간혹 작고 투명한 새가 종이 바

깥으로 방울져서 날아오르는......

 

  아버지는 썼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오늘 눈먼 외국인 서너 명을 길에서 마주쳤고 그들

은 모두 같은 체구에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하다. 길을 잃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나와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을 뿐. 그 사실을 그는 모르고

나는 알 뿐.

 

  하지만 내가 짐짓 애달픈 목소리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그는 흠칫 놀라서 멈출까?

  아니면 태연히 계속 걸어갈까?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버지를 향하여 영원히 눈먼 자다.

  아버지는 죽었고 지금 죽어 있으며

  나는 살아왔고 살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저기까지, 그 눈먼 외국인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싶다. 저기에 도착하면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 그럼 여기까지." 그리고 나는 제 갈 길

을 갈 것이다.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

  그런 것을 언제까지고 반복해보고 싶다.

 

  얼마 전 랍비를 애인으로 둔 친구가 이스라엘로 떠

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교토에 있다. "그곳은 혼자

여행 가기 좋은 곳이지." 그녀는 내게 시 외곽의 미

술관을 추천했다. "그곳을 설계한 건축가는 아이I.

M. 페이Pei. 흥미로운 이름이지?"

 

  내가 갔을 때 그곳은 휴관 중이었다. 문 닫힌 미술

관 앞에 서서 나는 아버지의 메모를 떠올렸다. 거기

서서 나는 오래오래 울지 않았다. 비도 오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엉터리 점

......

 

  이곳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몰래 희망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내가 원래 속죄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의 이름은

  페이도, 와타나베도, 토마스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지금은

  좀 전의 과거가 제 바로 앞에 내팽개쳐버린

  무국적의 고아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지금 교토에 있다.

  그리고 심지어 눈도 내린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쓰러지기 직전의 '아이I' 같은 검은 목책들 사이로

  나이 어린 신()의 어리광처럼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