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최승자

미송 2015. 9. 2. 07:44

 

 

 

 

멜롱이 엉덩이에 얼굴을 대고 잠든 깜찍이는 불안한 기색이 안 보인다카메라를 들이대면 먹을  주려나 하고 벌떡 일어날 뿐.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개들의 풍경은 '기억의 영속'을 닮았다. 달리구분할 의욕을 보이지 않는 저들.

 

인간이 짐승 보다 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원시로부터 출발하였을까, 원시 이전 부터였을까.

 

최승자 시인의 <불안> 읽은 건 20097. 손현숙, 우찬제님이 엮은 평론집 <시인박물관>에서 깊은 울림이 있다는 건삶으로 체화되었단 뜻일까구절양장九折羊腸 이 그려져 있고 땀방울이 베어져 있어 생생한 시현실이 박힌 예술이 요즘은  나의 시선을 끈다            

 

 

불안 / 최승자


깊은 밤하늘 위로

숨죽이며 다가오는 삿대소리.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죽음이 나를 겨누고 있다.

어린 꿈들이 풀숲으로 잠복한다.

풀잎이 일시에 흔들리며

끈끈한 액체를 분비한다.

별들이 하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 죽음이 나를 향해 발사한다.

두 귀로 넘쳐오는 사물의 파편들.

어둠의 아가리가 잠시 너풀거리고

보라! 까마귀 살점처럼 붉은 달이

허공을 흔들고 있다.

 

 

삿대가 무엇일까. 하늘을 향해 휘젓는 팔, 서로를 향해 내지르는 소리, 배를 미는 막대기. 사전을 검색하지만, 사실 삿대란 것도 마음길 따라 달라지는 물건일 뿐, 허공처럼 보이지 않는 사물에 불과할 뿐.

 

일전에 본 영화 '더 헌트'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최승자의 '불안', 순발력 있는 시어들이 꼬리치며 파닥이기에 마치 영화 속 그 장면이 부활하는 느낌이 든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 시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던 '더 헌트'의 마지막 장면, 살인의 욕구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란 걸 보여준 두 영화의 주제는 일맥상통하였다. 이글대는 증오로 협작하던 무리들이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눈 쌓일 거리를 걱정하며 뿔뿔이 흩어지던 영화 속  장면. 루카스에게 누명을 씌웠던 모든 이들이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명이 벗겨진 루카스에게 몰려들어 악수를 청할 때의 그 장면은, '만일 내가 루카스가 되었었다면가정을 했을 때, 정말 잔인하게 느껴졌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 스스럼없이 자행되고 있는 오늘날, 그러므로 최승자의 <불안>은 우리의 실존이다. 보이진 않지만 어디선가 날 겨냥하고 있는 죽음의 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어느 순간 까마귀의 살점처럼 붉은 달로 걸릴지 모를 황당한 허공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열아홉 살 되던 해, 내 오른 손에 들려 있었으나 다 읽히지 않았던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까지 가지 않아도, 키에르케고르가 삼 십 중반 즈음에 써냈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다시 찾지 않아도, 나는 '삼십 세를 넘기는 동안 쓰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이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든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쥐꼬리만한 유산이라도 건네고 사십 초반에 일찍 죽은 키에르케골이 부러울 뿐이다. 더 살아서 남기는 <불안>이란 죄의식 뿐이니....

 

일찌기 나는 '루머'였다 고 말한 그녀가 지구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좀 더 자유롭게 숨 쉬고 있길 바란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하나의 루머였구나 싶다.

 

승자 / 이승훈

 

"오늘 신문 봤어요? 최승자가 누구야요?" ". 최승자 시인? 몇 년째 정신분열증이야."

"그런데 최승자 시는 잘 써요?" "시가 좋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야."

"그런데 뭐 허무가 보인다더니 정신병자가 되었잖아요? 부처님 말씀이 일체유심조라고

마음을 그 쪽에 쓰니까 정신병자가 된 거야요. 이상인가 뭔가 하는 시인도 정신병자

아니야요?" 겨울 오전 주방 식탁에 앉아 밥 먹을 때 청소기 들고 아내가 하는 말이다.

"나도 오십보백보야." 한 마디 하려다 그만 둔다

 

일반인 입장에서 시인이란 것들(?)이 가끔 정신병자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한다. 실제로 그런 시인을 만나면 저 시인의 아내처럼 말하고도 남는다. 여고생이 소설책 사는 걸 보며 '너 어디 아프니?' 하고 묻던 옆 사람들의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 떠오른다. 그 호들갑을 이해한다아리송한 건, 왜 남편이 밥을 먹을 때 아내는 청소기를 들고 있었을까, 하는 요 부분, 요 부분이 요해가 안 될 뿐이다. 

 

 

20140518-20150902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