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이연주 시인 外 6명

미송 2014. 7. 7. 10:37

 

 

(……)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
쉬고 싶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


                                           _「매음녀·4」부분
 


성병에 걸린 매음녀가 단속반에 걸려 보건소에 끌려가 강제로 진찰을 받는 장면은 인간의 수치심이나 치욕과는 먼 곳에 위치해 있다. 아랫도리를 벗고 양다리를 벌리는 익숙한 행동에서 인간의 존엄 혹은 부끄러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를 비웃는 것은 눈을 뒤집어쓴 나뭇가지뿐이다. 그때 ‘반쯤 부서진 문짝을 박살내고’ 집을 나가는 아버지가 오버랩된다. 이연주 시인의 「매음녀」 연작이 단순히 매음녀를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비루한 삶의 조건에 놓인 자신도 같은 궤적 위에 서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매음녀와 자신의 삶을 ‘된가래의 추억’이라고 명명한다. (22~23쪽, 해질녘 안개의 냄새–이연주)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내면은 더러 사람과 시를 매치시킬 수 없게 만들기도 했으며, 왼손에는 담배, 오른손에는 소주잔을 들고 한참을 이야기하는 이연주 시인의 눈빛은 매혹적인 광기를 내뿜고 있었다. 당시 서로 왕래했던 시인들에 의하면 그녀의 집은 소품까지도 빨간색으로 치장되었을 정도로 빨간색을 사랑했다. 피와 정열을 상징하는 빨간색은 그녀의 시 전편에 고여 있는 죽음의 이미지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28쪽, 해질녘 안개의 냄새–이연주)

 


절망은 유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구절은 어쩌면 그녀의 삶의 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절망을 통해 다다른 나라에서 그녀는 썩어 흐물거리는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부패의 냄새’가 없는 나라가 그녀가 원했던 공간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가 실은/ 이토록 쉽고 간단한 것을……’이라는 시 구절은 그녀의 죽음을 보는 것만 같아 두렵고 쓸쓸하다. 느닷없는 죽음은 그녀의 시 구절처럼 ‘질 나쁜 공기’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친구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다 스스로 목을 맨 것. ‘나는 간다, 종은 울린다/ 콧등이 이렇게도 싸아해 두렵기 한이 없는/ 해질녘 안개의 냄새’(「안개 통과」 부분)처럼 그녀는 떠났다. (31~32쪽, 해질녘 안개의 냄새–이연주) 

 

 

 

이연주 시인 연보


1953.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91. 『작가세계』 봄 호 「가족사진」 외 9편으로 등단.
1991.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출간.
1992. 11. 12. 서른아홉의 나이에 타계.
1993. 유고 시집 『속죄양, 유다』 출간.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시를 썼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부채 의식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 하나는 80년대 초반 광주에서 불어닥친 민주화의 불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80년대 말 기형도의 죽음과 그의 시집이 던져준 충격이 그것이다. 1989년 5월 30일 발행된 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문학청년들에게 던진 충격은 당시 이 땅의 문학적 풍토에서 어떻게 저 같은 시들을 쓸 수 있었는가 하는 경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68쪽, 천사는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기형도)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시점에서도 열두 개의 책장에 빼곡히 남은 책들은 그의 지적 편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음사판 도스토옙스키 전집, 삼성판 세계사상 전집, 홍성사의 홍성신서, 현암사의 현암신서, 창비와 문학사상의 영인본들, 청하의 번역 시집들, 문지 시인선과 민음의 시들이 그의 서가에 꽂혀 있었다. 더욱이 깨알 같은 메모와 색색의 줄들, 그리고 습자지를 별도로 붙여 요약 정리한 메모지. 안양 천변 후미진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71~72쪽, 천사는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기형도)

 

 

기형도 시인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를 아는 많은 친구와 후배들에게 시에 대해 말했으며 노래를 가르쳤다. 화음을 넣어 함께 부르는 노래를 그는 꿈꾸었다. 천재들에게서 보이는 독선과 오만이 그에게는 없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듯 시와 노래로 자신의 저 깊은 곳에서 슬픔의 우물을 퍼 올렸던 것이다. (83쪽, 천사는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기형도)

 

 

이제 그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1989년 3월 6일,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기형도 시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밥을 달라고 청했다. 밥을 차리는 도중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인사동에서 그의 행적은 묘연해진다. 아마 밥을 먹었을 것이다. 전화를 한 사람과 아니면 혼자 지상에서의 마지막 밥을 그는 특유의 조급함으로 후딱 먹어치웠을 것이다. 그리고 심야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를 인사동으로 불러낸 사람은 왜 끝내 자신을 밝히지 않았을까? (92쪽, 천사는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기형도)

 

 

 

 

기형도 시인 연보


1960. 3. 13.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출생.
1964. 시흥군 소하리(광명시 소하동) 안양 천변으로 이주.
1969.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긴 투병 생활 시작.
1976. 신림중학교 수석 졸업, 중앙고등학교 입학.
1979. 연세대학교 정법대 입학. 교내 신문 <연세춘추>에서 공모한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零下)의 바람」으로 입선.
1981. <수리시> 문학 동인에 참여하여 활동 시작.
1983. <연세춘추>에서 실시하는 ‘윤동주 문학상’에 「식목제(植木祭)」로 당선.
1984. <중앙일보> 입사.
1985. 대학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 당선.
1986.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시작 활동에 매진.
1988.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대구, 전주, 광주, 순천, 부산 등지로
여행을 하면서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한 편의 여행기를 남김.
1989. 3. 7. 새벽, 파고다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

 

 

 

자신의 죽음을 저토록 냉철하게 바라본 시인이 또 있었을까? 화산 같은 육신을 하얗게 소진해가던 핏발 선 눈빛이 흰 병실에서 나와 방어진으로 걸어간다. ‘이젠 돌아가지 말자’(「방어진・2」 부분)고 다짐했던 그의 시처럼 그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134쪽, 하얀, 해변의 죽음-이경록 시인)

 

 

 

대구 시내 한 음식점에서 이하석 시인은 이경록 시인을 추억했다.

 

(......)

 

“이경록 시인의 시는 지금 읽어도 치열성과 현대성의 정도에서 탁월한 느낌을 받습니다. 알게 모르게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는 성경의 외경처럼 읽혀져 왔습니다. 당시에는 어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시 정신의 측면에서 극도로 자신을 몰고 갔던 시인이지요. 한창 평가를 받으려는 찰나에 세상을 떠난 셈이지요.”


“시에도 죽음에 대한 시가 자주 보입니다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편들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발병 후에 쓴 작품들은 말할 나위 없고……. 「빈혈」과 같은 시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빈혈」을 옮겨본다.


밤이 되면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갑니다. 피는 어디로 가나.
피는 공중으로 공중으로 흘러서 하늘로 갑니다. 하늘나라,
피가 가는 그곳은 언제나 내 죽음의 집입니다.

                                                                                 ​_「빈혈」 부분

 

(137~138쪽, 하얀, 해변의 죽음-이경록 시인)

  

 

이경록 시인은 부인과 함께 잠들었지만 새벽에는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 시란 아름다운 그 무엇으로 알았던 이수인 여사는 남편이 시를 쓰는 과정을 지켜보며 시란 고통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한 손가락이 없어지더라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듣고 시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했던 아름다운 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52쪽, 하얀, 해변의 죽음-이경록 시인)

 

 

 

‘눈 속에 묻혀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떠나고 있다’(「폭우기」부분)고 그는 노래했다. 시인이란 어쩌면 이 시대를 떠나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떠나지 않은 시인들이란 이 시대에 마취당한 불우한 존재들일 뿐이다. ‘나는 나의 내장에, 구형의/ 작고 빛나는 못을 박는다’(「시간」 부분)라는 시구는 자신을 끝까지 밀고 간 한 시인의 빛나는 자기 고백이었던 것이다. (162쪽, 하얀, 해변의 죽음-이경록 시인)

 

 

 

이경록 시인 연보

1948. 1. 8. 경북 월성군 강동면 출생.
1965. 충남대 전국고교생 백일장 시 장원. 건국대 고교생 현상문예 시 당선.
1966. <충청일보> 신춘문예 학생부 시 당선. 경주고등학교 졸업. 신라문화제 시 장원.
1967.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입학.
1973.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74.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이수인 씨와 결혼.
1976. 박정남, 박해수, 이기철, 이동순, 이태수, 이하석, 정호승 등과 <자유시> 동인 결성.
백혈병 발병.
1977. 4. 14. 끈질긴 투병 끝에 타계.
1979. 동료들에 의해 『이 식물원(植物園)을 위하여』 발행.
1986. 경주시 진형동 ‘우정의 동산’에 이경록 시비 제막.
1992. 『이 식물원(植物園)을 위하여』를 보완하여 『그대 나를 위해 쉼표가 되어다오』 간행.

 

 

대학 입학 바로 전인 1967년 2월, 시「아침 장미원」이 『사상계』에 당선됨으로써 기성 문단을 놀라게 하며 문단에 등장한다. 국토의 맨 끝 섬에서 태어난 김만옥 시인이 드디어 중앙 문단에 등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기라성 같은 문인들 사이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는 것은 그 전례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나 특별했던 것은 분명하다. (216쪽, 먼 바다 파랑주의보-김만옥 시인)

 

 

김준태 시인이 밝히고 있거니와 그는 스스로 무등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무등을 보며」라는 시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았는가? 그 무등산에서 처절하게 자신을 끌고 가던 한 시인이 움막을 짓고 생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무섭고도 아이러니한 광경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김만옥 시인은 가솔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가난이 해결될 수는 없었던 것. 얼마 후 그는 다시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언뜻 이야기했지만, 종생終生은 종신終身과 같은 의미이다. 한평생의 마침이나 임종을 뜻하는 의미로의 종생은 단어 자체에 이미 비극성이 내포되어 있다. 유난히 그의 시에 종생이라는 시구가 많이 나오는 것은 불우한 생의 과정 속에서 파생된 관념의 소산물이기도 하지만 생의 비극에 대한 영감이 그의 무의식 저편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고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219쪽, 먼 바다 파랑주의보-김만옥 시인)

 

 

1975년 9월 4일, 한 사발의 농약으로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할 세상으로 떠났다. 그의 종생이 부상으로 투신했다면 해가 떠오를 때마다 그의 흔적도 떠오를 것이다. 서른의 나이에 그는 왜 이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가? 그의 죽음은 극적인 그 무엇도 동반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삶이 절박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아, 나의 함성喊聲은 죽었다/ (……)/ 나는 전달 안되는 모국어로 외쳤던/ 쓸쓸한 연사演士였다'(「죽은 매미의 입」 부분). ‘전달 안 되는 모국어’는 아마도 그의 시적 고뇌에 대한 형상화였으리라. ‘쓸쓸한 연사’라는 아이러니 속에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도 읽혀진다. 그러나 그의 시만은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리라. ‘오오, 그러다가 나는 비로소 꽃으로 회복된다’(「병후病後」 부분). 꽃으로 그는 살아 올 것이다. (222쪽, 먼 바다 파랑주의보-김만옥 시인)

 

 

끝내 여서도에 갈 수 없었던 일, 그리고 김만옥 시인의 가족과 연락할 수 없었던 일로 인해 좀 더 생생한 글을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시만 보라는 죽은 자의 꾸짖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서도에 들어가 김만옥 시인을 추억한 이생진 시인의 시 한 편을 실어 안타까운 마음을 대신할 뿐이다.


나는 인터넷에 이런 풍선을 띄웠다
고독하거든 섬으로 가세요
이열치열이라고
고독에 병든 사람은 고독으로 고쳐야 합니다
여서도는
전남 완도군 청산면 여서리
섬이 군이고
섬이 면이고
섬이 리입니다
집 50채에 인구 100명
고독하지만 정으로 버티는 섬
시인 김만옥의 어렸을 때 고향
그는 가난해서 시를 썼고
가난해서 인생을 포기했습니다


_이생진, 「시인의 고향-등대 이야기·51」 전문

 

 (222~223쪽, 먼 바다 파랑주의보-김만옥 시인)

 

 

 

김만옥 시인 연보


1946. 3. 6. 전남 완도군 여서도 출생.
1960. 청산도 여서초등학교 졸업.
1963. 완도중학교 졸업.
1964. 시집 『슬픈 계절(季節)의』 발간.
1965.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가작 당선.
1966.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졸업.
1967. 『사상계』 제8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
조선대학교 국문과 입학.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가작.
1969. 조선대학교 국문과 중퇴.
1971.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당선.
1975. 9. 4. 타계.
1985. 유고 시집 『오늘 죽지 않고 오늘 살아 있다』 출간.

 

 

 

 

김용직 시인, 생소하다. 그의 유고 시집을 펼친다. 시집 왼쪽 날개에 얼굴 옆면의 사진이 보인다. 가냘픈 턱선 아래로 한줄기 어둠이 흐르고, 목이 긴 그가 웃고 있다. 그 얼굴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무연탄을 가득 실은 어둠의 덩어리는 더 짙은 어둠의 덩어리를 향해 돌진한다. ‘내가 투신할 때/ 하늘은 나에게도 연꽃을 줄 것인가’(「투신」 부분). 투신과 연꽃 사이의 차이성을 가로지르는 불일치, 불편함이 그의 시 전편에 깔려 있다. 아마도 그 불일치의 매혹이 그의 삶을 끝내 휘어잡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228쪽, 기찻길, 그로테스크, 투신-김용직)

 

 

나는 서둘러 굴다리로 방향을 잡았다. 마장동을 연결하는 그 철길과 그들의 젊음을 바쳤을 굴다리 아래 술집들, 그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백인덕 시인은 내게 서둘지 말 것을 당부하고, 꼭 보여줄 것이 있으니 김용직 시인의 흔적을 천천히 찾아보자 제안하였다. 반경 1킬로미터 안에 그들의 사랑과 절망, 그리고 술과 시가 선혈로 엉켜 있을 터였다. (238쪽, 기찻길, 그로테스크, 투신-김용직)

 

 

시집에 나와 있는 기초적인 연보에는 그가 청량리공고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윤석산 시인의 말에 의하면 고등학교도 여러 군데를 옮겨 다녔을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의 방황과 갈등은 청소년기부터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했다. 긴 방황 속에서 시를 부여잡았다는 것은 곧 그에게 시가 구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44쪽, 기찻길, 그로테스크, 투신-김용직)

 

 

그의 물리적 흔적이란 결국 물과 바람과 흙, 그리고 나무로 남을 뿐이었다. 그를 추억할 만한 장소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다. 마장동 철도변의 집 한 채. 아니 방 한 칸. 한 칸 방을 칸막이로 나누어 자신의 시적 세계를 펼쳤던 그는 그렇게 서둘러 이승을 떠났던 것이다. 철없던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 잠을 잘 때면 꼭 늦은 아침이 차려져 나왔다는 윤석산 시인의 회고는 가슴 아프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어디선가 쌀을 꾸어와 지었을 아침밥이었다는 것. 그 어려운 살림에도 밥상에 놓여 있던 한 마리 꽁치. 그에 대한 추억이 한 그릇 따뜻한 밥으로 살아나는 순간이다. 가난한 시대를 가난하게 살았던 젊은 모더니스트는 그렇게 피안의 세계로 떠났던 것. ‘마지막 남은 햇살이/ 가을 끌고 가'(「두 개의 추상」부분)듯 그도 갔다. (249쪽, 기찻길, 그로테스크, 투신-김용직)

 

지금도 김 형이 살다간
우시장에는
말목이 나란하게 박혀 있다.
매인 끈을 위하여
말목은 박혀 있고,
갈 데를 알고
말목에 매인 황소는
눈알이 유달리 컸다.
눈알의 흰 자위가
유달리 어두워 보였다.
김 형, 삼대(三代)를 끊어버리고
어머니는 화장터에 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비가 오고 있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동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우시장 말목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아무도
땅속에 묻힌 말목의 깊이를
보지 못한다, 아무도
죽음의 깊이를 만져
보지 못한다.
다만 땅위 말목만 볼 뿐이다.


_권달웅, 「원적지(原籍地)」 전문

 

권달웅 시인의 조시弔詩 한 편이 그의 시의 원적지가 어디인가 확인케 해줄 뿐이다. (249~250쪽, 기찻길, 그로테스크, 투신-김용직) 

 

 

김용직 시인 연보


1945. 출생.
1967. 한양대학교 국문과 입학.
1970. 한양대학교 학술상 시 부문 수상.
『현대시학』 시 등단(박목월 시인 추천).
1975. 간경화증으로 투병하다 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타계.
1983. 친구들의 도움으로 유고 시집 『빗발 속의 어둠』 출간.

 

 

 

 

간혹 세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들로 우리를 당혹케 한다. 송유하 시인의 죽음이 바로 그러하다. 그의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적 고리를 찾아내는 것을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타인에 대해 결례를 범한 적이 없는 수도승의 자세를 가진 한 젊은 시인이 왜 의문의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가? ‘가장 불행한 생활을’ 감수하고자 했던 강인한 내면이 왜 어이없이 무너져야 했는가? 그러나 어찌 보면 세계는 늘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어느 날 김포의 외딴 논두렁에서 발견된 의문의 주검. 온갖 의문 속에서 차라리 나는 그의 죽음보다 삶의 모습을 찾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다. (316쪽, 니르바나를 향한 단독자의 길-송유하 시인)

 

★ 

 

요절한 시인들을 찾아다니며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사실은 바로 그들 하나하나가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송유하 시인에게서 역시 겉으로 드러난 고요함과 다른 내부로부터 솟아올라온 생의 모순에 대한 치열한 불꽃을 만나게 된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솟아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송유하 시인의 시는 잘 보여준다. (321~322쪽, 니르바나를 향한 단독자의 길-송유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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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여, 두 뺨이 예쁘게 꽃핀 아가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자
정직한 사내들의 체온
억새풀 같은 여인들의 사랑을 비벼서
매서운 칼을 맞아도 울지 않는
눈사람을 만들자


_「암사동시(岩寺洞詩)·아홉」 전문


이 시는 겨울날 눈 내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아내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을 취한다. 정직한 사내와 철모르는 아이가 등장하고, 가난하지만 정직한 사내는 자신의 노동만이 유일한 삶의 수단임을 잘 알고 있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자신의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가난한 이웃의 이야기라는 보편성을 함께 띠고 있다.(334~335쪽, 니르바나를 향한 단독자의 길-송유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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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하 시인 연보


1944. 4. 23. 대전 출생.
1964. 동국대학교 주최 고교 백일장에서 시 「주발」이 장원으로 당선.
1965. 대전 보문고등학교 졸업.
1970.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71. 『월간문학』 제1회 신인상 당선.
1971~1982. 월간 『학원』 『대한불교』 『주부생활』 등을 거쳐 『어깨동무』 편집장으로 재직.
1982. 4. 10. 김포 들판에서 의문의 죽음.
1993. 유고 시집 『꽃의 민주주의(民主主義)』 발간.

 

 

 

아버지 말씀처럼 콩나물을 기르는 것이 우리의 땀과 정성이라고 한다면, 별을 기르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저 아름다운 새벽별들을 키우는 것일까. 파란 콩알을 콩나물통 속에 묻어 두고 땀과 정성의 펌프물을 주면 일주일 만에 예쁜 콩나물이 되듯이, 조그만 말들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땀과 정성을 기울여 물 주고 물 주고 자꾸 눈물을 주면, 저렇게 예쁜 별, 저렇게 빛나는 새벽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펌프질을 멈출 수 없었다. 잠시라도 펌프질을 멈추기만 하면 곧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공장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쉴 사이 없이 별을 쳐다보며 쓰려오는 손바닥의 아픔을 참고 있었다.

 

_소설 『동거인』 부분

 


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콩나물을 기르는 가업을 그가 가끔 시간을 내어 돕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투신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위의 소설에서 보듯이 그는 콩나물에 물을 주면서도 별을 생각했던 것이다. 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그를 끝없이 괴롭혔을 것임이 분명하다. (347~348쪽, 철조망 속의 파라다이스-박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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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매우 나약하게 보였지만 술과 주먹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임병호 시인과 화홍문 큰 느티나무 아래서 당시 4홉들이 샛별소주를 마시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불량소년들이 나타나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자 임병호 시인은 깍듯하게 불을 빌려주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보기에 고까웠던 박석수 시인은 3대 1의 싸움을 벌이는데 순식간에 세 사람을 눕혔다. 아시아 자유청년연맹 학생 미술실기대회에서 특선을 할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박석수는 주먹을 겸비한, 그러나 더 쓸쓸한 청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문학적 치기로 뚤뚤 뭉쳐진 한 문학소년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는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349~350쪽, 철조망 속의 파라다이스-박석수 시인)

 

 

1983년에 그는 두 번째 시집 『방화』를 상자한다. 이 시집은 후일 미국의회도서관에 비치된다. 아마도 쑥고개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시편들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미적 성향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이 시집 후기는 문학적 친분을 나누던 소설가 이외수가 썼다. “그의 시는 아편 아니면 독약이었다. 어느 것이든 읽으면 육체도 영혼도 취해서 혼곤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짧은 기술은 박석수 시인의 시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쑥고개 연작이 품고 있는 독기를 소설가 이외수는 간파했던 것이다. 박석수 시인은 이외수와는 절친한 친분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술에 진창 취한 두 사람은 여관에 찾아든다. 여관방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섰을 때 이외수의 발에 꼬여져 있던 양말은 발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두 사람이 친분을 나누게 된 공통분모는 아마도 처절함이라고 할 생의 변방 의식이 작동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359~360쪽, 철조망 속의 파라다이스-박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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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수 시인 연보


1949. 경기도 평택시 송탄면 출생.
1970. 수원북중을 거쳐 삼일상고 졸업.
1971.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 당선.
1976. 첫 시집 『술래의 노래』 간행.
1979. 변두리 잡지사를 전전하다 『여원(女苑)』에 입사.
1980. 『월간문학』 소설 신인상에 당선.
1983. 두 번째 시집 『방화(放火)』 간행.
1985. 갑자기 쓰러져 충남 당진으로 요양.
1987. 세 번째 시집 『쑥고개』 간행.
1996. 뇌졸중으로 투병 중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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