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유병록 <낙관도 비관도 없이>

미송 2014. 7. 18. 07:56

 

 

낙관도 비관도 없이 / 유병록

 

걷는다

귀를 막고 진열된 희망들 사이로, 입을 닫고 버려진 절망들 사이로

낙관도 비관도 없이

 

희망에게는

불길한 몇몇의 아나키스트를 길러내서 내쫓는 풍습이 있다 자진해서 국경을 넘는 자들이 있다

 

절망에게도

얼마쯤 행복이 있겠다 사소한 즐거움은 있겠다 작은 고통이 큰 고통 곁에서 위로받듯이

 

희망이 절망을 경멸하고

절망이 희망을 짓밟는 광장을 지나서 간다

 

나는 둔감하고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미소를 짓지 않는다 지옥을 떠올리며 농담을 건넬 수도 있다

 

나를 경멸하는 너에게

나를 가엾게 여기는 너에게 말한다

 

사양하겠습니다

교수대 앞에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 위대한 악인들처럼

 

월간 유심20146월호 발표

 

 

▶ 유병록 2010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가 있음.

 

한 여름날 정오에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와 무지 덥겠다, 소리를 치며 유리벽 밖을 자세히 보았을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시각장애인임을 난 알아챘다. 옆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중얼거리셨다. 전쟁이 나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벙어리 보다 귀머거리라니까. 이유인즉, 눈먼 사람은 팔짱이라도 끼고 도망치면 되지만 귀 먹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덧붙여 농담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게 벙어리가 귀까지 안 멀면 살인난다니깐. 순간 난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씀이다. 말도 못하는데 귀가 다 듣고 있으면 그것처럼 열받는 일도 없으니, 혹 나쁜 소리만 귀에 계속 들어오면 살인날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는데, 동시에 밀려드는 슬픔을 뭐라 해얄지.

 

나도 어느 때인가 아침에 창문을 열고  맞은 편아파트들의 창문을 바라보며 바다를 연상하다가 천국과 지옥을 물은 적이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시를 짓고 날려 버리긴 했지만, 그런 이상한 기분이 있었다. ‘화급하여 즉흥적인 말이었을까. 때로 아니 종종 우리는 맺힘을 풀어낼 언어를 화급하게 아니 화가 난 듯 즉흥적으로 뱉고 싶을 때가 있다. 천국이니 지옥, 불행이니 행복, 희망이니 절망, 사랑이니 배반과 같은 언어의 지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아마 저런 시가 나오지 않을까 추측이 된다. 모든 역사를 되돌아보아 제대로 된 사람들은 대부분 선인들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 콜롬부스 이후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뒤통수치듯 중얼댔던 갈릴레오가 그랬고, 교황청 중앙에 서 있던 스피노자가 그랬고, 이승만 이전의 김구선생이 그랬다. 성실한 악인들은 다수의 선인에 의해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게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게.

 

다만, 남은 우리는 매순간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 고 강요받고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