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주 <늙은 베르테르>
큰곰자리 M82소용돌이성운
늙은 베르테르 / 이인주
슬픔인 줄 모르고 별이 빛났다 무구는 저렇게 반짝이는구나 상사화가 색을 엎질러도 잎들은 모르는 길을 갔다 너를 겨냥한 총구가 나의 절정이었다 입이 없는 노새처럼 그을린 속을 짊어진 시간이 땡볕을 걸어갔다 발자국마다 모래가 신기루로 흘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고 변하는 것도 없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숨넘어가는 편지가 오기도 했다
흙으로 된 글자로 너를 만지고 싶었다 부드러운 글씨체, 한 세계가 아마포 감촉일 때 무릎 꿇고 싶었다 멀리 영봉 너머로 태양이 지고 능소화가 기염을 토했다 너를 뼈저리게 조준한 세계가 나였다 테두리 진 기쁨 안에서 너를 껴안아 본 적 없으니 너는 물의 나라 해례본이었다 숨겨둔 반역의 글자를 풀어놓으니 슬픔이 슬픔의 뿌리에 가닿아 지극하였다
이제 슬픔은 물굽이가 없다 넘을 수 없는 분노는 물방울에 갇힌 사금파리별이다 여전히 밥을 떠 넣어야 하루가 갔다 태어나서 처음 앓은 병이 능소화다 노새는 짐과 함께 등도 버렸다 길은 얽히고설켜 소임을 잃었다 그 땅에서 흙으로 된 글자를 가만히 만진다 과녁 없는 슬픔이 너였구나 한 생을 탕진하고 얻은 글자가 읽히지 않아서 그리 좋다
이인주 시인 - 경북 칠곡에서 출생. 경북대 화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2002년 '수주문학상', 2003년 '신라문학대상', 2008년 '평사리문학대상', 2010년 '목포문학상' 수상.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그야말로 고전입니다. 스물여섯 젊은 괴테의 감미로운 감성이 녹아있어 ‘베르테르 신드롬’이라는 전문용어까지 탄생하게 만든 작품이죠. 약혼자가 있는 여인 로테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을 불태우던 베르테르는 로테가 결혼하자 그의 남편에게 권총을 빌려 자살하고 맙니다. 이 시는『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한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한 적이 있었다.”라는 그 유명한 문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마도 시인은 베르테르가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절망으로 젊은 나이에 자살하지 않고 우리처럼 평범하게 나이가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너’를 향한 ‘과녁 없는 슬픔’으로 ‘한 생을 탕진하고’ 있는 존재들은 모두 ‘늙은 베르테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시인 최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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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늙으면 저리 될 수도 있겠구나, 잘 늙을 수만 있다면…….
간명한 은유로 짤막하게, 뜨겁게, 할 말 하고 입 꼭 다무는 이가 멋지단 생각이 든다. 오 분이면 끝낼 얘기를 한 시간 이상 지리멸렬 떠드는 이도 있으나, 한 칼에 아니 한 방에 죽여주는 이도 있으니,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많아 하늘 위 별만큼 다양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십대에 죽지 않고 평범한 부부로 한 백년 살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해 본 적 있다. 오늘은 우연히 베르테르가 늙도록 살았으면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상상을 만났다. 시란 늘 새로운 상상력의 출현이며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무릎을 치며 좋아할 깨달음이던가. 한 칸 한 칸 시인의 사유를 밟아 내려올 때마다 어려워도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며 발전적인 성과다. 비록 시 속에 늙은 베르테르는 탕진하고 얻은 글자가 읽히지 않아 좋다 고 했지만. 아무튼 어떤 연유로든 좋은 게 좋은 거다. 소문에 의하면, 청년 베르테르는 큰곰자리별을 좋아해서 맨날 창가에 턱을 걸치고 올려다봤다는데, 소용돌이칠 때 더 빛나는 저 사진 속 별의 모습은 아직도 총탄이 한 방이나 더 남았다는 무언의 과시인지 암호인지. 멀리서 보는 별은 사정이야 어찌하든 다 아름답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