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춘성부(春聲賦)
아내와 춘성부(春聲賦)
이정문
책 읽는 목소리에 잡념이 들었다는 아버님의 꾸지람이다. 어찌 그리도 귀신같은지 내 안색만 봐도 공부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대뜸 짚으시니, 그 눈을 속일 수 없고 조금이라도 꿈쩍하여 옆길로 샐 수도 없어, 봄기운 녹아내린 정원만 멀뚱멀뚱 바라보는 춘삼월의 깊은 밤에 내 심사가 편할 리 없을 진저, 안채에서 간간히 들리는 아내의 맑은 목소리에 두 다리 사이의 남근이 꿈틀대고, 뽀얗게 솟은 아내의 꽃망울 같은 젖가슴이 눈앞에 한들거린다. 도대체 형벌이 따로 없다. 보름 전에 책을 읽다가 치솟는 춘심을 가누지 못하여 대낮에 아내의 방을 몰래 찾아들어, 장부의 체통을 운운하며 발끈 하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제발 한번만 몸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사정하여 기어이 그 뜻을 이룬 즉, 활짝 펴진 기분으로 옷을 추스르며 공부방으로 살금살금 돌아오다가 그만 아버님과 딱 마주쳤으니, 천둥번개에 얻어맞은 듯 아찔한 정신으로 곱게 인사드렸지만, 지엄한 아버님의 일갈이 떨어지니, 과거시험을 치룰 때까지는 근신하여 절대로 아내의 방 근처에도 얼씬대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그리고 춘성부(春聲賦)라는 글귀를 내 주며 재주를 펴서 그 뜻을 시(詩)로 풀어보라고 하셨으니,
가을밤에 처량하게 읊는 구양자의 추성부(秋聲賦)도 아니요, 여름밤의 선선함을 노래하라는 하성부(夏聲賦)도 아니고, 동짓달의 혹한을 내려쓰는 동성부(冬聲賦)도 아닐 진저, 하필이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엉덩이가 들썩이고, 봄볕이 방 턱까지 쫓아 들어와서 자꾸 밖으로 나를 끌어내며, 먼발치로 아내의 그림자만 보아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봄을 노래하라는 말인가, 더구나 방문턱만 넘으면 공부하는 행실이 성실치 못하다 하여 대뜸 아버님의 진노가 떨어지는 판인데, 사방팔방 꽃이 만발하고 그 틈새로 처녀 총각의 웃음소리 드높은 계절에 구들장이 따듯하면 졸음만 온다고, 아궁이의 불마저 빼 버린 골방에서 천지의 봄을 다 끌어 모아서 난데없는 춘성부(春聲賦)를 쓰라고 하시니, 적이 아버님의 매정함이 원망스러워 혀를 차다가 창밖을 내다보니, 썩은 동태 눈알처럼 뿌연 내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어, 하얀 목련꽃이라, 아내의 살결을 닮아 저렇듯 백설처럼 곱기만 하구나. 쯧쯧,
구양자는 가을소리를 일컬어 기괴하다 했으니, 처음에는 음산하다가 나중에는 파도처럼 그 힘이 넘쳐서 쇠와 쇠가 쨍쨍 부딪치는 소리 같고, 마치 재갈을 입에 물고 적진을 향하여 질주하는 병사의 말달리는 소리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봄소리는 어떤가, 역시 기괴하다. 춘야(春夜)는 천리 밖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들릴 듯 고요하다. 그러나 분주하다. 낮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바람이 산천을 녹이고 지나면, 삼라만상이 밤기운을 타고 꼬물꼬물 움직이니, 꼭 적진을 둘러싸고 야음을 틈타 침입하는 소리죽인 병사의 몸놀림 같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마구 조여 온다. 구양자가 본 달이나 내가 본 달이나 다 둥근 달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느 계절도 달은 둥글 때가 되면 둥근 것이요, 질 때가 되면 변함없이 일그러진다. 산꼭대기에 걸린 달을 보며 토하는 가을의 탄식이나 봄의 탄식이 서로 다를 일이야 없겠으나, 가을은 쇠한 기운을 먼발치에서 탄식하면 그만이지만, 봄은 온 몸을 휩싸며 같이 죽자 사자 달려드는 기운이 생생한지라, 거절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전투구의 한심함이다. 떼어 낼 수가 없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추스르려고 주자의 권학편을 먼저 드높이 읽고나서 경서를 펼친다. 지엄한 선현의 글을 읽는 목소리가 왜 이리도 흐물흐물한가, 논어(論語)에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피고 대학(大學)에 철쭉꽃이 하늘거린다.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두어 번 흔든 다음에 다시 책장을 넘기는데, 맹자(孟子)에 또 꽃잎이 살랑거린다. 중용(中庸)에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들여다보니 오호, 이런 일이 또 있을까, 보조개가 쏙 들어간 아내의 깜찍한 얼굴이 뽀얗게 웃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오라고 손짓하며 헤헤 웃었다. 그러다가 방문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드니, 꿈인가, 생시인가, 진짜 아내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야참을 내려놓으며 힐책하듯 물었다. “어이하여 그렇듯 손을 휘휘 저으며 책상 앞에서 헛소리를 하시나이까?”
“음음, 그게 말이오, 춘성부......”
“춘성부가 어찌 되었는데요?”
더듬더듬 망상을 변명하여 툭 튀어나온 말이 이백(李白)의 서(序)인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니, 봄날의 어느 날 밤에 이백이 오얏꽃 만발한 동산에서 일가친척을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고 시를 지으며 즐겼던 일이라, “복숭아 오얏의 꽃동산에 모여서 천륜(天倫)의 즐거운 일을 펴니(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라는 구절을 주절대었다. 아내가 정색하며 대장부가 혈육의 정이나 풍류에 깊이 기울면 천하의 뜻을 다 펴지 못한다고 책하듯 말하니, 하필이면 왜 이백의 서가 튀어나왔는지 민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어흠 헛기침을 하며 수저를 들자 아내는 뒤춤에서 호리병을 꺼내어 섬섬옥수 손을 뻗어 한 잔 받으시오, 하고 곡주를 따르니 방안에 그 향이 가득하여 실로 봄이 따로 있지 아니하여, 은근한 눈빛으로 살짝 고개 숙인 아내의 이마를 내려다보며 그 심중을 떠보았다. “헛험, 부인의 말이 맞소. 대장부가 어인 봄날을 따질 것이며 혈육의 정만 앞세울 것인가,” 그러자 아내는 샐쭉한 목소리로 가냘프게 대답하는데, “법도가 지나치면 근본을 잊을 염려가 있으니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했다.
참으로 묘한 아내의 말이다. 천하의 뜻을 펴기 위하여 부부의 정을 잊으라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를 적당히 돌봐 가면서 천하의 뜻을 펴라는 뜻인지 아리송하다. 짐짓 길은 먼데 날이 저무는 형상이라 참으로 애타는 마음뿐이라고 시치미를 뚝 떼자, 아내는 별안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꾹꾹 참다못해 킥킥대는 것이니, 도화(桃花)의 색이 분분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꼴이지만, 명색이 대장부인 내가 어찌 내색하여 본심을 드러낼 것인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상을 물린 후에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앉았다. 그러자 아내는 살짝 몸을 일으키며 이만 물러가겠다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화급한 마음이었지만 지나는 말투로, “부인, 춘야(春夜)의 명월(明月)이 만개한 목련화에 걸렸구려.”하고 슬쩍 던지자, 아내도 역시 고개를 돌린 채 뒤뜰을 내다보며 지나는 말투로, “천하를 좌우하는 빛은 명월(明月)이 아니라, 대명천지의 태양이 아닐까 하옵니다.”하고 빈정거렸다. 마음이 더 다급해진 내가 팔을 뻗어 은근히 아내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자, 짐작한 일이지만 가볍게 뿌리치며 몸을 빼려던 아내가 못이기는 척 하며 딸려왔으니, 그 마음 또한 봄이 아니런가, 부부의 정도 또한 봄이 아니런가,
남강(南江)에 배 띄워 호기 부린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깊은 한숨을 어찌 아내에게 용납할 일인가, / 보슬비는 서쪽 연못에 내리는데(春雨暗西池) / 찬바람만 장막 속에 스며들어(輕寒襲羅幕) / 뜬 시름 못 이겨 병풍에 기대니(愁依小屛風) /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薔頭杏花落),
아내의 눈동자에 달이 들어앉았다. 조금만 배가 흔들려도 호들갑 떨며 두 손으로 내 무릎을 꼭 쥐어 한 치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음이라, 여정(女情)이 곧 춘정(春情)이요, 춘정이 곧 화합의 정(情)이니, 봄은 하늘에서 땅에서, 산에서 강에서, 만물이 음양을 속속들이 드러내어 그 짝을 찾아 소란을 떠는 계절이다. 가을이 만물을 말려 죽이는 살생의 덕이라면 봄은 만물을 일으키는 양생의 덕이다. 생(生)은 곧 소리요, 소리는 곧 만물의 움직임이니, 만물을 요동시키는 근본인 봄은 사방에서 우르릉 쾅쾅, 와와 함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달려온다. 땅 속에 웅크리고 있던 두더지는 봄날의 심사가 편치 않으니, 가만히 있어도 누가 허리를 쿡 찔러서 기겁하여 옆을 파고들지만, 그곳에서도 또 누가 배를 콱 내질러서 또 그 옆으로 파고들어서 숨죽이고 있은데, 다시 또 엉덩이를 콱, 가슴을 퍽, 어깨를 쿵, 하며 찌르고, 패고, 내질러서 누군가 하여 살펴보니 땅속을 뚫고 치솟는 봄이라, 기어이 앞도 못 보는 눈을 치켜 올려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봄을 피했음이라, 봄은 구석구석 도달치 않는 곳이 없고, 봄은 웅성웅성 떠들어대지 않는 곳이 없다. 오호라,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닌 사면춘가(四面春歌)로다.
가슴은 그지없이 넓지만 일부러 옹색한 빛만 보이는 시어머니의 눈을 피하여, 춘야의 남강에서 지아비와 함께 뱃놀이를 즐기니, 아내의 눈동자에 들어있던 달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그 얼굴이 환한 달덩이로 변한다. 삼경을 넘어서야 겨우 춘심(春心)을 가라앉혀 강변에 배를 대놓고, 뒤로한 내 손에 아내의 손을 쏙 집어넣고 촉석루를 돌아 올라서 살금살금 집의 대문을 들어서는데, 달그림자 길게 늘이고 마당 가운데 서 계시는 아버님과 정면으로 부딪쳤으니, 아내는 오금이 저린 상으로 얼른 뒤돌아 몸 둘 바를 모르고, 내 가슴도 덜컥 내려앉아 목소리조차 제대로 목구멍을 넘어서지 못할 지경이라, 멈칫멈칫 하다가 그래도 아내 앞에서는 지아비인 즉, 흩어지지 않는 공손함으로 머리 숙여 인사드리려는 찰라, 의외로 아버님은 며느리를 못 본 척하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묻는다.
“춘성부는 어찌 되었는고?”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으니, “춘성부(春聲賦)는 무성부(無聲賦)입니다.”하고 대답한 즉, 아버님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찌 무성부라 일컫는고?”하기에,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 이유를 밝힌 즉, “대저 사물이란 사람의 눈에 보일 것만 보이고, 들릴 것만 들리는 것이라, 사물이 너무 크면 보이지 않으며 소리가 너무 요란하면 고요할 뿐입니다. 천지에 봄이 철철 넘치니 온통 봄소리뿐이라, 아무 것도 귀에 들리지 않음은 정한 이치옵니다.”하고 답하니, 아버님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그러면 춘성무성일여(春聲無聲一如)라는 결론인 즉, 봄이란 분명히 소란하여 그 기세가 사람을 뒤흔들지만 소리는 없는 것이렷다. 허허, 고연 놈, 둘러대기도 잘도 둘러대는구나.”하시지만, 그다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은 아니다. 여전히 내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며느리를 못 본 척 하시는 아버님은 돌아서면서 중천에 뜬 달을 바라보며 “춘야에 명월이 만개한 목련화에 걸렸군.”하시고는 안채로 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2005년 3월 초순, 옛 선비의 봄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