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석지명 <머무는 바 없이 내는 마음, 금강경2>

미송 2014. 11. 1. 08:17

 

매달림 없는 마음으로 역사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일상사의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금강경>중에 유명한 구절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이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육조스님은 이 구절을 듣고 깨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먼저 <금강경>가운데 이 구절이 나오는 상황을 읽어보기로 하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는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면 그 장엄은 진정한 장엄이 아니라 오직 그 이름만 장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보살은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눈에 보이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감각기관의 대상에 의지해서 마음을 내면 안 된다. 응당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할지니라." 부처님이 수보리존자에게 묻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데로 유도한다.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으로 장엄하면 그것은 이미 불국토도 아니고 장엄도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이거나 정신적인 것을 막론하고 불국토를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잘못 집착하기 때문이다. 반야부의 모든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금강경>도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철저한 자기 지움, 자기 버림, 집착의 지움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깨달음의 세계를 꾸민다는 이름으로, 깨달음을 실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이미 그것은 깨달음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 깨달음의 세계 또는 불국토가 실체적인 것이 되면 현실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이상세계를 기다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철저한 공을 닦는 길과는 반대의 길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바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장엄은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지언정 목표로 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에 감각기관의 대상에 머문 바가 없이 마음을 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감각기관의 대상은 육체적·물질적인 것이니까 나쁘고 정신적인 것은 좋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육체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막론하고 객관적인 불국토가 실체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집착의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번 반복하지만 불국토나 불국토의 장엄은 반야바라밀을 닦은 결과일지언정 목표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이가 수행하다가 목숨을 거둔 다음에 그 수행자의 몸을 화장하여 사리가 나왔다면 그 사리는 수행한 결과일지언정 수행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효부상을 받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효부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그녀는 이미 효부가 아니다. 사회봉사를 해서 사회적인 존경도 받고 국가로부터 훈장도 받은 사람이 있을 경우 그는 봉사한 결과로 훈장이나 존경을 받을지언정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봉사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었을 때 그는 이미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부처님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마음으로 장엄을 하면 이미 그것은 장엄이 아니므로 감각기관의 대상에 의지하지 말고 깨달음의 세계를 꾸미기 위한 마음을 내라고 한다. 그 다음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이어진다. 이 구절의 뜻만 생각하면 '집착이 없이 마음을 내라.'가 되지만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한다면 '불국토라든지 장엄한다는 것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여의고 불국토를 장엄할 마음을 내라.'는 뜻이 되겠다. 여기서는 수행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므로 일차적으로 부정하는 불국토나 부정 뒤에 오는 불국토가 다 같이 공사상에 의한 육바라밀과 육바라밀을 반야바라밀로 회향하는 것이 되겠다. 이 불국토의 장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라는 무대 위에 육바라밀의 행을 공연하는 것이 된다. '응무소주' '머무는 바 없음'<반야심경>에서의 '색불이공(色不異空)'이라고 한다면 '이생기심' '마음을 내라.'<반야심경>에서의 '공불이색(空不異色)'이 될 것이다. '색불이공'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현실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요, '공불이색'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공의 세계에서 현실의 역사세계로 나오는 것이 된다. '응무소주' '불국토에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이 현실의 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요, '이생기심' '불국토를 장엄할 마음을 내라.'는 것이 공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선사님들의 게송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산사에 고요히 앉아 있으니 고요적적하여 자연의 본래자리 그대로라.

무슨 일로 서풍이 불어서 수풀을 움직이며 기러기 소리가 추운 겨울 하늘을 길게 가르는가.


고요히 앉아 있는 부분이 현실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람이 불고 새가 우는 것은 공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는 것을 뜻한다. 차별이 있는 현실에서 차별이 없는 고요로 들어가고 차별 없는 고요에서 차별이 있는 지혜를 가지고 현실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집착이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 또는 '매달림이 없는 정열'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진리에 합당하고 인류에게 이익된 일일 경우 결과의 성패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로 통칭되는 육바라밀의 행을 하는 것이 바로 불국토 또는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달림 없는 마음으로 역사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일상사의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밥 먹는 일, 옷 입는 일, 잠자는 일 하나하나가 불사가 되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은 차에도 '오차'라고 해서 경어 ''자를 붙이고 밥에도 '고항'이라고 해서 ''자를 붙인다. 대부분의 사소한 일에도 ''자를 붙임으로써 그 일의 존중을 나타낸다. 이것은 일본의 언어문화일 뿐이고 일본인들이 모든 일을 그들이 쓰는 말과 같이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처리하는 것은 별문제이다. 여하튼 한 동작 한 마디마다 육바라밀의 행으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심정으로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며칠 전에 한 객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스님은 '돈 들이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즐거운 마음 만들기 모임'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한 시골의 수련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깨우친 바가 컸고 그 깨우침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첫 번째의 실천방법이 자리양보라고 했다. 도시나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버스나 기차를 타게 된다고 한다. 그 스님은 처음에 자신보다 연세가 높은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리를 양보하기로 했는데 이제는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가 물었다. 먼 길을 가면서 누구에게나 자리를 양보하면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양보하기는 하지만 자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양보해주는 이와 양보받는 이가 교대해서 앉으면 서로 피곤하지 않고 자리를 교대하는 중에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인간관계의 정도 생긴다고 대답했다. 그 스님은 또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두고 자리를 지키고 계속 앉아 있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한 일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찌 꼭 버스나 기차에서의 자리 지키기만 피곤한 일일까보냐이 세상의 모든 편안한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계속 지키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나 전철에서의 자리양보, 인생의 모든 자리에 있어서의 상호교대,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서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이 꼭 신문 방송에 나올 만큼 거창한 일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소한 생활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처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살행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집착이 없는 불국토 장엄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육바라밀 전체를 한꺼번에 실천해서 불국토를 장엄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능력이나 환경이 되지 못하면 육바라밀 중에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