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기택 <무단횡단>

미송 2015. 2. 22. 07:53

 

무단횡단 /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시간의 게으름을 역설하던 어느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가속을 생명처럼 여기며 달리던 자동차, 돈과 권력과 기계에 맞물려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우리가 아니었던대체 당신의 자가용엔 왜 브레이크가 없는 거니, 경악하며 울부짖던 때 혹여 나에게도 있었던가. 아무튼, 사람끼리야 잘 박을 수록에 좋은 일이겠으나, 기계들의 충돌은 상상을 초월해 끔찍스런 현장만 남긴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일은 그러기에 적극 피해야 마땅한다. 사람도 개도 뭣도 아닌 시체꼴로 돌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시골길이 더 위험하단 소릴 들은 적이 있다. 한적한 길이니 지 집 정원인 냥 흐느적거릴 것도 같은데, 간혹 운전자들 중에는 긋한 관성밖에 안 남은 기계인간도 있는 법이라서, 시골길을 고속도로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는. 오늘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그런 세상 속도에 달관이나 하신 듯 무단횡단을 하고 계신다. 감히 어째서. 그러나 죽음조차 스스로 알아서 피해가란 듯 읽히기도 한다. 우라질 이을 속도광들아 - 하시며 꾸짖는 건 또 아닐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