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外 2편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 박정대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참으로 멀리 갔던 마음이 고요히 돌아오는 시간이면 우주는 혀끝에서 침묵으로 맴돌고 내가 말을 하면 우주에 굉음이 일어날 텐데 또 몇 개의 별들이 폭발할 텐데 나의 침묵이 우주의 고요를 돕는 시간이면 갯벌에는 망둥어가 뛰고 황새치는 먼 바다의 고향으로 나아가고 마음은 다 해진 짚신처럼 절뚝이며 내게 돌아오느니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오전 열한 시의 나무 아래서 나는 한밤중의 시를 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펜을 움직여 우주의 운행을 돕는 일 그러나 지금은 인류를 향해 경고 같은 마지막 숨결의 시를 쓴다 마치 알래스카에서 자신이 관찰하던 곰에 죽임을 당한 어느 비운의 사내처럼 알래스카의 바람처럼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지상에서 사라지니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무엇엔가 사로잡힌 영혼들이 절뚝이며 걸어가는 밤 그 밤을 고요히 덮어주려고 남반구의 구월에 올해의 마지막 눈이 내리는데 오전 열한 시의 사막에서 누군가 방금 눈을 떠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자정(子正)의 모래사막을 응시한다
계간 『문학·선』 2014년 겨울호 발표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 박정대
허름하고 낡은 롯지 창가에 반가사유상을 올려놓고 술을 마신다
반가사유상은 어느 먼 옛날 누가 만들었을까
비단은 서쪽으로 가고 불교는 동쪽으로 흘러오던 그 시절, 반만 가부좌를 튼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이 아름다운 청년은
어떻게 반가사유상까지 걸어왔을까
영혼은 어디에 두고 왔을까
나는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 출출해져 거리로 나선다
멀리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여기는 마오이스트 해방구 거리
거리 가득 겨울 바람은 매서운데 내가 알던 이곳의 술집과 식당들은
문을 닫고 국밥 한 그릇 먹으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오랜 왕국을 멸망시킨 그대들의 거리 한 모퉁이에서 나 지금 반가의 자세로 생각하노니
인민의 행복은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
아주 낮은 곳으로 내려와 착륙하는 눈발의 계급들
혁명이란 인민의 외투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따뜻한 국밥과 영혼과 음악으로 바꾸어 주는 것
오랜 왕국의 깃발을 내린 그대들의 거리에서 곰곰이 생각하노니
나는 소위 그대들이 말하는 역사적 발전을 믿을 수가 없구나
따뜻한 국밥집 하나 찾을 수 없는 이 차가운 심장의 거리에서 인민이 여전히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그대들의 거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쓸쓸함이 허기처럼 가득한 거리에서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프고 추운데 왜 모든 식당은 셔터를 내렸나
겨울 저녁 여전히 불 밝힌 안나푸르나와 센티멘탈 세탁소의 다리미 불꽃은 밤새 누군가의 외투를 말려주고 있다
누군가 티베트 독립군 복색을 하고 있다고 국밥 한 그릇 내어주지 않는다면 이 거리는 참으로 이상한 편견의 계절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을 뿐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행복한 꿈을 꾸며 잠들고 싶을 뿐이다
가끔은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또 가끔은 나도 음악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대가 아니고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꿈꾼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대이기 때문에 늘 자신을 꿈꾸지 않는가?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그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바닷가 조개껍질을 주워 화폐로 사용할 테다
종이가 없으면 풀잎의 이슬에 시를 적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양의 견갑골에 편지를 쓰리라
누군가 여전히 잠들지 안고 지구라는 별의 한 모퉁이에서 풀잎의 시를 읽고 견갑골의 편지를 읽으리라
패각추방의 날들 속에서도 지상의 양식들은 여전히 자랄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 지상의 양식을 독점하려 하지 말라
그 어떤 이유도 지구의 식량과 음식과 영혼을 독점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국경이 국경안의 인민만을 배불린다면 그 국경은 타도되어야 하리라
지구라는 행성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이 행성은 타개되어야 하리라
나의 시가 그대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으리라
나의 사랑이 그대의 슬픔을 키운다면 나는 그 어떤 사랑도 꿈꾸지 않으리라
나의 고독이 음악하나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고독의 손톱마저 뽑아 버리리라
그러니 눈발이여, 지금 이 거리로 착륙해 오는 차갑고도 뜨거운 불멸의 반가사유여,
그대들은 부디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세상 모든 원소들의 백색소음 / 박정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세상을 가져 온다
바나나가 그려진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열어 음악을 들으면 눈밭 위에 앉아 짹짹거리는 작은 새들의 소리처럼 그리운 소음
소음이 그리운 날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빠져나와 하루 종일 닉 케이브를 듣는다
닉 케이브라는 소음의 천사를 나는 예전에 알았다
그가 전직 천사였다는 것을 안다
너무 아름다운 노래 때문에 타락 천사가 된 그를 나는 인간적으로 듣는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소음 속에서 침묵을 추구한다
한없이 떠들어야지만 더욱더 견고한 고독이 완성되므로 여전히 사랑에 빠져 노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다
왜 그가 타락 천사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해준다
사실 말은 필요 없는 것이다
세계가 우리의 비극을 감싸 안으므로 우리는 장엄하게 아름다운 비극이다
여기까지다, 시인이 할 일은 세상 모든 원소들을 백색소음에 데려다 주는 일
그 다음은 이 세계의 일, 모든 소리의 가청 주파수대를 의미하는 백색소음 속에서 시인은 침묵과 고독이라는 물질로 새로운 시의 원소를 만드는 연금술사
여기까지다, 여기까지가 침묵의 음악이고 그 이후는 침묵을 또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순간 누군가 안쓰럽게
이 시를 읽고 읽을 것이다
타락 천사이었거나
전직 천사였거나
아마도
당신이 음악이었거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그러나 더 많은 휴식과 사랑을!
더 많은 몽상을!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 라이터 관리술」 전문
■ 시집 소개 글
세계의 흐름과는 또 다른 시간 패턴 위에서 박정대는 세계의 통상적 명명법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다른 이름’들을 적시한다.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을 때, 그것은 때로 음악이 되기도 하고, 빳빳하게 격절돼 있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틈을 벌려 누군가의 삶과 죽음과 사랑을 상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시 뽀얀 먼지들이 접착력 강한 문자로 몸에 각인된다. 전 세계가 고독의 무늬로 휘황찬란하게 떠오르다가 사멸한다. 이것은 시의 독성(毒性)이기도, 존재의 오연한 독성(獨醒)이기도 하다.
■ 뒤표지 글
삶이라는 직업은 센티멘털하다
나는 애정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방에 편재한 사랑을 볼 때마다 갸륵한 인류애에 사로잡힌다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는 함께 잠들 수는 있지만 아침이면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로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깨어나야 한다’는 애정 공산주의의 수칙에 공감하면서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콜로이드 소노르(Colloides sonores), 즉 교착적 음향의 사랑을 꿈꾸는 나는 어쩌면 애정 라이프니츠주의자에 가깝다
他者에 대한 영원한 동경 때문에 나는 삶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고독과 분별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오지의 행성에서 오지 않는 신비를 기다리는 늑대사냥꾼처럼 나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한 마리 시를 기다리며 밤과 새벽의 영토를 기꺼이 고독과 침묵에게 내어줄 것이다
밤새 함박눈이 쏟아지려나보다
영혼의 동지들이여 단결하자(어떻게? 아무튼!)
창가에 올려놓은 맨발의 반가사유상, 체 게바라 라이터, 담배 한 대, 고독은 실제적인 것이다
최근 두 신작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 <삶이라는 직업>을 냈다는 시인의 뉴스를 접하며. 20110609<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