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경미,「오늘의 결심」

미송 2015. 3. 19. 08:03

 

오늘의 결심 / 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들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 김경미 - 1959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쉿, 나의 세컨드』『고통을 달래는 순서』 등이 있음. 노작문학상을 수상함.
◆ 출전_ 『현대시』2010년 7월호(한국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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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은 모두를 지치게 합니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넓게, 더 화려하게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 보면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서 뭐하나 싶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모두가 욕망을 따라가는 세상에서는 누구도 완벽한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려다 도리어 누군가에게 밟힌 이들로 가득한 세상, 모두가 화가 난 시대에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쟁취하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듯, 욕망의 크기를 키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고 외치는 시 속 화자에게서 세상에 대한 상처가 읽힙니다.  <시인 최형심>

한때 시인의 욕망은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을 향하고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켰겠지요. 그러나 삶은 그 욕망을 끊임없이 좌절시켜서 진실하게 열심히 살수록 상처받고 손해 본다는 걸 인정하게 했겠지요. 이 시를 쓰게 한 힘은 바로 이러한 상처에 대한 분노와 오기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의 결심’은 삶을 붙들고 아등바등 사느라 헛된 힘을 쓰지 않겠다는 것. 계산적으로 눈치 보면서 처세하여 삶이 주는 상처를 영리하게 피하겠다는 것. 이를테면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는 것.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쓸데없이 마음만 아프게 하는 순진한 태도이므로.

*주의- 이 시를 읽을 땐 반어에 유의할 것. 이 시의 반성문 말투는 진실을 억압하고 얄팍한 계산을 부추기는 삶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조롱이므로. 나약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심술궂고 힘센 삶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한바탕 놀겠다는 심보이므로. <20110224오>

그 사람 성격이나 컨디션을 어투에서 눈치 챌 경우가 많다. 오늘의 결심을 쓴 K 참 쌈박하고 야물딱지다 싶은 분이다. 저렇게라도 말해 속이 편해졌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사람은 어찌해서라도 속엣 것을 뱉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우리 역시 시인의 개인사정을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 로 나눌 수 없는 동류족일 것이다. 아무튼 엊그제 우연히 창문 너머로 보이던 가로등 불빛은 너무나 아름다워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시방 보름달이 뜬겨 하며 감탄을 하며 보니 가로등 불빛이었다. 가짜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났다. 아슴푸레 안개에 가린 가로등 불빛. 속았지만 억울하지도 않았다꿩대신 닭이려니 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