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경미, <야채사(野菜史)>

미송 2015. 5. 18. 09:44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깔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인간은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배고팠을 때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는 음식'이란 식단 신조를 갖고 살지만, 끼니마다 뭘 먹지 하는 질문은 끊이지가 않는다. 오늘 모신 두 분도 여성적 소재 아니 인간적 소재를 펼쳐놓으셨다. 가슴 따뜻한 얘기와 가슴 아픈 얘기를 위하여 진설된, 저 객관적 상관물들. 식물성이라 친근하다. 어쨌든, 애초에 나도 내가 아니었다 란 명제로 시작되는 문장은 또 얼마나 넓은 상상력의 공터를 허용하는지. 그래서, 시라는 건 말야 하면서, 두 분의 소통에 끼워 넣고 싶은 나의 말; 속닥속닥 이브자리 송사처럼 하는 거, 친구에게처럼 연인에게처럼 하듯 해, 무슨 말을 지껄여도 맞다 맞다  맞장구치고 싶게 만드는 거가 시란 말이지 하고, 말 하고 싶단 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