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노독>
노독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이문재는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등이 있다.
오래 전 읽은 시인데,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여수(旅愁)의 멜랑콜리가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 때문이겠죠. 길 위에 있는 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제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요. 더러는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더 올리기도 하겠죠. 하지만 “함부로 길을 나서/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에는 감형(減刑)이 없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여독(旅毒) 품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니까요!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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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쉬를 떠올리게 되는 시편입니다. 절친인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 나서 길가메쉬는 먼 길에 오르죠,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이기는 영생을 얻을까 하는 물음을 갖고 말입니다. 그 여정 속 이야기는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마지막 그의 삶 역시 허무하게 종료되는 장면만은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손 안에 든 영생의 약을, 잠 든 사이 뱀이 홀딱 먹어버리고 말았으므로, 원점에 서게 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고 류시화 시인도 노래했나요. 길이자 곧 나그네인 인생 자체를 기꺼이 그리고 슬프게 노래했나요. 많은 사람들이 걸으면 길이 된다 고 또 중국의 루쉰도 명언을 남겼던가요. 아무튼 하루하루가 낯선 여행이라 생각하며 시작을 하지만, 그 평온한 출발점에도 독이 서리는 군요. 나도 몰래 누적된 독기를 빼기 위해 이제 잠을 청해야 겠습니다. 잠속에서든 꿈속에서든 또 하나의 생명은 내 품에 든 영생의 약에 탐을 내겠지만, 그것은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하는 그의 業으로 남겨 두렵니다. 그것이 누구의 죄몫인 줄 모르겠기에 말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