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혜 , 『하얀 새』
우리 역사에서 매우 통렬한 고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병자호란, 이제 여인들은 스스로 위선적 구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남성 중심, 기득권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알량한 잣대를 온전한 눈부심으로 무화(無化)시켜야 한다. 전시에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적진으로 끌려가서 수모를 당한 우리의 여인들. 그녀들은 살아서 돌아왔으나 경멸의 눈초리 속에서 또다시 모진 세월을 견뎌야 한다. 남편, 친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한 그녀들은 절해의 고립 속에서 신음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신음은 ‘더럽혀졌다’는 뻔뻔스러운 손가락질보다 더 참된 울음이다. 아무것도 기댈 것 없어진 그 연약한 자리에서 눈물로 대면한 신의 은혜로움으로, 더럽혀짐은 더 이상 상처나 두려움이 아닌, 짓밟혀질수록 온전해지는 역설의 신비를 이루어낸다.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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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윤리(狀況倫理 situation ethics). 사전을 들춰봐도 그 개념을 다 이해하기엔 설명이 너무 어렵다. 그래도 20대 시절 고민했던 상황윤리를 다시 떠올려 본다. 그때 나는 전쟁 중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윤리에 대해 생각을 했고, 그 예로 아버지의 전쟁 상황을 상상했었다. 무기가 필요치 않은 전투 상황 그러니까 그걸 아버지는 육박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상황 속에선 적을 죽이지 않으면 곧 내가 죽어야 하는 필연적 운명에 놓였으므로 필시 살인을 자행해야만 했다는 것, 그 이 후 악몽과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어머니는 신앙의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지만, 그러나 난, 꾸준히 아버지의 편을 들어 그 살인을 변호해 왔던 기억이다.
물론 자유를 빙자한 방종이나 방만한 삶의 행태는 배격해야할 것이지만, 전시에 벌어졌던 윤리의 문제를 그리 쉽게 단정지어선 안 될 것이라는 게,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야말로 '신적인 사랑이다' 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랑의 실천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3층 건물은 예전에 법률사무소가 있던 자리다. 법원이 무실동으로 옮겨가면서 판사가 소유주인 우리 건물은 지역적 공동화 현상 속에서 덩그러니 남겨진 건물이 되었다. 다행히 소유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마인드에 의해 틔움길이자 희망공간이 되길 바라는 이들의 새 공간이 되었으나, 그때부터 3년 동안 끊이지 않은 문제 하나가 있었다. 주차장의 환경 문제가 그것이다.
우리 건물 바로 옆에는 달방 사람들이 살고 있고, 원주역 앞에는 봄이면 벤치에 누워 아침에서야 잠이 드는 노숙자들의 모습이 널려 있다. 그 중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주차장에 들어와 대변을 보고 가는 사람들이다. 주민센터 민원과 경찰서 신고까지 거론되기도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우리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수 밖에 없단 결론이 내려지면서, 여러차례의 토론은 무산되었다. 주차장에 매일 주차를 해야 하는 3층의 젊은이 하나가 맨붕을 호소하기까지 했고, 급기야 '내가 똥을 치울께! 쌀 때마다 치울께!' 하는 행동선언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 똥을 치웠다. 깨끗하게 싹 쓸어버렸다. 순간 '우웩'이 나오기도 했다. 구데기가 버글거렸으니깐.
나는 그 자리에 똥을 싸는 사람들에 대해 이 순간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왜 어두운 시간 꼭 그 자리에 와서 똥을 쌀까? 최근엔, 자신의 똥을 빈대떡처럼 동그랗게 펴놓기까지 한 그가 과연 정상적인 사람일까? 범인은 달방 사람일까? 노숙자일까? 누구 말마따나 이 건물과 무슨 원한이 잡힌 사람일까? 법률사무소와 악연이 있는 사람의 소행일까? 등등. 그러나 그런 의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을 한다. 결론은, 그 사람은 얼마나 안 된 사람인가? 불쌍한 사람인가? 이것으로써 우리의 소동도 끝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똥이란 내 몸 속에도 당신의 몸 속에도 늘 공존하는 찌꺼기, 그것이 안에 있을 땐 깨끗한 것이고 밖에 나왔을 땐 더러운 것이 되는가? 인간이 그리 쉽게 분화될 수 있는 청정하기만한 존재인가? 등등.
나름 해답을 내려 보건데, 그것은 그 사람만의 더러운 소행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의 문제란 것. 왜 그 익명의 이웃에 대해 우리는 한 뼘도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그것을 개인의 질환으로만 단정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의 이질화와 소외화를 반성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왜 당신은 그런 행동을 해야만 합니까? 3년 동안 검증해온 결과 당신은 비정상적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라고 지적하기에 앞서, 범인이 누구든지간에 우리의 소외된 이웃이 어떤 얼굴인지조차 알 수없는 격리된 이 상황을 비탄하는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 똥은 내가 치우겠다 고 했고, 토론이나 민원이나 소란은 더 이상 없을 듯 하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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