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천양희 <미소를 600개나>

미송 2015. 10. 25. 21:42

 

미소를 600개나 / 천양희

 

제자가 스승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자네와 결혼할 여성은 어떤 사람인가?’ ‘ 미소를 한 600개나 가진 여성입니다.’ 스승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주례를 승낙했다. 미소를 100개도 제대로 못 가진 나는, 그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미소를 600개나 가진 여성, 어떤 미인이라도 미소를 600개나 가진 여성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이 아플 때나 괴로울 때, 화가 몹시 날 때 한 번도 웃지 않고 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에게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게 된다.

 

웃으면서 아프고 웃으면서 괴로워하고 웃으면서 화를 내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생각하면서도,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하나만은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는 입으로는 화를 내고 눈으로는 웃으라고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방법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살짝 빌려온다. ‘그동안 우리 집 주차장을 쓰레기장으로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쓰레기장 개방을 중단하오니 이 점 널리 양해 바랍니다.’  미소를 600개나 가진 여성과 결혼하는 그 남자가,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터득한 움베르토 에코가, 부러운 것은 세상의 바보로 살더라도 웃음보를 터뜨리고 웃음꽃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천양희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다. 제4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90623-20151025

 

 

애수와 해학이 동시에 깃들어 있는 그의 글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글로 빚어진 그의 삶은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글 속에서 만났던 그를 글 밖에서 만났을 때, 나는 '여태외로운 여자로 살아왔어요' 라고 말했고그는 '외로웠지만 외로움이 뭔지 잊고 살아왔어' 라고 말했다. 외로움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걱정해 주며, 이젠 외롭지 않다 고백하며 만남을 시작하였다. 

                                                                                                                                                                                - 즉흥을 위한 모노로그

 

유심 9월호에서, 방민호 시인이 시평한 백무산 시인의 '지옥은 없다'를 읽다가, 예전엔 또 그의 어떤 시를 읽었었지 뒤적여 보았다. '그 모든 가장자리'와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시' 두 편을 읽은 흔적이 있었다. 시를 눈으로 마음으로 읽는다는 건, 마치 시의 질감을 주물러보는 일과 같아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때론, 만지다 황급히 물러나게도 된다. 물러난다 고 해서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니겠으나, 뭐랄까, 시의 질감이 너무 적확했을 때 그런 제스처가 나온다 할까.

 

반사적 시읽기 인지 모르겠으나, 물러나 잠시 '미소 이야기'를 읽는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 란 요즘 아이들 말도 있지만, '화내면 지는 거'란 내 오래전 교육법도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인생 제반사 폭력이 아닌 말로 풀어가는 것이라 고, 무턱대고 화부터 내거나 주먹부터 나가면 지는 것이라 고, 작은 아들을 앉혀놓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타일렀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 인생 제반사가 말로 풀 수 없어 너무나 지루하게 가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웃어야 한다. 화내는 방법, 웃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예쁘게 화낼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 미래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질감이 적확하여 심장을 찌르고 울리는 시도 좋았지만, 오늘은 예쁘고 포근한 글에 긴 꼬리를 단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