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황금 장수말벌>

미송 2016. 4. 13. 23:26

 

금 장수말벌

도마뱀 저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다만 크기가 다를 뿐.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이런 날이다.

오늘 아침 내 사랑하는 여자가 악령들을 쫓아버렸다.
마치 남쪽 어딘가에 있는 어두운 헛간의 문을 우리가 열었을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퀴벌레들이 구석으로 돌진하고 벽 위로 올라가고
그리고 사라지듯이, 이 때 우리는 바퀴벌레들을 보았고 또한 보지 않았는데,
그렇게 내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마귀들을 달아나게 했다.

마귀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리라.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신경(神經)의 구식 전화교환국 속에 있는 전화선들을 넘어서.

7월 5일이다. 루핀들이 바다가 보고 싶은 듯 위로 뻗고 있다.
우리는 아무 문자도 따르지 않는 침묵 지키기의 교회, 경건의 교회 속에 있다.
마치 고위 성직자들의 저 용서없는 얼굴들과
돌에 잘못 새겨진 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돈을 비축해놓은, 축자적(逐字的)으로 문자에 충실한 TV 설교가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힘이 없었고 경호원의 부축이 필요했다.
경호원은 재갈처럼 딱딱한 미소를 짓는 잘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비명을 질식시키는 미소.
부모가 떠날 때 병상에 홀로 남은 아이의 비명.

신성(神性)이 인간을 스쳐가며 불꽃을 밝혀놓고,
그러고서는 물러난다.
왜?
불꽃이 그림자를 끌어당기고, 그림자들이 바스락거리며 날아들어 불꽃에 합류하고,
불꽃이 치솟으며 검어지고, 검은 질식의 연기가 뻗어나간다.
마침내 검은 연기뿐, 마침내 경건한 사형집행관뿐.
경건한 사형집행관이 장터와 군중들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장터와 군중들은 사형집행관이 자신을 볼 수 있는
흐린 거울이 된다.

최대의 광신자는 최대의 불신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광신자는, 하나는 백 퍼센트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둘 간의 계약이다.
'백 퍼센트'라는 표현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정면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자들
멍한 마음이 결코 될 수 없는 자들
문을 잘못 열어 '정체 불명자'를 얼핏 보게 되는 일이 결코 없는 자들,
이들을 지나가라!

7월 5일이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발 없는 도마뱀은 관료주의가 없는 듯하다.
황금 장수말벌은 우상숭배가 없는 듯하다.
루핀들은 '백 퍼센트'가 없는 듯하다.

페르세포네처럼 우리의 포로인 동시에 통치자인 그런 심연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자주 그곳 뻣뻣한 풀 속에 누워
땅이 내 위에 아치를,
둥근 천장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것이 내 삶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응시가 나를 떠났다.
나의 눈멂이 사라졌다.
검은 박쥐가 내 얼굴을 떠나 여름의 밝은 공간을 가위질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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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출생 1931년 4월 15일 출생지 스웨덴 데뷔 1954년 시집 'Seventeen Poems'
학력 스톡홀름 대학교 수상 2011 노벨 문학상

 

 

 

시인의 중기 작품의 특징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시란 점이다. 기독교 신비주의 차원과도 긴밀히 연관되었다는 점 때문에 한때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적 경사가 심해 반대로 정치사회적 맥락이 거세되었다는 그러한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시인은 ‘침묵과 심연의 시’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급진도 반동도 아닌 제3의 길을 요구하였다.

 

이는 그의 전반적인 중용의 인생관, 혹은 침묵과 깊이의 인생관에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00%’라는 표현을 혐오한다. 진실은 100%와 0% 사이의 어느 지점에 신비롭게 숨어 있으며, 그 신비스런 진리의 길을 올곧게 따라가는 것이 똑바로 선 인생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세상의 신비의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한 목표지점에 도달한 순간 또 다른 길이 힘들게 열린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의 특성 때문에 스웨덴에서 그는 ‘말똥가리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세상을 높은 지점에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 자연세계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서구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열어젖힌 시인. 또,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보는 이 세상은 ‘미완의 천국’이다. 낙원을 만드는 것은 결국 시인과 독자들, 자연과 문명, 그리고 모든 이분법적 대립구조 사이의 화해와 조화일 것이라고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여자가 악령들을 쫓아내는 장면이 역시 코믹하다. 상황을 충분히 공감한다. 헛간 문을 여는 동시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퀴벌레들은 몸을 숨기려고 갈팡질팡한다. 그때 내 사랑하는 여자는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눈으로 소리를 지른다. 꺅. 악령을 쫓아낸 그녀의 全 수단은 비명이다.

 

하늘엔 구름이 덮여 있지만 해가 잠시 나온 날, 7월 5일은 평범한 날. 루핀은 바다가 보고 싶었는지 위로 뻗고 있다. 까무러칠 뻔 하면서도 내 사랑하는 여자는 악령을 쫓아냈다. 신경(神經)의 구식 전화교환국 속에 있는 전화선들을 넘어 천개의 손을 가지고 저들이(악령들) 다시 올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비웃음이다.


고위 성직자들의 용서 없는 얼굴을 보면 돌에 잘못 새겨진 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악령들도 애당초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화자는 농담을 던지고. 그런 의미에서 또 나는 비명을 질식시키는 미소와 허상에 질린 솔직한 얼굴을 대비시켜 본다. 종교계(문학계에서도 비슷한)에서 나는 종종 백프로의 순교를 요구하는 광신자들을 만나곤 하였는데, 그들이 추구하는 완벽이란 오류만 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작 빛 한줌 내비칠만한 능력도 없는 자들이 검은 연기뿐인 그 속에서 경건한 사형집행관이 되어 설치는 꼴이라니. 페르세포네 신화에서도 말하지만 통치자이자 곧 포로가 되는 심연은 나와 네 속에도 있다. 고로 장터와 군중들이 곧 사형집행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도마뱀과 아나콘다는 크기만 다를 뿐 혐오할 짐승은 아니다. 관료주의도 우상숭배도 교리주의도, 정체 불명의 것들도 직시해야만 한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인생 절반을 뻣뻣한 풀밭에 누워서 지낸 시인이 연구한 것은 땅으로 그리는 하늘, 아치모양의 둥근 천장이었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지하와 지상의 반쪽 삶.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을 이분법적 대립구조로 사고하지 않는 시인의 정신세계에 공감이 간다. 역설하건데, 밖으로의 모든 응시를 내 안으로 거두어들이지 않는 한  눈멂 속에서의 우리는 검은 박쥐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땅위에서의 조화와 화해를 연습하지 않는 자 죽음 이후의 천국도 만나지 못할 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