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기택<통화>

미송 2016. 8. 17. 09:54

통화2 / 김기택

 

 

예약을 원하시면 1번, 안내를 원하시면 2번, 상담을 원하시면 3번을 눌러주십시오.
원하시는 상담원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사무적인 말투는 1번, 백화점 직원 말투는 2번, 교사 말투는 3번, 술자리 말투는 4번, 정치인 말투는 5번, 아줌마 말투는 6번을 눌러주십시오.
원하시는 상담 내용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열변 토하기는 1번, 횡설수설하기는 2번, 비명 지르기는 3번, 하품하기는 4번, 한숨 쉬기는 5번, 침묵은 0번을 눌러주십시오.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통화중입니다. 예상대기시간은 4분 29초입니다. 계속 통화하기는 1번, 끊고 다시 하기는 2번, 끊고 안 하기는 3번을 눌러주십시오.
잘못 누르셨습니다. 통화 1번, 끊기 2번, 다시 하기 3번을 눌러! ……주십시오.
하염없이 기다리시면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료입니다. 여러분의 인내심을 먹고 저희 업체는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습니다.
대기자가 많아 통화대기시간이 2분 30초 연장되었습니다. 계속 기다리시겠습니까? 기다리기가 심심하면 1번, 담담하면 2번, 짜증나면 3번, 울화가 치미면 4번, 아무래도 좋으면 5번을 눌러주십시오.
아직 누르지 않으셨습니다. 심심 1번, 담담 2번, 짜증 3번, 울화 4번, 그저 그러면 5번을 눌러버려! ……주십시오.
즐거운 통화 시간이 끝났습니다. 사은의 뜻으로 통화대기 3분 쿠폰이 발급되었습니다. 쿠폰 받기를 원하시면 1번, 안 받으시려면 2번, 다시는 전화 안 하기는 3번, 욕지거리 내뱉기는 4번, 전화통 부수기는 5번, 인내심을 시험하시려면 6번을 눌러주십시오.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연결해 드리……, 려고 하는데 3분 쿠폰이 막 소진되었습니다. 특별사은행사 기간이어서 처음부터 다시 하기 쿠폰이 자동 발급됩니다.
예약을 원하시면 1번, 안내를 원하시면 2번, 상담을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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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점점 기계인간이 되어간다. 어색한 미소를 보이는 젊은이, 갓난아기처럼 울어재끼는 취학 아동자기주장으로만 무장된 오십 대 여자, 콘크리트처럼 끄떡없는 노년들의 대통령 지지도.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마냥 가고 있는 행인들, 마지막 양심과 도덕을 지키려는 의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불허의 미래를 살고 있다. 동일한 자리를 맴돌고 동일한 노래를 부르고 동일한 함성을 외치는 롤러코스터들. 혼자임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하는 숨겨진 독거인들. 걷잡을 수 없는 오염에 이미 오염이 되버린 현실은, 전부는, 아프다 말도 못한 채 흘러가고 있는 중....

 

내 년 여름엔 에어컨을 꼭 사리라. 버티는데 까지 버텨 보리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견뎌 보리라, 오대양의 물고기들은 플라스틱을 먹고, 그들이 삼킨 플라스틱은 인간이 삼키고, 그러고도 죽지 않는 시간들은 멸망의 순간까지 고귀한 제 존재의 고독을 보존할지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이상한 일들을 멈추게 할 종료버튼은 이미 불량이었으니...., 이게 다 그 중금속 때문이겠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