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소년에게
화성 소년에게
안녕, 나야 !
화성과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여자. 다소 까칠해서 악수를 청하는 사람을 툭 치고 지나치기 일쑤인 여자.
오늘 아침이 왜 이렇게 한가했나 생각해보니 근로자의 날이라서 그래. 근로자의 날이라 해도 자택근무할 일거리는 있어서 오전내내 한 가정의 사례일지를 세 시간이 넘도록 작성했지만. 그래도 내가 쓴 일지를 통해 한 가정의 인생사가 전환점을 얻는다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
간간히 늦잠이나 낮잠으로 누적된 피곤을 몰아내며 일하고 있어. 눈을 감으면 오 분 안에 잠드는 버릇은 신의 축복인가 싶다.
오늘 아침엔 오랜만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지. 단골 커피 빈에서 사온 알갱이 커피는 어떤 날은 달고 어떤 날에는 씁쓸해. 오늘은 쌍화탕 맛 같네. 커피와 함께 시작하던 일상을 언제부터 잊었을까, 하여튼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야.
어젯밤엔 모처럼 라라랜드란 제목의 영화를 자정이 가깝도록 보았어. 가난한 연인들 이야기였는데, 둘이서 운동화를 신고 빙글빙글 춤을 추거나 눈빛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멋졌지. 피아노 치는 남자와 배우를 꿈꾸는 여자의 가난한 만남은,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오년 후 결국 갈라서게 되지만, 그들이 꿈꾸던 것은 이루어져 있었어. 꿈은 함께 꾸었는데 꿈이 이루어진 장소엔 함께가 안 보여서 안타까웠지.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면서 한숨이 나왔어. 인력으로 내가 다시 붙여줄 수도 없으니 꿈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닐까?
요즘은 늦잠이나 낮잠을 잘 수 있는게 제일 행복해. 배고프면 시골찐빵을 쪄 먹기도 하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다가 반쪽이던 얼굴이 부풀어 있어서 깜짝 놀랐네. 사람 변하는 건 순식간이란 생각이 들었어.
어렵사리 편지를 쓰면서 먹는 얘기 잠자는 얘기만 할 건 또 뭐람. 하긴 우리 사무실에 스물여섯 살 여자는 잘 먹고 잘 싸는 게 최고여 하며 늙은 여자의 귀를 놀라게 했지만, 해도해도 이 지구란 곳은 점점 원색적인 것들로만 가득해져 가는 느낌이야. 너 살고 있는 화성은 어때?
우리 집 화단에 민들레는 키가 쑥쑥 자라더니 하얀 홀씨를 날리고 있다. 화성에도 그런 거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새 파꽃이 올라와 엄마가 일러준 대로 씨를 술술 뿌릴 때도 되었는데 화성에도 파 닮은 초록들이 있니? 물방울들 날아다니니? 너의 주변이 궁금하구나.
언젠가 가슴에 꼭 안고 있던 너의 장미도 이젠 많이 변했겠지? 아니라고? 그래 그 곳은 지구와 다르다니 아마 영원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너의 장미는 너의 것이니까 잘 간수하고, 장미가 마실 물을 길러오다 미끄러지지 말고, 장미를 슬프게 하지 말고.
이제 머리를 감고 쇼핑을 나가야 겠다. 쇼핑을 할 때쯤 되면 이상하게도 이것저것 한꺼번에 떨어져서 품목을 적어야해. 오늘은 쌀, 김, 계란, 무파마라면, 커피, 설탕, 화장품(에어쿠션과 폼크랜징), 주방세제를 꼭 사올 예정이야. 그 외에는 현장에서 결정할 것들. 어쩌면 닭도 한 마리 사올 거야, 닭백숙은 혼자만 먹는 거지만 그래도 가끔 혼자서라도 꼭 먹어야지 할 때가 있거든.
참, 화성에서 너는 요즘 뭘 먹고 사니?
설마 아직도 라면만 먹고 사는 건 아니겠지, 어휴 지겨워.
저녁쯤에는 다시 또 한 가정의 사례일지를 써야해. 도대체 난 지금 몇 가지 일을 하고 있나 화장실에 앉아 헤아려 볼 때도 있는데,
상담자, 기록자, 발표자, 방문자, 멘토, 그러고도 지적질을 받아야 하는 상처입는 자 등등. 무슨 이런 복이 다 터졌나 싶다.
악을 써서라도 12월까지는 소임을 다하리라 맹세하기도....
이 편지를 병에 넣어 강물에 띄우지는 않을게.
지금 지구의 계절은 민들레가 홀씨를 날리고 있으니 바람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으니 나도 따라
이 편지를 씨방에 넣어 보낼게.
지구 보다 더 메마른 그 곳에 어느 날 민들레 닮은 노란빛이 보이면 지금 이 편지가 도착하는 중이라고 생각할게. 라마스떼-
지구의....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