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장정일 <거미>외 1편

미송 2022. 12. 12. 23:20


거미

거미줄 위에서
해치울 상대가 있을 때
거미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보라, 연애와 학습을 잊고
인간의 학교에는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는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가 어둠 속에서
생각의 모두를 여덟 개 다리 끝에
집중시키는지를

그렇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의 함정을 재빨리 피해
달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지력을 여덟 개 다리 끝에
균등히 나눌 줄 안다는 것
그리고 단지 하나의 판단 속에
자신이 뛰쳐 나가야 할 순간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애인, 데카르트

그이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집어쳐요, 그딴 말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는 심각해졌다
방금 그 말, 생각해 볼 문제야!


 

패러디 시를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시인. 백과사전에 보니 한국문단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라고 적혀있다. 누가 그렇게 적었을까.
거미는 베짱이나 달팽이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왔는데, 오늘은 다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걷어내거나 쓸어버릴 때와는 다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내 애인 데카르트가 말했다. 그러나 시인은, 거미를 관찰할 때나 애인을 관찰할 때 존재 그 자체의 야성에 방점을 찍은 듯 하다. <오>

 


20171214-202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