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정말 굉장한 하루였어. 아침부터 악의에 찬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온몸에 기운이 빠져서는, 마치 집에 영혼을 두고 온 사람처럼 굴고 있었어.
당연히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지. 나는 근처 커피숍으로 가서 카푸치노를 주문해놓고, 가져간 루소의 화집을 펼쳐 들었어. 평소의 나로서는 그다기 공감하지 못하던 화가였는데, 그날은 책을 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잠자는 집시>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어. 이 지구 어디에 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 이상한 공간에서, 이상한 사자가 이상한 집시 여인의 잠든 머리 위를, 킁킁대며 탐색하는 이상한 그림, 상식에도 보편적인 정서에도 닿지 않는, 어찌보면 어처구니없는 이 그림이 묘하게 위로가 되는 거야.
'왜일까?'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보았어
그러다 문득 그날 마무리하지 못하던 일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나는 어느새 하루 시작의 악몽을 새까맣게 잊은 채 일에 몰두해 있었지.
그날 나는 왜 이 그림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이 그림은 한마디로 ‘이상한 그림’이야. 분명 사막 같은데 호수와 잇닿은 물가, 멀찍이 호수 너머로 만년설인지 빙하인지 모를 흰빛을 뒤입어 쓴 산들, 사막에선 살지않는 사자의 어이없는 출몰, 달이 높이 뜬 한밤중인데도 어둡지 않고 푸르기만 한 하늘, 그리고 가혹한 사막의 밤에 만돌린 하나 달랑 들고 태평하게 누워있는 여자.
앙리 루소, '잠든 집시여인', 1897년, 캔버스에 유채, 129.5×200.7㎝, 뉴욕 현대미술관
어쩌면 그 ‘이상함’이 나를, 내가 사는 다른 면모로 이상한 현실에서 잠시 떠나게 해준 것일지도 모르겠어.
이 이상하고도 이상한 그림 속 나라에서 집시 여인과 사자는 아무리 봐도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로는 보이지 않아. 사자와 여자는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교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걸. 아마도 맹수마저 교감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마법과 같은 달빛이 현실의 고통 따위는 잊어버리게 하는 것 같아.
우리는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최소한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벽을 느끼고 상처를 받아. 반대로 가장 이질적인 존재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게 되지. 도무지 다가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존재와 실낱만큼이나마 교감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커다란 의미가 될 수도 있어. 난 이 그림이 사람들이 지닌 그런 욕구를 담은 것만 같아.
세관에 다니던 순진한 공무원으로 아무런 훈련도 지식도 없이 그림을 그리게 된 루소.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훌륭한 기법들을 쓸 줄 몰랐지만(쓰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어), 직관적으로 그런 기분들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