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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

미송 2022. 5. 8. 13:03

이상한 나라로의 휴가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그날은 정말 굉장한 하루였어. 아침부터 악의에 찬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온몸에 기운이 빠져서는, 마치 집에 영혼을 두고 온 사람처럼 굴고 있었어.   

 

당연히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지. 나는 근처 커피숍으로 가서 카푸치노를 주문해놓고, 가져간 루소의 화집을 펼쳐 들었어. 평소의 나로서는 그다기 공감하지 못하던 화가였는데, 그날은 책을 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잠자는 집시>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어. 이 지구 어디에 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 이상한 공간에서, 이상한 사자가 이상한 집시 여인의 잠든 머리 위를, 킁킁대며 탐색하는 이상한 그림, 상식에도 보편적인 정서에도 닿지 않는, 어찌보면 어처구니없는 이 그림이 묘하게 위로가 되는 거야.

'왜일까?'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보았어

 

그러다 문득 그날 마무리하지 못하던 일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나는 어느새 하루 시작의 악몽을 새까맣게 잊은 채 일에 몰두해 있었지.

 

그날 나는 왜 이 그림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이 그림은 한마디로 ‘이상한 그림’이야. 분명 사막 같은데 호수와 잇닿은 물가, 멀찍이 호수 너머로 만년설인지 빙하인지 모를 흰빛을 뒤입어 쓴 산들, 사막에선 살지않는 사자의 어이없는 출몰, 달이 높이 뜬 한밤중인데도 어둡지 않고 푸르기만 한 하늘, 그리고 가혹한 사막의 밤에 만돌린 하나 달랑 들고 태평하게 누워있는 여자.

 

앙리 루소, '잠든 집시여인', 1897년, 캔버스에 유채, 129.5×200.7㎝, 뉴욕 현대미술관

 

 

어쩌면 그 ‘이상함’이 나를, 내가 사는 다른 면모로 이상한 현실에서 잠시 떠나게 해준 것일지도 모르겠어.

이 이상하고도 이상한 그림 속 나라에서 집시 여인과 사자는 아무리 봐도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로는 보이지 않아. 사자와 여자는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교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걸. 아마도 맹수마저 교감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마법과 같은 달빛이 현실의 고통 따위는 잊어버리게 하는 것 같아.

 

우리는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최소한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벽을 느끼고 상처를 받아. 반대로 가장 이질적인 존재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게 되지. 도무지 다가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존재와 실낱만큼이나마 교감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커다란 의미가 될 수도 있어. 난 이 그림이 사람들이 지닌 그런 욕구를 담은 것만 같아.

 

세관에 다니던 순진한 공무원으로 아무런 훈련도 지식도 없이 그림을 그리게 된 루소.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훌륭한 기법들을 쓸 줄 몰랐지만(쓰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어), 직관적으로 그런 기분들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겠지.

그런 그에게, 난 어느 하루의 기분을 빚졌다.

 

 

남인숙<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 71-75P >  타이핑 채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앙리 루소 ‘잠든 집시여인’

달빛 한 줌, 지팡이 하나

 

천국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보다 지옥에서 홀로 살기를 선택하겠다고 고백한 이는 소로였습니다. 소로는 월든 숲속에다 오두막 한 채를 짓고 스스로 밭을 일궈 먹으며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 폐렴에 걸려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어도 나는 그가 불쌍하거나 안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고독이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은, 아니 고독이 '나'의 집인 현자였을 테니까요. 저 그림 앙리루소의 '잠든 집시여인'을 보는데 왜 단순하고 담백하게 살다간 소로가 생각이 나는 걸까요?

아마 보이는 것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일 것입니다. 한 벌의 옷, 지팡이 하나, 만돌린 하나, 물병 하나! 신발도 없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소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 그림은, 살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달빛 한줌, 이슬을 모으는 물병, 만돌린 소리와 내 속의 사자, 그녀의 삶의 동반자들입니다. 그것들을 보면 그녀의 단순한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삶이라 고백하게 됩니다.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삶이 왜 숨 막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사는 데 강남의 집이 필요하고, 비싼 차가 필요하고, 인맥이 필요하고, 명품으로 도배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기름 낀 그 삶의 비만으로 인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너무 바빠서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고, 달빛을 느끼지 못하고, 나를 찾아 걸어 들어오는 야수를 지나칠지 모릅니다. 안락한 삶에 길들여진 우리는 불필요한 많은 것들에 의존해 살이 쪄 갇혀 있고, 길들여지지 않은 그녀는 아무것도 없지만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가난과 방랑의 흔적을 거둬내면 여인과 사자가 다시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하늘을 지붕 삼아 달빛 아래 잠들어 있는 여인의 표정을. 그녀의 머릿결과 옷의 무늬까지 한 방향으로 잘 정돈되어 있지요? 그녀의 잠이 편안한 단잠임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끗한 방, 깨끗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왜 그렇게 불면증에 익숙할까요? 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는 저 여인은 저렇게 잘도 자는데.

그녀는 어디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방랑자지만 고독한 방랑이 자연스러운 인간 중의 인간입니다. 더구나 여인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사자의 행태를 보십시오. 저 사자는 위험한 사자가 아니라 지켜주는 사자입니다. 여인의 수호신 같습니다. 사자는 홀로 사는 일을 사랑하는 동물이지요? 혼자여도 우울하지 않고 바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재미있는 일이 없어도 심심하지 않을 수 있어야 사자가 지켜주는 인간이고, 사자 같은 인간이며, 고독을 사랑하는 인간입니다.

루소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꿈결을 그려놓은 것 같습니다. 그의 꿈같은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환상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길지도 않은 그의 인생에서 5명의 아이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고,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다시 얻은 아내도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악어들이 입을 벌리고 쫓아오는 것 같은 삶의 강을 건너면서 그가 믿게 된 것은 생은 꿈이고, 꿈임을 감추기 위해 고통이 찾아드는 거라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편에선 그림으로 고통을 견뎠고 다른 한편 고통 속에서 그림을 완성하는 행복을 느끼며 생이 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살아보면 산 게 없는 꿈같은 인생,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그 인생을 한명회 같은 지향성으로 살까요, 김삿갓 같은 지향성으로 살까요? 사실 저 그림에서 가장 눈이 갔던 것은 여인의 지팡이였습니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잠든 와중에도 놓지 못하고 있을까요? 자면서도 놓지 못하는 소중한 것이 지팡이인 것으로 봐서 내일도 그녀의 삶은 지팡이가 필요한 고단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은 스트레스가 되어 그녀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적이 아니라 만돌린을 연주하게 만드는 에너지일 것입니다. 지팡이가 인도하고 만돌린이 정화하는 길을 걸으며 그녀는 고독한 자신의 운명을 완성해가리라 믿습니다.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

 

2011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