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나와 꿈속의 나
잠을 자면 꿈을 꾼다. 그 꿈속에는 나라는 개체적 존재도 있고, 내 주변 인물들도 들어있고, 이 세상도 들어있다. 꿈이 진행될 동안에는 그 속에 들어있는 그 개체는 의심할 바 없는 나다. 꿈속에서 사람들은 평상시와 똑같은 희로애락의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생활한다. 꿈속에 들어있는 그 개체를 나라고 믿고 살다가 꿈을 깨는 순간에, 꿈속에 들어있던 나와 주변의 인물들이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꿈꾼 자일 뿐, 꿈속에 들어있던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의식이 꾸고 있는 이 우주 현상계라는 꿈속에는 수십억의 등장인물이 있다.
그 중에는 나라고 착각한 놈이 반드시 하나 들어있다. 그 나머지는 다 너라고 다시 착각한다. 그러나 꿈을 깨는 그 순간에 나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허상인 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꿈을 꾼 의식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나는 꿈꾸는 의식이지 꿈속에 들어있는 개체가 아니다. 다만 꿈속에 들어있는 동안에는 허상인 개체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소고기를 먹으면 고기가 몸속에 들어가서 사람의 몸이 된다. 이처럼 돌고 도는 것, 이것이 우주 현상계를 존재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유기체적 모습이다.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기는 것뿐이다. 우주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을 취해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살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 에고에서 비롯된 하나의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 동물만 생명이고 식물은 생명이 아니란 말인가? 이제 그런 유치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그 영화의 화면을 받쳐주는 것은 스크린이다. 스크린이 없다면 화면은 허공 속에서 흩어져버린다. 그러나 스크린이 받쳐줄 때 필름 위로 내쏘는 빛에 의해서 화면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화면에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어떤 때는 불이나서 산이 전부 다 탈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전쟁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도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모든 장면들은 다 사라지고 화면을 받쳐주던 스크린만 남게 된다. 그 어떤 끔찍한 장면이 스크린에 투영되었다 할지라도 스크린을 물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본래성품은 스크린과 같다. 본래성품 안에서 수천억의 존재와 사건들이 뒤엉켜서 펼쳐지지만 그것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순간에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본래성품은 우주 현상계가 생기기 전이나, 생긴 후나, 사라지고 난 뒤에도 늘 변함없이 항상 그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장면에 매이고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받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생, 모든 사선, 모든 인연은 이미 다 흘러갔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지나가버린 것을 마음 속에 붙잡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므로 그것 역시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지금, 여기’만이 있을 뿐이다. 의식이 항상 ‘지금,여기’에 머물러 있고, ‘지금, 여기’를 생생하게 알아차리게 될 때 깨달음은 저절로 오게 된다.
어떠한 일이 벌어졌어도 본래성품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더럽혀졌다고 착각할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유희요, 축제일 뿐이다.
p64-66 무위해공 대자유로 가는 길 <나는 없다> 타이핑 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