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란에서 그녈 만나다
뒤란에서 그녈 만나다
가을빛이 너무 좋아 라고 읊조리며 그녀가 차를 몰았다. 순간 나는 '볕'이란 말을 떠올렸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볕'들은 다 사라졌을까. 뙤약볕마저 따사롭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했다.
여기저기 녹슬고 흠집이 많은 그녀의 자가용에 실려 나는 저수지를 지나 나물밥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후 3시 20분 수련관을 나서는 방과 후 차량에 몸을 실어야 하지만, 망중한을 즐기려는가 보다 하며 그녀의 차창으로 가을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의 선생님들과 아이들 이야기며 어제 저녁 한 시간 만에 완성된 그녀의 열퍼머 이야기를 나누며 십오 분 정도 달리다 보니, 아이들을 태우러 들르곤 하던 신평초등학교를 지나고 있었다.
늘상 생얼로 다니는 그녀가 문학 소녀처럼 탄성을 내뱉을 줄 몰랐기에 나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저 들국화들 피어난 것 좀 봐...” 하고 한번 더 그녀가 외쳤을 때, 나는 “엇, 내 안경 어딨지....” 그랬다. 길섶에 핀 들국화들은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올해 후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YMCA 사회적일자리에 이력서를 냈을 때, 그녀는 수련관에서 15년 째 일하고 있는 중이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곳의 관장이라는 것이었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며 '혹시'하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기억력이 엉망인 내가 그 순간 어떻게 32년 전 국민학교 6학년 담임의 이름이 기억났을까.
기억이 되돌아 온 순간, 그녀와 내가 32년 전 국민학교 동창이 되어 있었다.
“어머 기억력이 엄청 좋네요." 20대 부터 타인에게 존댓말을 쓰는 습관이 있어 그 순간도 나는 경어를 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딱 한번 같은 반이었고, 그것도 6학년 2학기 때니까, 결론은 아슬하게 그녀와 내가 한 앨범에 얼굴을 남길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추억은커녕 옛날 얼굴도 그 무엇도 더 생각나진 않았다. 감감한 회로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32년 전 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건 순전히 초인적인 그녀의 기억력 뿐. 맞아 맞아 맞장구만 치려니, 은근 열이 올랐다. 꼴통 같은 기억력이라니!
그녀와 한 공간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그저 웃기만 했다. 기억의 간격이 좁혀지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동안 참 훌륭한 뜻을 실천하며 열심히 살아왔군요, 하는 눈빛을 보냈을 뿐....
교원이셨던 아버지(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 옆 농업고등학교로 전근을 오신)를 따라 전학을 온 그녀가, 잠시 내 책상 옆을 스쳤었구나, 하는 아스라함. 그 농업고등학교 과수원 개구멍으로 들어가 오빠랑 서리하던 추억만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그녀와 가을볕을 맞았다. 볕드는 양지쪽 창가에 앉아 동화 속 같이 차려놓은 나물밥을 먹으며 나는 또 문득 뒤란이란 말이 떠올랐다. 시인 김수영의 <풀>을 읽었을 때, 닿은 입술만큼 예쁘다는 느낌이 드는 또 하나의 말, 뒤란.
철학이 깃든 화장실이라고 밥을 먹는 내내 그녀가 강조하던 그 화장실을 보려고, 나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60년 대 뒷간이 그곳에 있었다. 창문은 유리창이 아니라 그냥 훵 뚫린 기다란 문이었다. 그 화장실에 한 나흘 앉아 있으면 득도는 그냥 할듯 싶었으나, 가을 들녘만 만끽하고 밖으로 나왔다.
뒤란으로 갔다. 솟대 위 민달팽이가 촉촉한 흙 위로 배밀이를 하기 위해 내려올 것만 같은 음습하나 따사로운 뒤란. 뒤란의 흙을 밟아 보았다. 유년의 시렁처럼 쓸어놓은 뒤란을 걸으며 낡은 필름을 돌려보았다. 그때, 오후의 한가한 볕은 뒤란의 꽃들을 들깨우고 있었다.
20091009-20160629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