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를 읽고
「칼의 노래」를 읽고
-가장 공적인 전쟁 속, 가장 사적인 인간성의 기록
김훈의 에세이 「바다의 기별- 회상」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김훈의 세계관과 글을 쓰는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해서 남해안으로 내려왔더니 그 두 달 전에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에서 대패해서 조선 수군은 전멸하고 남해에서 조선 수군의 깨진 배와 송장이 떠돌아다니고 그 쓰레기로 덮인 바다에 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버려진 섬이란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빈 섬이란 뜻으로, 거기 꽃이 피었다는 거예요.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 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끌고 나가는 그런 전략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고자 하는 문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그분이 군인이기 때문에 사실에 정확하게 입각한 군인의 언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인이 아니면 쓸 수가 없는 문장입니다. 군소리가 없고, 무인들이 큰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사태를 정리해버리듯이 한 번으로 끝내버리는 문장을 이순신은 쓰고 있더군요. 그것이 나한테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재미가 없는 문장입니다. 아무런 수사적 장치가 없는 문장. 그러나 나한테 그것은 놀라운 문장이었습니다. 암담한 패전 소식이 육지로부터 전해오는 날, 이순신은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고 씁니다. 아, 좋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이것은 죽이는 문장입니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며 땅을 치고 울고 불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연 수사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죠. 내가 사랑하는 주어와 동사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에 입각해 있습니다.
그분은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에 백 번쯤의 군법을 집행하셨습니다. 군법을 집행했다는 것은 자기 부하를 처형했다는 것이죠. 그분은 그리 자비로운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자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비나 무자비의 잣대로 잴 수가 없는 일이고,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길로 서슴없이 가는 거죠. 인간 사회는 별의별 놈이 다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별의별 놈이 다 있는 것이죠. 내가 쓴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그 갇힌 성, 그 안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습니다. 싸우자는 자, 화해하자는 자, 뭐 오늘은 싸우자고 했다가 내일은 화해하자는 자가 있고 또 거꾸로 말하는 자가 있고 거기서 도망가는 자가 있고 그 안으로 도망 오는 자도 있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자도 있어요. 그 안에서 40여 일 동안 갇혀 있는데 지식인으로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자가 있어요.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나서 임금을 따라서 그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난 대체 어떤 자가 되었고 어떤 생각과 어떤 언동을 하면서 그 시절을 통과했을까를 생각하면 아무 답도 안 나옵니다. 식은땀만 흐르지요. 나는 아마 짐작컨대 아무 말도 안 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제일 편하겠죠.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는 자도 어떤 내면의 풍경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남한산성」에 그것 그리려다가 못 그렸어요. 그래서 그 소설은 미완성입니다. 이 자가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이지요. 이 자가 한마디라도 말을 해야 거기다 걸치고 이 자는 대체 어떻게 된 자이기에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내가 쓸 텐데 이 자가 끝끝내 아무 말도 안하니까 나는 쓸 수가 없더군요. 이순신은 또 일기에다, “오늘 어떤 녀석이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고 썼습니다. 기막히지요.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게 목을 베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완강한 사실에 입각하는 것이죠.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 머리를 베어서 장대에 끼워서 성 앞에 걸었다. 그래놓고 그 다음 문장을 계속 써요.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해군들은 바람 부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배들을 바닷가에 나란히 자동차 세우듯이 대놓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배들이 서로 흔들려서 배들끼리 부닥칩니다. 바람이 불면 해군은 배를 끌어서 물 위로 올려놔야 배가 부서지지 않죠.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물가로 내려 보내서 배를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고 씁니다. 이 부하 놈 하나를 죽였다는 것 그게 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써버립니다.
수사, 형용사, 부사가 하나도 안 나오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지만, 부하를 죽였다는 문장과 바람이 불었다는 문장 사이에서 그의 문장은 삼엄한 긴장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아주 전압이 높은 문장입니다. 볼트가 높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문장입니다. 만지면 전기가 올 것처럼 찌르르하는 문장이죠. 문과대학에서는 그런 문장을 안 가르치더군요. 문과대학에서는 셰익스피어, 밀턴, 워즈워스를 배웠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문장이었지만 내가 읽은 「난중일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장군님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꼭 노량에 가서 소주 한 병을 놓고 절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노량은 남해도 입구인데, 아주 경치가 좋습니다. 거기 이락사(李落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바다로 떨어져 죽은 사당인데, 그 이름도 참 이순신답죠. 아무런 수사학이 없고 떨어질 ‘락’자를 써서 이가 떨어진 바다라는 뜻이죠. 난 전국 사당 이름 중에서 이락사가 제일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가 죽은 바다다. 이런 단순성이 온갖 슬픔보다 더 거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명석성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칼의 노래」는 역사 소설이다. 역사적 일화나 인물이 등장하는 서적의 문구 몇 줄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뻗어나가는 여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철저히, 어쩌면 이미 사람들에게 공론화되었을 수도 있을 역사 인물에 대해서 쓰고 있다. 바로 이순신이 그 인물인데, 오백 원짜리 동전에 초상화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순신의 생애와 그가 겪었던 수많은 전쟁속의 일화들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쉽게 문학적 소재로 쓰이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주입될 틈을 막고, 이순신이라는 철저한 장군으로서의 면모가 사람들의 뇌리에 이미 단단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훈은 이순신을 일개 장군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쟁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민중의 내면을 이순신이라는 작은 개인의 인간성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장군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이야기와 같이, 김훈은 이순신의「난중일기」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군인의 손으로 쓰인 전쟁의 기록. 수사와 형용사를 배제하고 사실만을 기록한 무인(武人)의 일기를 보면서, 김훈은 지금까지 한국 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문체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주관적인 감정을 철저하게 숨긴, 단순성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이 문장이 김훈을 울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훈 자신이 객관성을 띄고 단순화된 이순신의 문장에서, 이순신이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라는 문장을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겉으로 어떤 수사학과 형용 구절을 동원해서 이순신의 감정을 꾸며 드러낸다 하더라고, 단순성을 획득한 짤막한 문장 속에 숨겨진, 단단한 감정의 파급력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이뤄낸 미학적 성과는 바로 이 단순성이다. 모든 것이 단순화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순신 이야기를 쓰면서 종래에 알려진 유명한 일화들을 변형시키거나 날조시키지 않고 그대로 갖다가 썼다. 오히려 백의종군에 처한 이순신의 상황을 소설의 첫 발판으로 설정함으로서, 앞의 내용을 소설 중간에 회상할 수 있게 하였다. 말하자면 주변부를 과감히 생략해서 중심이야기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또 이순신이 품에 안은 여진의 이야기만 빼면 소설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정말 일어났던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마치 기록문처럼 객관성을 띈 문장으로 써내려가면서, 김훈의 소설의 무엇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주인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어 내냐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설의 문체와 작가가 이순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것 또한 김훈이 중시해온 “이런 단순성이 온갖 슬픔보다 더 거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명석성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습니다.”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단순하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압축한다는 이야기이다. 본래 문장이 가지고 있던 것에서 무언가를 없애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쓸데없는 의미를 버리고, 더욱 문장을 단단하게 압착시킨다는 말이다. 군더더기를 버리고 알맹이만 남긴 문장. 이런 문장을 김훈은 구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순신을 묘사할 때나, 이순신의 심정을 묘사할 때 너무나도 잘 들어맞은 작가의 선택이었다. 이순신 같은 군인에게, 왈가왈부하면서 화려한 형용사만 늘어놓는 것은 이순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순신을 쓸 때에는 충남 아산 현충사, 장군의 사당에 걸린 큰 칼처럼 섬뜩하며 날카로워야 한다. 소설의 문체는 그 인물의 분신이다.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을 때,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이순신은 이렇게 죽어야만 한다. 작가의 문체에 따라, 그의 죽음은 일개 개인의 죽음으로서 단순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순신이 일개 개인이 될 때, 김훈의 단문에서는 진한 감동이 즙액이 되어 독자를 적신다.
단문은 결코 감동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김훈은 감정을 절제하고, 최대한 형용사와 수사를 쓰지 않고 문장을 완성함으로서,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지만 독자들은 단순화된 문장에서 더 많은 감동을 느낀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앞뒤로 생략된 많은 상황들과 이순신의 감정들을 독자 나름의 방식으로 유추해나가면서,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어떤 감정의 떨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단 이 문장 뿐 만이 아니다. 노량에서,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이순신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생각한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내 자연사에 안도하는, 지금까지 이순신이 전쟁 속에서 겪었던 고초들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단순한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스스로 앞 뒤 상황이나 인물의 감정을 유추하게 만든다. 독자 스스로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 내는 작업인 것이다.
이순신은 조선의 삼도 수군통제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면의 부고를 받던 날,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내 숙사 도배지 아래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다.… 몸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밀려내려 갔던 울음은 다시 잇새로 새어나오려 했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면의 죽음을 알아챈 종사관과 군관들은 내 앞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옆방에는 종사관 김수철이 보고 서류를 부스럭거리고 있었고 마루 밖 댓돌 앞에는 창을 쥔 위병이 번을 서고 있었다. 저녁때 나는 숙사를 나와 갯가 염전으로 갔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나는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이처럼 아들이 왜군에 의해 죽은 뒤, 군사들 뒤에서 숨죽여 우는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나는 죽은 여진에서 울음 같은 성욕을 느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물러간 적들은 또 올 것이고, 남쪽 물가를 내려다보는 임금의 꿈자리는 밤마다 흉흉할 것이었다.” 와 같이 적장 구루마지의 씨가 밴 여진의 시체를 묻으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여진의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데 이 전쟁의 참혹함이 있으며, “개별적인 죽음”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전쟁이라는 커다란 죽음만이 이순신 눈에 보일 뿐이다. 여기서 이순신은 비애를 느끼는 것이리라. 이순신이 정말 여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했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진이라는 여자를 작품 속에 등장시킴으로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순신은 철저히 개인으로서 혼자였다. 왜군과 처절한 전쟁을 계속했고, 임금은 그를 항상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임금이 언제, 어떤 죄목을 만들어서 그를 잡아들일 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순신의 감정이며, 인간적인 감각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그는 바다에서 항상 적들의 소리를 들었으며, 북쪽에서 임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사직을 빼앗긴 원통함인지,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의 울음소리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전쟁을 계속했다. 일반 민중과 다를 바 없는 위치에서, 일개 개인의 감정을 가지고, 집단적인 죽음에 맞선 것이었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이미 나와 적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편을 가르지 않는 개별적인 일개 개인일 뿐이고, 목적 없는 전쟁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순신은 자꾸만 싸우기를 원한다. 그것이 국가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와 같은 나 자신의 “개별적인 죽음”을 재촉하는 데서 나온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김훈이 말하고자 한 것은, 위대한 장군으로서의 이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개 개인으로서의 이순신도 아니다. 전쟁이라는 폐쇄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가지는 감정과 세계관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들은 어떤 형태로 변해 가는가를 말하고 있다. “내가 쓴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그 갇힌 성, 그 안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습니다. 싸우자는 자, 화해하자는 자, 뭐 오늘은 싸우자고 했다가 내일은 화해하자는 자가 있고 또 거꾸로 말하는 자가 있고 거기서 도망가는 자가 있고 그 안으로 도망 오는 자도 있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자도 있어요. 그 안에서 40여 일 동안 갇혀 있는데 지식인으로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자가 있어요.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나서 임금을 따라서 그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난 대체 어떤 자가 되었고 어떤 생각과 어떤 언동을 하면서 그 시절을 통과했을까를 생각하면 아무 답도 안 나옵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하였을까. 그것을 역사 인물을 통해서 조금 더 쉽게 풀어낼 뿐이다. 단순성의 언어로 말이다.
출처/ 문장글틴, 작가미상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김훈, <월간조선 인터뷰> 中
20140810-2017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