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라이프니츠― 신, 세계, 모나드를 말하다.

미송 2010. 2. 24. 23:16

라이프니츠― 신, 세계, 모나드를 말하다.

 

〈이성에 근거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의 본문은 실체의 새로운 본질 규정에서 출발한다. 단순실체란 활동적인 존재로서 모나드의 내적인 상태를 가리키고 모나드에는 하나의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동하려는 욕구를 담은 내적인 지향성이 있다. 지각의 통일로서 모나드의 내적인 상태는 무한한 외적 대상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모나드의 내적인 지각 양태와 이들에 연관된 내적인 변화의 계기에서 외적 대상의 다원성의 근거가 주어진다.

 

이 무한한 외적 대상인 신은 최상의 완전성을 갖는 근원적인 실체로서 가장 완전한 그리고 가능한 질서의 세계를 선택해 창조했고, 이것이 물질세계의 운동법칙뿐만 아니라 모든 모나드의 전체 경과를 조화에 관련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모나드들이 영혼으로서 단순실체가 속한 유기체의 중심을 형성할 때, 모든 부분은 서로 간의 적절한 회중을 통해 통일을 이룬다. 이 통일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세포 조직과 같다. 그리고 모든 부분은 무한하게 유기체를 간직하므로 언제나 살아 있다.

 

단순실체는 부분을 갖지 않지만, 복합실체는 부분을 가진다. 그리고 그 다원성의 근원은 몸이다. 몸은 일종의 살아있는 실체로서 표시되는 한 단순실체와 복합실체의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사람은 무한한 지각의 복합성을 갖지만 그가 몸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이 통각이 되지는 못한다. 지각에 있어서, 파도 소리를 듣는 것은 미세지각이 작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단계의 지각은 전 우주를 꿰뚫는 반성적 지각으로서의 통각에 곧장 도달할 수 없다. 여기서는 충족이유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질료 자체는 운동과 정지에 대해 무차별적이므로 특정 운동의 근거를 갖지 않으며, 신이 세계의 우연적 존재의 잇달음의 충족 근거다.

 

이런 충족이유는 다양한 의식의 변화를 지각할 수 있게 하는데, 기억에 대한 반성 능력에서, 의식의 상실과 비교될 만한 낮은 단계의 지각 상태까지 다양하다. 이 중 반성 능력이 있는 영혼을 정신이라고 부른다. 이 정신의 특징은 이성적인 본질로서 논리학, 수학 기하학을 필연적인 진리로 인식하고 과학을 취급하게끔 추론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동물의 모나드와 정신의 결정적 차이는 정신만이 스스로 우주의 거울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정신만이 신성의 모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정신은 그 작용 범위 내에서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갖는데, 이로써 정신은 모든 국가 가운데 가장 완전한 국가인 신국의 일원이 된다.

 

오늘날 인류는 근대 갈릴레이의 자유낙하 실험에서 20세기초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이르기까지 은총 없는 이성의 발전만 이룩해왔다. 오로지 이성에만 의지해 연구하고 실험하고 생산된 기술이 자연과 사회와 역사에 만연해 있다. 그러므로 근대인이 처한 과학 기술의 인식론적 문제 상황이 자연과 은총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역학의 최종원인과 고유한 운동법칙을 찾았을 때, 수학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없어서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가야 했다는데 아주 놀랐다. 이 점이 나를 완전현실이라는 개념으로 안내했고, 질료적인 원인에서 형상적인 원인을 추구하게 했고, 최종적으로는 모나드나 단순실체만이 유일한 참된 실체이고, 물질적인 사물은 잘 근거지어지고 밀접하게 결속 된 현상이지만,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들어보며 근대 인식론이 가져온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동굴을 탈출한 철학자는 스스로 내적인 변화의 원칙으로 이동한다. 그는 직접 동굴 밖의 세계와 태양을 바라본 체험을 시각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한 햇빛 앞에 결국 눈물이라는 수단으로 대응한다. 즉, 동굴을 탈출한 데카르트는 ‘생각한다’에서 ‘존재한다’의 도출을 시도했지만, 지각 등급의 차이에 대한 근본 처방을 내놓지 못하며 동물과 이성적 동물의 차이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동굴에서 탈출한 죄인은 사회 속으로 들어가며 종족 번식을 향한 도약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죄인은 “창조자의 관점에 따라” 자신의 지각과 욕망을 조절해 나머지 만물과 양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이 신은 어디에서나 중심점이고 신의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 것은 옳다.” 그러나 동굴의 비유에서도 누군가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떠도는 바람에 소문의 미디어가 마치 신과 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의 미디어는 또 다른 허상의 포로가 되었다. 동굴 박의 진짜 참된 실상을 말하는 포로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며 자신들의 동굴에서 될 수 있으면 그 소문의 진원지를 배제하려 한다.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충족이유는 우연적 사물의 잇달음 밖에 놓여야 하고 그의 원인이나 그 자체로 존재 근거를 갖는 하나의 필연적 존재인 실체에게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 잇달음을 종식할 수 있는 충족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물의 이 최종원인을 신이라고 부른다.

  

자연법칙은 단지 자연의 구조적 규칙성만을 기술할 뿐이다. 이는 무엇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강제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자연법칙은 경이롭다. 칸트는 자연법칙이 있다는 것은 항상 두근거리는 놀라움의 근거라고 했고, 아인슈타인도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항상 놀라움의 근거이며 신적인 근원의 지시라고 했다.

 

라이프니츠의 정의에 따르면 신은 무조건적이다. 동굴의 비유와 같은 인식 모델에서 동굴 안팎은 칸트의 감성계와 선험계의 갈등처럼 대립하고 있는데, 그는 이 양자의 차이는 지각과 통각의 문제로 풀어간다. 정상 상태에서 끊임없는 최적의 조건과 비율을 맞추어 더 나은 상태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이성의 천명인 것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이성과 영원한 진리에 따른 신과의 공동체를 제안한다. 즉, 신의 비전을 전부 인식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새로운 기쁨과 완전성을 향해 항상 되어가는 전진”에 있어야 한다. 과학을 발견하는 한에서 신이 흔쾌히 창조했던 것을 모방하며 경험하고 이성적 추론을 통해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이해하면 언제 음악이 기쁨을 선사하고 언제 대상과의 적절한 비율이 기쁨을 선사하는지에 대한 인식 조건을 알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시간만 있다면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에 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원의 철학이란 현실에서 영원한 세계에 이르거나 도달하려는 지혜의 사랑이다. 그러자면 현실적인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이고, 고유한 하나는 다시 다원성에 도달해야 한다. 곧 영원의 철학이란 일즉다 다즉일의 형이상학의 완성이다. 이는 기독교의 논리에도 있으며, 불교의 의상대사도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이라는 같은 논리를 펼쳤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하나로 대변되는 숫자의 개념을 곧바로 모나드의 속성에 적용했다. 단순실체로서 모나드에는 영원의 철학에 도달하는 작동 원리가 있다. 모나드는 지각과 통각을 통해 움직이는데, 지각은 모나드의 내적 상태의 변화를 주도하며 질주한다. 모나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더 많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으로 지각 이동을 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지각에서 다른 하나의 지각으로 방향성을 잡고 나가는 반성적 지각을 일컬어 통각이라고 한다. 지각이란 ‘코기토cogito’를 의미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지각은 여러 단계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는 ‘숨sum’의 단계에 이르면 이미 반성적인 지각에 도달한다. 이 반성적 지각이 통각이다. 이 모나드의 지각은 존재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신에서 최하위의 미물에까지 내려갔다가 내적인 활동으로 엔텔레케이아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모든 모나드는 자기만족적인 ‘비물체적’인 자동기계로서 그들의 활동 원칙에 의해 쉴 새 없이 그들 전체 삶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간다. 모든 자동기계 안에 또 자동기계가 있고 이러한 이어짐은 무한하다. 그래서 전체 세계는 미분되는 작은 것까지 살아 있고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속에서 ‘정신’의 모나드는 신국의 공동체를 만드는 계획으로 가득한 이성적 행동을 파악한다.

 

이 모든 모나드는 주변의 실체나 우주를 그들의 내부로 받아들여 서로가 들락날락거리게 하지 않는다. 즉 모나드에는 창(窓)이 없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른바 거울이 들어선다. 모든 모나드는 그들의 지각에서, 혹은 그들의 거울에서 전 우주를 표현한다. 또한 이 거울을 통해 다즉일(多卽一)로 회귀하는 형이상학적 반성에 이른다. 이 거울에 비치는 다(多)는 궁극적으로 비추이는 일(一)로 귀일한다. 일즉다의 원칙이 모나드의 내적인 상태를 움직이는 지각 이동의 원리라면, 다즉일의 원칙은 지각에서 지각으로 이동해 얻어진 반성적 통각의 원리다. 이 모나드들은 지각이 가진 명료성의 등급에 따라 구분되는데, 라이프니츠의 유기체 이론에 따라 둘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 모나드는 단순한 지각만 있는 존재도 있고, 직관적인 전망으로 신에게까지 이르는 지각에 도달하는 존재도 있다. 이렇게 활동적 힘을 가지며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아 가는 것의 최종 도달점은 엔텔레케이아다. 그리고 이러한 에너지의 원천을 코나투스conatus 혹은 니슈스nisus라고 부른다. 모든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달성되는 모나드의 활동적인 힘의 과정에는 특별히 모든 술어 개념이 그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 형이상학의 원칙이 적용된다. 특히 하나의 완전한 개념을 갖는 모나드는 그 자체로 주어의 모든 술어를 포함하며 그의 술어들은 광범위한 충족이유들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모나드는 미래에 나타날 모든 속성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드러냈던 모든 속성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잠재적으로 미래에 나타나며 제시될 모든 속성을 포함하므로, 모나드는 미래를 잉태하고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 모나드 안에 있는 활동적 힘은 그들의 술어를 항상 동시적으로 작용하게 하므로 술어들은 곧 모나드들 안에 서로 겹쳐 있다. 이 때문에 살아 있는 거울인 모나드에 생생하게 비추면 비출수록 존재의 흔적으로서 우주의 주름이 드러난다.

일즉다는 단순실체에서 복합실체로 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연장과 질료가 없는 모나드가 어떻게 연장과 질료를 갖는 다양성의 세계로 나가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표상 내지 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표상은 외부에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신에게서 온다. 모나드는 서로 상호 작용도 없고 물리적이나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한 모나드의 표상은 다른 모나드의 표상과 일치할 수 있다. 신이 이러한 길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신에 의해 상호 협조되고 확증된 예정조화가 곧 표상이다. 모나드는 만사를 스스로 명쾌하게 알아차릴 수 없을지라도 전 우주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따라서 모나드는 상이한 장소에서 상이한 물리적 대상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나드를 우리의 지각에 동시에 표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나드 철학 체계를 지배하는 두 가지 대원칙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이성 인식이 의지하는 모순율이고, 다른 하나는 충족이유율이다. 모순율은 모순을 함축하는 언명이나 진술은 거짓이고, 거짓을 반정립하면 참이라는 것을 말한다. 모순율은 다시 동일성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충족이유율은 근거의 원칙이다. 이 근거의 원칙은 이성 진리에 대해서도 타당하며, 아울러 사실 진리를 지배한다.

 

이성 진리의 분석은 무한한 단계를 거쳐 동일성으로 돌아가지만, 사실 진리에서는 분석이 멈춰진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인과관계에 따르는 사실 진리의 충족이유는 우연적인 사물의 귀결의 밖, 즉 필연적 실체, 신에 놓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은 최종 충족근거로서 유일하고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절대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즉 라이프니츠는 신 안에 관념의 영역을 만드는 가능성들의 실재를 두었던 것이다. 신 안에서 모든 필연적 진리는 무한한 가능세계들과 같다.

 

동일률에 의존하는 모든 명제는 분석적이다. 이는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분석적 진리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푼수는 아프다’라는 문장에서 라이프니츠의 개별실체의 의미론에 따르면 ‘푼수’에게는 완전한 개념이 있다. 이 명제는 개별자 푼수에게 일어났고 일어나고 일어날 것을 미리 결정한 신적인 지식에 따라 분석적으로 참이게 된다. 예컨대 ‘푼수가 아프다’는 명제는 진술과 사태가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푼수’와 ‘아프다’라는 완전한 개념을 알기 때문에 분석적으로 참이다. 이러한 관념은 시간과 공간도 모나드가 지각에서 놓여 있는 속성이 술어라는 점에 기인한다.

 

모나드에서 시간과 공간은 사물의 완전한 개념에 대해 내적이거나 내재적 속성을 갖는다. 즉 대상의 속성은 독립적 공간의 속성이 아니라, 공간에 놓인 대상 자체의 속성이다. 대상의 속성은 그것이 놓인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놓여 있는 위치가 대상의 실재 속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대상들에 대해 이상적일 뿐 실재적이지 않다. 또 시간과 공간은 실체들 사이의 잠재적 관계를 지각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들은 현상이며 엄밀하게 말하자면 환영(幻影)이다. 그럼에도 시간과 공간은 실체들의 내적인 토대에 터전을 잘 잡아 실체들의 이상적 관계를 실체화hypostatization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도 ‘잘 정초된’ 환영이다. ‘인과관계’라는 것은 원인 A와 결과 B 사이의 잠재적 관계가 B보다 A에서 더 명백하고 더 단순하게 표현될 때, A가 B를 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적으로 관계 자체가 실재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인과관계 역시 본질적이지 않다.

 

라이프니츠는 이 대신 동반가설로 이해되는 예정조화 이론을 제시한다. 예정조화는 영혼과 육체의 평형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완전 현실의 목적원인과 물체 운동의 작용원인 사이의 일치를 포괄한다. 모나드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고도 서로 독립적으로 전 우주를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서만 표현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창 없는 모나드에 거울 같은 본유관념을 주었다. 즉 완전한 개념에 표상된 본유관념은 모나드의 내재적인 속성이 된다. 시간이나 공간은 단지 감각을 통해 도달되는 모나드 지각의 현상적 배열이다. 결국 현상은 부동(不動)의 것이 아니라 단지 모나드 지각의 배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