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222

내가 정말 싫어하는 농담

밑줄 긋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김하나 지음, 김영사, 2015 내가 역사 관련 교양 수업을 할 때, 매 주제마다 지겹도록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 진실'들'에 접근하는 지난한 과정이지만 어쩌면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마주하는 한계이며, 바로 그러한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는 점. 또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이란 긍정의 가능성만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해' 또한 동의의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래서 어찌보면 내 강의는 학생들에게 매우 모호하고 헷갈리는 강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역사학의 본질이 '지식'보다는 '지혜'에 있다고 생각한다. 앎으로 ..

평론과 칼럼 2025.03.28

최소한의 선은 지킵시다

난 어릴 적에 정말 많이도 싸우고 다녔던 것 같다.잘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금 핑계를 대자면 그 또래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불의에 맞서서 이 한 몸 내던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먹서열을 가리거나 별것 아닌 경쟁의식을 동반한 패싸움들이었던 것 같다.그런데 이런 유치한 싸움들 속에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안경은 벗고 싸우기, 주먹으로는 때리되 발로는 차지 않기, 쓰러져 있으면 때리지 않기, 패싸움이라도 두 명이 한 명은 때리지 않기, 뒤에서는 공격하지 않기 코피가 나면 끝내기 뭐 이런 것들이다. 특별히 약속한 적도 없고 교칙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룰을 지켰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내가 그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단순..

평론과 칼럼 2025.03.21

김인숙,「벌거벗은 임금님과 눈 먼 자들」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 무슨 글자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말, 토해낼 수 있는 모든 말들이 이미 신문 지면, 그리고 인터넷을 도배한 상태다. 참담하다, 부끄럽다, 비참하다, 끔찍하다, 슬프다, 암담하다, 기막히다…. 이런 점잖은 말들은 글로 쓰였을 뿐이고, 더 진심에 찬 것은 알고 있는 모든 험한 말들을 합친 욕설일 것이다. 하야라는 말은 너무 점잖고, 탄핵이라는 말도 너무 구태의연해서,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울리는 말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말로도 되지 않고, 글로도 되지 않으니, 남는 게 욕뿐이라는 게 글쓰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겠나. 그러니 이런 날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대신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 일이다.  며칠 동안 뉴스를 보느라 읽고 있던 ..

평론과 칼럼 2025.02.14

문학평론가 류신 “공간을 사랑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책을 소설가 구보 씨와 산책자 발터 벤야민에게 바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류신 문학평론가에게 있어, 그리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게 있어 ‘구보’와 ‘벤야민’은 어떤 의미를 가진 인물들일까? 그 궁금증을 풀어줄 실마리는 작품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많은 문학적 인물들과 사상가가 있는데, 왜 ‘그들’이여야만 했을까? 산책자는 구경꾼이 아니다『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왜 굳이 ‘서울’이어야만 했을까요?저는 서울에 살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대학 진학 이후 거의 매일 서울에 머물러 있었죠. 25년 넘게 고향과 타향을 시계추처럼 오갔죠. 저는 서울에 살지 않지만 서울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서..

평론과 칼럼 202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