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560

세사르 바예호<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라고 너는 내게 말한다. "다 가버렸어요. 응접실, 침실, 정원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서 아무도 없지요."나는 네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떠나버리면, 누군가가 남게 마련이라고. 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고. 그저 없는 것처럼 있을 뿐이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곳에는 인간의 고독이 있는 것이라고. 새로 지은 집들은 옛날에 지은 집보다 더 죽어 있는 법. 담은 돌이나 강철로 된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집을 짓는다고 그 집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사람이 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란, 무덤처럼,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집과 무덤이 너무너무 똑같은 점이지. ..

내가 읽은 시 2025.01.27

한강,『흰』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은 발한다.밤이면 거실 한 쪽에 소파침대를 펴고 누워, 잠을 청하는 대신 그 해쓱한 빛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흰 회벽에 어른거리는 창밖 나무들의 형상을 바라보았다.그 사람 -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윤곽과 표정이 서서히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만년설  언젠가 만년설이 보이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 적 있다. 창 가까이 서 있는 나무들이 봄에서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몸을 바꾸는 동안 먼 산 위엔 언제나 얼음이 얼어 있을 것이다.어린 시절 열감기에 걸린 그녀의 이마를 번갈아 짚어보던 어른들의 차가운..

내가 읽은 시 2025.01.13

맥스 슐만<사랑은 오류>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래왔듯이 이 일도 체계적으로 시작해나갔다. 우선 나는 그녀에게 논리학을 강의했다. 법대생으로서 나는 마침 논리학을 수강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것은 아주 수월했다."폴리."나는 두 번째 데이트 때 그녀를 만나 말했다."오늘밤엔 '놀'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이그, 멋있쪄."한 가지 이 여자를 칭찬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도무지 반대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우리는 캠퍼스의 밀회장소인 '놀'로 가서 늙은 상수리나무 아래 앉았다. 그녀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무엇에 대해 얘기할 건데?"그녀가 물었다."논리학."그녀는 잠시 생각해 본 다음 그것을 좋아하기로 결정했다."그거 되게 멋진데."그녀가 말했다."논리학이란"하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사고에 대한 학..

내가 읽은 시 2025.01.11

조정권 『산정묘지1』外 1편

산정묘지1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산정은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빛을 받들고 있다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

내가 읽은 시 20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