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738

시를 써도 되겠는가/ 류시화

세상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미워하는 이곳에서시를 써도 되겠는가신마저 자신을 편애하는 이들에게만 문을 여는 이곳에서양탄자 짜는 사람처럼 구부정하게 앉아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라고운율 고심하며시를 써도 되겠는가​모국어의 나라에서 태어나혀 끝에 투쟁의 단어 올려놓고 법부터 배우며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서로의 색깔 물으며 금을 긋는 시대에진실을 알고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내 침묵 오해할까 고뇌하며나무 아래서 주운 새 키우듯그리움의 언어로시를 써도 되겠는가​삶이 내 손등에 손을 올려놓을 때낯익은 것은 낯설음뿐인 이곳에서아침마다 꿈이 눈꺼풀에서 떨어져발 아래 부서지는 이곳에서시여, 내가 투사가 아니어서 미안하다 말하며오갈 데 없는 단어 하나씩 주머니에서 꺼내그럼에도 삶이여신성하다, 신성하다 반어법으로 말하며시..

운문과 산문 2025.05.02

장정일 <요리사와 단식가> 외

요리사와 단식가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

운문과 산문 2024.11.10

이병률 <고양이 감정의 쓸모>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 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 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 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 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 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 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 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 을 받았거든..

운문과 산문 2024.02.21

백석<여승>외 1편

여승女僧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 이 있었다 가지취 취나물의 일종으로 ‘각시취’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한다. 금덤판 금점판. 주로 수공업적 방식으로 작업하던 금광의 일터. 섶벌 나무섶에 집을 틀고 항상 나가서 다니는 벌. 설게 ‘서럽게’의 평북 방언. 머리오리 머리카락.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

운문과 산문 202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