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737

장정일 <요리사와 단식가> 외

요리사와 단식가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

운문과 산문 2024.11.10

이병률 <고양이 감정의 쓸모>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 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 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 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 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 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 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 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 을 받았거든..

운문과 산문 2024.02.21

백석<여승>외 1편

여승女僧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 이 있었다 가지취 취나물의 일종으로 ‘각시취’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한다. 금덤판 금점판. 주로 수공업적 방식으로 작업하던 금광의 일터. 섶벌 나무섶에 집을 틀고 항상 나가서 다니는 벌. 설게 ‘서럽게’의 평북 방언. 머리오리 머리카락.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

운문과 산문 2023.07.31

랭보 <교회에 모인 가난한 사람들>

사람들이 토해내는 후덥지근한 숨결로 그득한 교회당 한쪽 구석에서 늘어선 떡갈나무 의자 사이에 꽉 들어찬 사람들의 눈은 소리 높이 경건한 찬미가를 부르는 성가합창대와 본전에서 넘쳐흐르는 노랫소리로 향한다 빵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양초 냄새를 맡으며 지극히 만족하여 두들겨맞은 개처럼 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보호자이며 영주(領主)이신 신(神) 앞에 우스꽝스럽고 고집스럽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일주일의 6일간 괴로운 삶을 신으로부터 허락받고 있었건만 일요일이면 걸상들의 광택을 내기 위하여 찾아드는 기특한 여인들 헐어빠진 외투 속에서 필사적으로 울면서 악을 쓰는 사나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여인들 더러운 때투성이 가슴을 드러내고 수프를 훌쩍훌쩍 떠먹고 있는 야비한 여인은 기도하는 체하면서 사실은 기도 ..

운문과 산문 2023.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