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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상(李箱)의 추억/ 김기림

상(箱)은 필시 죽음에서 진 것은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갈아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상의 피가 임리(淋漓)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 조각이었다. 다방 등의자에 기대앉아 흐릿한 담배연기 저편에 반나마 취한 몽롱한 상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고 현대의 비극을 느끼고 소름쳤다. 약간의 해학과 야유와 독설이 섞여서 더듬더듬 떨어져나오는 그의 잡담속에는 오늘의 문명이 깨어진 매커니즘이 엉클려 있었다. 빠리에서 문하 옹호를 위한 작가대회가 있었을 때 ..

문학 자료실 2026.09.09

마음에 돋아나는 것들

손가락 위에작은 거스라미 하나그저 조금 일어난 살갗인데그게 그렇게 거슬린다고손톱으로 잡아당기고마땅한 도구가 없으면이빨로 물어뜯는다 별것도 아닌 것을어서 없애버리겠다고그러다 잘못 뜯으면피가 난다아까까지만 해도그저 조금 거슬리던 살이이제는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아픈 존재가 된다 잉간은 참 이상하다그냥 두어도 될 것을왜 자꾸 들여다보고왜 자꾸 뿌리를 찾고왜 꼭 없애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마음도 그런가 보다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고오래된 상처를 뒤집어보고그때의 나를 붙잡아왜 그랬느냐고 묻고그리운 사람도그리운 이유도끝내 알 수 없는 마음도자꾸 손톱으로 건드린다그러다 피가 난다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상처 하나만 더 생긴다 그러니 오늘은그냥 두자조금 일어난 마음 하나조금 거슬리는 기억 하나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하나손..

채란 문학실 2026.08.15

질식하든 감탄하든

《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오만짭짭했던 영화에 대하여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외로 영화의 내용이 아니었다.“감독이 대체 어떤 사람일까?”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따라가며 감동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곱씹었다기보다,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자기 안에 무엇을 품고 있기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다.한마디로 표현하면 “오만짭짭.”감독이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대한 건축물처럼 세워 놓고, 관객에게는 “질식하든 감탄하든 알아서 해라”라고 하는 듯한 영화였다. *라슬로는 피해자인가 라슬로는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계 건축가이고, 미국으로 건너와 다시 자기 삶과 경력을 세우려 한다. 처음에는 당연히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다.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꾸 질문이 생긴다..

영화 이야기 2026.08.15

비등점沸騰點 이후

조르바의 춤 'Zorba's Dance' by Alfred Gockel 비등점 沸騰點 이후새로 산 프라이팬에 감자를 볶는다감자는 달라붙지 않는다 강한 칼을 받는 도마처럼강한 못을 받는 벽처럼태연하다 익어 갈수록 깊어지는 맛깨 한 스푼달라지는 맛 뜨거워도 달라붙지 않는 감자장식 없어도 좋을간격이 낳아준 선물 조르바의 춤을 다시 만난 날 오래전에 쓴 시 한 편을 다시 꺼내 읽었다. 「비등점 이후」 새로 산 프라이팬에 감자를 볶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짧은 시다. 감자는 뜨거운 프라이팬에 달라붙지 않는다. 칼을 받는 도마처럼, 못을 받는 벽처럼 태연하다. 익어가면서 맛이 달라지고, 마지막에는 ‘간격이 낳아준 선물’이라는 문장에 닿는다. 처음에는 그저 감자를 볶다가 떠오른 생각을 적어놓은 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

채란 퇴고실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