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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변화, 죽음 혹은 신의 책

100% 작가-번역가 공식 커플로 검증된 오르한 파묵(왼쪽)과 이난아. 한국일보 자료사진 빨강- 변화, 죽음 혹은 신의 책 무더위가 한풀 잦아들던 지난 9월초, 내 이름은 빨강의 마지막 쪽의 번역을 마친 나는 관 속같이 비좁은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사흘 밤낮을 시체처럼 누워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사흘 반 만에 깨어난 날, 나는 비로소 벽에 접착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여 놓았던 오르한 파묵의 사진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 그의 사진은 나를 괴물처럼 압박해 왔었지만 그..

Books 2026.10.20

더 저지《The Judge》

평생 타인을 심판한 아버지, 마침내 자신을 마주하다영화 《The Judge》(2014) ·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로버트 듀발 주연 《더 저지》를 처음 볼 때는 아버지를 변호하는 아들의 법정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곱씹을수록 이 작품의 중심에는 아들 행크보다 아버지 조셉이 있는 것 같았다.평생 타인의 죄를 판단해 온 판사. 자신의 원칙에 확신이 있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그러나 정작 자기 아들에게는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이 영화는 한 판사의 살인 혐의를 다루는 이야기인 동시에, 한 인간이 평생 외면해 온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결국..

영화 이야기 2026.10.11

푸른 코트의 나날들

비오는 날에는 유리창을 닦자 누군가의 말이 기억난 듯이 오늘도 아파트 난간에는 아침이불들과 몇 주 전 난간 아래로 몸 던진 노파의 아프고 아팠던 다리가 보이네 허술하게 닦인 유리창으로 뿌옇게 비치는 얼룩들 지워지지 않을 그림들과 걸었네 그것은 바로 어젯밤의 일 언젠가도 거닐었을 거리의 같은 간판들과 눈에 익은 소품들 다가와 나의 체온을 빌리겠다 하였지 그리고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야 귀띔하고 떠났지 빛살들 아이처럼 살아나는 날이었네. 푸른 코트의 나날들-오정자 시를 읽으면서 자꾸 유리창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몸을 생각하게 된다. 비 오는 날 유리창을 닦는 것은 흐린 바깥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일 텐데, 이상하게도 이 시에서는 유리창을 닦을수록 세상이 더 또렷해지는 것이 아니라 얼룩과 흔적들이 나타난다...

내가 읽은 시 2026.10.06

백석<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내가 읽은 시 2026.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