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투명한 코키토의 정치학 - 신해욱의 경우
작년 가을에 신해욱의 두번째 시집 (생물성, 문학과지성사2009)을 읽고 나는 이것이 2009년에 나온 가장 뛰어난 시집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매혹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할 수는 없었다. 얼핏 '2000년대 시'의 일반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학의 정체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2000년대 시의 가장 확연한 특징 중 하나가 '나'(서정적 자아 혹은 서정시의 화자)라는 심급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성찰이 낳은 변종의 '나'들은 대게 두 계열을 이룬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의 '심층'으로 들어가 상상적인 나를 폭발시켜버리고 내 안의 타자들을 쏟아내는 길이고(이때 '나'는 무수한 화자들로 분화된다), 다른 하나는 나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감각적인 사건들을 포착해 우연적인 나를 발명하는 길이다(이때 '나'는 어떤 느낌들의 도체導體가 된다).
비유컨대 황병승이 '나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수한 인물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어떤 불룩한 자루를, 김행숙이 '나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일시적으로 겨우 어떤 형태를 이루는 분말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섬세하게 논구할 일이지만, 앞의 계열은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마이너리티 문화가 분출하게 된 것과, 뒤의 계열은 한국사회를 완강하게 지배한 국가, 민족, 가족적 정체성의 힘이 강화된 것과 은밀하게 연관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는 어떤가.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 <축, 생일> 전문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전문
시집 맨 앞에 놓여 있는 두편의 시를 옮겼다. 여기에서는, 앞에서 두 계열로 정리해본 그 흐름과는 뭔가 다른 어떤 방법론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여기서도 '나는'에 걸려 있다. 신해욱의 시집을 읽다보면 '나'라는 주어가 이토록 집요하고 수상하게 반복되는 예가 예전에 또 있었던가를 묻게 되는데, 그리 길지 않은 저 두편의 시에서만 '나(내)'는 각각 9회씩, 총 18회 등장한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앞의 시는 생일날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한다. 성인이 되어서 맞는 생일날에, 게다가 케이크를 앞에 놓고 축하파티라도 하게 되면, 우리는 왜 그토록 '어색한 시간'을 겪는가? 364일 내가 아닌 채로 살다가 생일날이 되면 내가 나로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생일날은 내가 아닌 채로 대부분의 생을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고약한 날이다.
그 부조리한 기분을 마치 이목구비가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그날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한 비유의 신선함이나, "나는 내가 되어가고/나는 나를/좋아라고 싶어지지만"과 같은 식의, 문법적으로 어색해서 시적으로 성공적인 표현의 묘미 같은 것들이 읽는이를 사로잡는다. 뒤의 시가 이 정서를 이어간다. 이 시에서 '나'는 여러 방식으로 그러나 희박하게 존재한다. "내가 속한 시간과/나를 벗어난 시간"의 엇갈림 때문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자랑스럽게 하나하나 나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들일 텐데, 나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이 두편의 시에서 특히 마지막 구절들이 오랫동안 독자를 붙든다. 시인은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라고 말했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이라고 적었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시간에도 내 삶은 흘러간다. 그 소외감과 허망함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또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이다'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면 '나는(인간이 되어가는)슬픔'이라는 은유구조의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나는 그저 '슬픔' 이라는 어떤 정서의 껍데기일 뿐 아직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생물성과 인간성의 중간지점, 그 어느 막막한 사이의 시공간에서 이 시인은 망연자실할 때가 많고 시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한다. 그래서 이 시인이 동사를 사용할 때 그것들은 대개 현재형이다. 나는 지금 현재에도 나인가를 물으면서, 나는 인간이기는 한 것인가를 물으면서, 그 가까이 나를 응시하고 진짜 나에 대해 생각한다. 두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나는/내가(...)"라는 문형을 이런 맥락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신해욱의 시를 읽을 때에는 두개의 '나'를, 그러니까 '응시(생각)하는 나'와 응시(생각)되는 나'를 분별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 둘 사이에 슬픔이 고이고 그 슬픔이 시를 쓰게 한다. 전자와 후자가 하나로 합쳐질 때 그녀는 더이상 시를 쓸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시들은 '잃어버린 나'를, 더 나아가면,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에 대한 두편의 비가(悲歌)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주목을 못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신해욱 시의 '나'를 두고 "이 경우 '나'의 몸은 비어 있으며 그 몸은 다만 타자의 시간을 환대하고 그 시간을 매번 새롭게 사는 숙주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차라리 '나'를 통한 '타자의 타자화'"라고 지적한 함돈균(咸燉均)의 견해는 일면 타당하지만, 또 그렇게 읽을 경우 2000년대 시의 일반적인 흐름에 이 시인이 합류하게 되겠지만, 나는 거기서 한번 더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인의 '나'가 타자들의 시공간을 떠돌고 있는 것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타자로 느껴지는 순간들에서 어떤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이를 집요하게 시로 옮기는 것은 그 사태가 다행스러워서라기보다는 문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미지의 타자에게 나의 신체를 내어주고 무의식을 개방하는 '접신'의 순간들"을 긍정하는 이라면 '나'라는 주어를 그토록 강박적으로 시에 노출시키지는 않알을 것이다. 또 이미 지적하 대로 "나는 내가/ 물처럼 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 ('화이트'에서처럼 주어를 두번 반복하고 그 둘의 간격에서 어떤 상실감과 그리움의 정서를 분만해내는 패턴을 반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녀의 시는 '나를 앞에 세워두고 진찰하면서 "환자의 용태(容態)에 관한 문제" (오감도 시제4호)를 두고 근심했던 1930년대의 이상(李箱)을 닮아 있다. 2009년의 신해욱은 이렇게 근심한다. "그런데 왜 나는 나로/사람은 사람으로/환원될 수 없는 것일까." ('레일로드')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신해욱이 각별히 아끼는 서술어가 있다면 그것은 '투명하다'일 것이다. 시 <화이트>는 "나는 열거되고 싶지 않아"로 시작해서 "투명한 슬리퍼를 신어도/투명해지지 않는다"를 거쳐 "춥다"로 끝난다.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반성에 포섭될 때, 그러니까 내가 유일하고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닐 때, 우리는 '열거'된다. 그 상황을 이 시인은 '투명하지 않음'으로 인지한다. 한편 다른 시 <비밀과 거짓말>에서 시인은 심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뿐인 나를 희미하게 감지하는데, 그럴 때에는 이런 문장을 적는다. "나는 심장이 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무척 아름답고 투명한 일이다." 요컨대 신해욱에게 투명한 것은 진실한 것이고 진실한 것은 투명한 것이다. 이를 투명성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투명성은 그녀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미학의 핵심 범주이기도 하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아름답고 투명한"이라는 표현을 안고 있다. 그녀에게 투명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투명한 것이다. 이것은 시집 <생물성>이 전달하는 매혹의 핵심을 설명하는 열쇳말로도 적절해 보인다. 수식어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간결한 배치' (신해욱의 첫번째 시집이기도 하다. '간결한 배치', 민음사2005)를 이룩하는 데 헌신하고 있는 그녀의 수사학은 유사한 스타일을 공유하는 몇몇 시인들에 비해서도 단연 극단적이다. 물론 이 투명한 언어에 대한 열망은 투명한 나에 대한 열망을 꼭 껴안고 있다.
그렇다면 신해욱의 투명성의 시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 사실 비평이 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기서부터'다. 이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스따로뱅스끼가 루쏘의 문학에서 찾아낸 핵심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자각적으로 던진 이의 명단 앞자리에 루쏘의 이름을 올려도 무방할 것이다. 황종연의 적절한 요약대로 "루쏘가 요구한 것은 바로 사람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우리는 흔히 '진정성의 윤리학'이라고 불러왔다. 투명함의 이미지에 대한 루쏘의 집착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의 문학적 표현인 셈이다. 최근 몇몇 사회학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주체들이 이 진정성의 에토스를 서서히 폐기해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담론을 내면화한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루쏘 이래의 그 투명성에 대한 열망이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지금 -여기에 인상적인 방식으로 도착한 신해욱의 투명성의 시학을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근심과 함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를 아파하는 신해욱의 시는 오늘날 우리들 마음의 현황이자 주체성 위기의 한 징후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신해욱의 투명성의 시학은 미학적이기만 한 어떤 것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지적한 대로 사회학적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주체성의 위기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과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정부의 퇴행적 통치형태의 한 배후가 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정치학적이다. 이런 독법은 '비평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기도 하다. 앞에서 비평은 정치적인 것을 향해 모험을 하는 시들과 함께 고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시인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닐 뿐더러 모든 비평이 그런 지도(指導)에 나서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비평은 한편으로는 모험하는 시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성공적인 성취들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들에서 우선 그 미학적인 것의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내고(우리는 이것을 생략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투박함을 혐오해야 한다), 그 이후에 거기에서 정치학적인 것까지를 읽어내는 일 말이다. 어떤 시인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그의 시는 최대한의 경우 정치학적인 시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것을 어떤 결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정치학적인 것까지를 읽어내는 일 말이다. 정치학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장 자체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논점들을 제공함으로써 또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평은 텍스트를 통과하는 문을 여는 작업이다.
한권의 시집 앞에 우리는 선다. 미학적인 것의 문을 열면 그 안에 사회학적인 것의 문이 있고, 그 문을 열고 광장으로 뛰쳐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뛰지는 않더라도 아마 걸음걸이 정도는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요약하자. 시와 정치의 제휴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보는 시각과 '가능한 불가능'으로 보는 시각. 전자는 그 제휴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거기에 희망과 의지를 품는 데 인색한 태도를, 후자는 그것이 체험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될 때까지 해보겠다는 태도를 요약한 말이다. 가능하지만 어렵다고 말하는 것과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현학적인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표현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미묘한 어떤 출발의 차이가 각자의 결론을 180도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작년 여름 서울 한복판에서 외쳐진 다음 문장들에서 보았다. "우리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진실을 만드세요, 하느님. 그녀와 손잡고 거리로 나가겠습니다." (진은영) "공기속에서 온통 비린내가 납니다. 없는 문이라면 그려서라도 열어젖혀야겠습니다." (신해욱) 탄생하지 않은 그것과 손잡고 걷겠다는 것, 없는 문을 그려서 그것을 열겠다는 것. 이것들이 바로 '가능한 불가능들이다. 모두가 할 수 있지만 문학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게 문학이 모르는 정치의 착각이고 모두가 못하는 것을 문학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정치가 모르는 문학의 비밀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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