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와 장미꽃
사람들은 어울려 살기도 하지만,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만의 인생관을 세우려고 하는 입법기관이며, 자신들의 과오를 자의적으로 용서하는 재판관이며,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사해 주는 상부들이며, 자신들의 얽매인 과거를 풀어 내고 해결해 주는 심리치료사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처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보복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이렇듯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채워야만 하는 증명할 수 없는 공식이다. - 올리히 백
우정이라는 테마가 복잡한 이야기하면, 사랑은 얼마나 복잡할까? 생텍쥐페리 자신 그리고 그의 부인 콘수엘로도 그들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바꾸려 하거나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또 어린 왕자 역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의 장미꽃과 이별했다. 어린 왕자는 그녀의 쌀쌀한 성격을 더 이상 참고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애정의 관계에서 무능력한 그들은 좌절하며 슬퍼했다.
그 장미꽃은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관계가 끝난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이별을 위한 시험 단계'로 여길 것이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부부심리 전문 치료사인 나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 속에서 힘겨워하는 부부들에게 충고한다. '어린 왕자'는 항상 동일하게 전개되는 애정 드라마 가운데서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되는 치료방식이라고 말이다.
하필 자기 분야 이외에는 무지하고 멸종된 공룡에만 관심을 가진 이 지리학자에게서 어린 왕자는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장미꽃도 '가까운 미래에 사라져 버릴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꽃은 일시적인 존재야. 세상에 대항할 무기라곤 네 개의 가시밖에 없는, 그런데 나는 그 꽃을 내 별에 혼자 내버려두고 왔어!"
사랑을 하는 동안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인생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선 한 가지는 모든 사랑이 자연의 섭리대로 처음과 끝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해서 가장 좋은 경우는 두 사람이 힘겨울 때나 괴로울 때, 함께 극복해 나갈 때 그리고 그 사랑이 죽음으로 끝을 맺을 때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은 감동을 준다.
우리 인생은 유(有)와 무(無)가 공존하는 바다 한가운데 놓인 아기자기한 시간의 섬이다. 우리는 죽은 뒤에도 언제 어디서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인연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관점에서 본 '인간의 몸으로 온 예수의 부활'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과 같은 교훈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어떤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모든 사랑은 살아 있는 동안 위협을 받는다. 우리의 미성숙함과 연약함, 신분상 어울리지 않는 결혼의 시작, 혹은 교제의 기간 중 생긴 마찰로 인해 이별하는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반투인(반쿠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약 6천만명 에 이르는 종족)들의 지혜에 따르면, '결혼이란 마치 누군가가 주머니 속에 뱀 한 마리를 숨겨 놓는 것'과 같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배움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실패를 맞는다. 요컨대 베르톨드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말했듯이 '사랑은 생산품이며, 일'인 것이다.
어린 왕자는 처음으로 그의 꽃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꽃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더 외로워했다. 그러나 모든 연인처럼 어린 왕자는 곧 절망의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해 나갔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의 시작은 연인들에게 장밋빛 꿈 같은 시간들, 고귀함, 아름다움 그리고 강렬함으로 나타난다. 우리들 역시 그를 혹은 그녀를 신처럼 떠받들고 최고의 위치에 경외심을 보낸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사기행각을 벌이면서 심리적인 효과를 이용해 유혹하고 있다. 또 우리 스스로를 기품이 있는 성주의 딸, 영향력있는 기사로 부각시키곤 한다. 애정 초기에 갖게 되는 마법의 힘 가운데 활기로 가득차고 활기를 선사하는 이 두 가지 속성은 자아도취 중이다. 이는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게 괴어 남은 사람과 벽을 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점 없는 이상적인 아내 혹은 이상적인 남편을 사랑의 전리품처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마법의 힘은 우리가 미숙한 사랑의 수준에서 위대한 사랑의 수준에 이르도록 자극을 준다. 그것은 모든 장애물의 상황을 제거해주며, 사랑으로 가득한 둥지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약간 취한 듯한 상태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이 끝나는 순간 반드시 명심해 둘 것은 냉정함이다. 술이 깬 상태가 오히려 심하게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의 실체를 발견하곤 한다. 즉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잠재된 폭력성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과 그들을 돌보고 감싸안을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능력이 그것이다.
우리는 결혼 생활이 위기로 뭉쳐져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독일인 부부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하고 있으며, 큰 도시의 경우에는 두 쌍 중 한 쌍 꼴로 이혼을 하고 있다. 이혼한 부부들 중 3분의 2가량이 부인들이 먼저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 이유는 생각했던 만큼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혼인서약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것은 하늘에 맹세하거나 예전처럼 순전히 경제적인 강요 속에 철저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와 같은 강요 행위에는 고통이 끊이지 않는 불행한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생은 마치 공사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빠르게 변하고 있다. 독신인 여성과 남성 그리고 동성 연애자 부부는 서로 합의하여 모든 일을 결정한다.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들은 형식적인 애정관계를 택하기보다는 오히려 행복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 인생 여정은 더 이상 전통, 종파 같은 혈연ㆍ지연ㆍ협약에 영향받지 않는다.
'인생은 무엇이다'라는 완벽한 예 없이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인생에는 전통적인 윤리 규범 대신 파트너와의 합의에 따른 그들만의 윤리 규범이 들어서 있다. 시회학자 부부인 울리히 백(Uleich Beck)과 벡-개른스하임(Elisabeth Beck-Gernsheim)은 <평범하기에 그지없는 사랑의 무질서>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밝혔디. '오늘날 여성들과 남성들 사이에서 결혼증서가 없는 동거생활과 게약결혼, 이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직장과 가족간 그리고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조화로운 모습을 이루고, 신세대적인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추구하고, 변함 없는 우정과 형식적인 인간 관계를 추구하는 일이 불가피한 현상으로 여겨진다. 즉 이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그런데 그 속에 사는 우리는 '사랑'이 애정관계의 기본 토대가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사랑은 오랫동안 좋은 감정을 유지해 온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고난과 시련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기쁨의 근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지시를 내린다고 해서 되거나 되지 않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과물, 즉 실망감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난의 시험은 구속과 자유라는 상반된 관계를 이룬다. 어깨 너머로 어린 왕자를 보자. 모래, 자갈 그리고 눈 위를 걸으며 긴 여행을 나선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듯한 길을 발견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이었다.
"안녕"
장미꽃들이 말했다. 어린 왕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그의 꽃과 쏙 빼닮았다.
"너희들은 누구니?"
깜짝 놀란 어린 왕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장미꽃들이야."
장미꽃이 말했다.
"아, 그래?"
그러자 어린 왕자는 자신이 아주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의 꽃은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이 하나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원 하나 가득히 그와 똑같은 꽃들이 오천 송이나 되지 않는가!
우리는 분명 이 같은 사실을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날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의 사랑스럽고 똑똑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세상에는 그보다 더 매력적인 남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내가 사랑하는 여성은 몹시 아름답고 능력도 있지만, 아마 그녀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성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갑작스럽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는다. "전형적인 남자야!" 혹은 "전형적인 여자야!"라는 말로 말이다. 다른 여러 장미꽃 중의 한 송이처럼 내 파트너도 그럴 것이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또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새로운 만남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또다시 상처를 받는다. 결국 우리는 '구속'의 대명사인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자유'에 대한 갈망에 목말라 한다. 그렇다고 자유를 갈망하며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우리의 가정, 아이, 친구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대신할 사람이 많음을 이성적으로 미리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능한 한 쉬지 않고 수많은 남성이나 여성을 사랑한다면 도대체 사랑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사랑이 초보 단계에 있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린 왕자가 직면한 첫 번째 위기에서 답을 내려 보자.
"나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꽃을 가져서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꽃은 그저 평범한 한 송이 꽃일 뿐이었어. 그것하고 무릎에 닿을까 말까한 낮은 화산 세 개, 그 중의 하나는 어찌면 영영 꺼져 버렸는지도 모르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난 위대한 왕자가 될 수 없어 …."
그래서 그는 풀숲에 엎드려 울었다.
어린 왕자가 경험한 사랑의 위기를 통해서 우리는 처음 사람과의 관계를 맺었을 때 심사숙고했던 일을 기억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게 된 비밀스런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사랑의 위기에 처한 부부들은 "내가 왜 결혼했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장미꽃과 어린 왕자는 위기 속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함께 공유했다. 그들은 마치 질긴 공생 관계, 즉 가시 돋친 담쟁이덩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 왕자는 보호의 차원을 넘어 지나치게 방어적인 행동을 취했다. 마치 중환자를 대하는 것만큼이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각본에 지나치게 치우친 상태에서 장미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그때 자기 자신의 성숙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파트너를 선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비밀스러운 연출'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 든든한 결혼 자금 혹은 훌륭한 출신 배경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파트너를 아무 조건 없이 고른다고 해도 결국은 어느 정도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된 선택 기준에 영향을 받는다. 이를 니체는 '지식은 의지의 노예'라고 표현했다.
결혼을 하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가장 흔한 이유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둥지가 그리워서이다. 그리고 한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우리의 나약한 모습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또 독립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아이를 갖기 위해, 새로운 사회 계층에 어울리기 위해 결혼을 한다. 그런가 하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법적인 성생활을 하기 위해, 가계를 꾸려나갈만한 경제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결혼을 한다. 물론 직업적으로 꼭 필요해서 결혼하기도 한다.
이밖에 파트너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인격의 중요한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있다. '내가 두려움에 떠는 부분에서 그 혹은 그녀는 용감하다. 나는 교육 수준이 낮지만 상재방은 교육을 잘 받은 교양인이다. 그리고 내가 보잘것없고 상상력도 없는 반면 상대방은 풍부한 상상력이 타고난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상 인격 발달을 위해서도 반드시 고려해 볼 만한 사항들이다. 결혼과 사랑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정의하고 있다. '연애 기간 중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만을 가지고 인생을 담보로 중대한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 그리고 사회 분위기에 휩싸여 경박하고 기발한 생각 따위로 결정을 내려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 연인들의 사랑의 맹세가 사회적으로 전혀 효력을 갖지 않음을 설명해 주면서 그들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 결혼이란 결국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항임을 주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애정의 열기를 점점 식히게 할 만한 상당수의 명백한 기준들이 있다. 근거가 뚜렷하지 않은 관계, 준비되지 못한 관계, 불성실 불안 구속감이 느껴지는 관계, 불손한 행위를 하는 관계,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거나 혼자만의 외로운 결정을 해야 하는 관계, 서로에게 은밀한 계획이 있는 관계, 평범하지 않은 인생 설계, 유대관계가 결핍된 관계, 유머가 부족한 관계, 신체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관계,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관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연인들이 여기에 제시된 에와는 정반대의 예들, 즉 성장, 강인함, 신뢰, 논쟁 문화 그리고 지구력을 몸소 실천하게 될 때 그들은 공동의 책임감, 아량, 재치 그리고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밖의 것들과의 관계, 직업상 어려움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걱정 같은 위기의 순간들을 극복해 나가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자질이 생겼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우가 이야기의 절정 부분에서 어린 왕자에게 일러준 것이기도 하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 때문이란다."
이젠 다른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애정은 식었는데 몸만 붙어 있는 관계가 아닌 속이 꽉 찬 관계 말이다. 디트리히 본훼퍼가 인용했듯이 '생활하고, 경험하고, 배우고, 이루어내고, 즐기며, 고달픈 시간'을 가질 때인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마음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일은 힘이 들며, 관계 형성을 위한 수고스러움, 공격적인 태도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고민하고, 사소한 일에서조차 신중하게 고려하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회의를 생활화해야 한다. 심지어 웃어른과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아이들이 부모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또한 부부관계의 진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항상 새로운 상황에 놓일 때마다 부부간의 합일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부부 심리치료의 의미와 치료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심리치료사의 도움으로 부부가 함께 결정을 내리면 그 자체가 쓸데없는 비용을 절반으로 줄인다. 밤을 지새우면서 심리치료를 하다 보면 이제껏 반목해 오던 부부싸움, 억척스러운 침묵, 원치 않는 성생활, 모욕감 그리고 무관심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제는 서로 도와 가면서 부부관계의 가능성을 다시금 일깨우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중요 요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오해의 근원이 될 뿐이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덮고 있던 의미 없는 유리덮개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거나 장미의 위협적인 가시를 뽑아아내도 괜찮다. 심리치료사인 나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되살아난 사랑의 감정에 행복해하는 부부들을 봐 왔다. 나는 항상 심리치료를 받으러 온 부부들에게 두 사람이 앉기에 비좁은 등나무로 만든 안락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하라고 했다.
"당신의 어떤 점이 사랑스러운가?" 수많은 상처와 싸움 끝에 그 부부들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리고 이따금씩 울음을 터뜨리며 서로 얼싸안을 때면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고는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백발이 된 한 커다란 체구의 남성이 상담중에 불쑥 부인에게 말을 했다. "왜 우리가 그토록 수많은 시절 동안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했을까?" 이 두 사람은 젊은 연인처럼 손을 꼭 잡은 채 나갔다. 이 상황은 나를 충분히 감동시켰다.
"장미꽃들을 다시 가서 봐. 너의 장미꽃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녀희들은 나의 장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 수많은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여우야."
우리의 사랑은 말 그대로 무지함으로 표현되고 매우 주관적인 편견에 의한 것이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어. 그것은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야. 물론 나의 꽃도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아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유리덮개로 보호해 준 꽃은 그 꽃뿐이기 때문이야. 내가 벌레를 잡아준 일(나비 때문에 두세 마리 남겨 둔 것말고)도 그 꽃에게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놓거나,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까지 내가 귀 기울여 들어준 것도 그건 내 꽃이기 때문이야."
이처럼 사랑하는 일은 힘들다.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의 행동마다 의미를 부여해야 하면서 정성도 깃들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사회처럼 항상 개선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면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집처럼 쉽게 무너진다.
마티아스 융 「우리 마음 속의 어린 왕자」, 해바라기
'문학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의 적敵, 시의 적敵 (0) | 2010.04.01 |
---|---|
100명의 시인, 평론가가 선정한 '10명의 시인' (0) | 2010.03.24 |
김언 <청춘과 만년 사이에서> (0) | 2010.02.17 |
소설의 바깥, 바깥의 소설 (0) | 2010.02.15 |
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을 읽고 (0) | 2010.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