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쌀이 어쩌다 짐승의 먹이가 되었나
정부는 농부의 눈물 외면 말아야
땡볕이다. 논두렁 풀을 깎는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벼들은 그새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여물어가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 풀을 쳤을 금수양반은 진즉부터 땀범벅이다. 가슴께며 등허리 할 것 없이 온 몸이 땀에 절어져 있다. 소금기가 허옇게 베어있는 윗도리를 비틀어 짜면 대여섯 숟갈의 소금물은 족히 얻을 수 있겠다. 낟알처럼 알알이 맺혀있던 이마의 땀방울이 또 한바탕 쏟아진다.
그래봤자 사실 또 헛고생이다.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새벽부터 논두렁 풀을 깎고 있는 금수양반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공손히 고개 숙이고 익어가는 나락, 나락(那落)으로 떨어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쌀금’이 ‘똥금’ 된지 오래다. 쌀이 어쩌다가 천덕꾸러기 취급까지 받는 지경에 와 있는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린 아직 덜 고파봐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쌀은 우리네 목숨 줄 아니던가. 한 됫박의 쌀이, 한 말의 쌀이, 한 가마니의 쌀이 없었더라면, 우리 모두는 목숨 줄을 여기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농부가 흘린 한 됫박의 땀이, 한 말의 땀이, 한 가마니의 땀이 없었더라면, 곡물 창고를 채우고도 남을 농민들의 땀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진즉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헌데, 천박한 경제논리와 거대한 자본주의를 앞세워 농사짓는 사람들을 늘 뒷전으로만 떠밀어 대더니 이제는 급기야 나 몰라라 내팽개칠 작정인가. 뼈 빠지게, 쎄(혀) 빠지게 농사 지어봐야 느는 것은 빚뿐이란다.
금수양반이 잠시 예초기를 끄고 다른 논으로 향한다. 그 사이, 차마 나는 어떤 말조차 꺼내기가 민망했던가. 정부는 앞으로 쌀 제고를 줄이기 위해 묵은 쌀을 가축용 사료로 쓰는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며, 올 쌀값도 별반 시원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는 얘기며···. 농부가 죽을 똥 살 똥 지은 쌀을 사람 목숨이 아닌 짐승의 먹이로 내어줘야 하다니. 정말이지 농사지을 맛 안 나겠다. 정말이지 온갖 정내미가 다 떨어지겠다.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지겠다.
“야야, 살살 놀그래이 배 꺼진데이.”
내가 아는 말 중에 가장 시리고도 서러운 말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이 말을 꼽는다. 밥 굶기를 밥 먹 듯 하던 시절, 마당에서 뛰노는 손자를 보고 할머니가 던졌을 이 말을 되새기다보면 나는 금시, 알 수 없는 뭔가에 눌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막막하게 서러워져서는 정말이지 숨죽여 울고 싶어진다. 때 절고 기름기 절절 낀 엄살 따윈 제발 부리지 말자는 다짐이 절로 나온다.
내가 밥벌이를 하던 전주에는 ‘전군도로'가 있다. 일명 ’번영로‘라 불리는 이 도로는 일제강점기에 전주에서 군산으로 뚫린 전국 최초의 2차선 도로로 알려져 있다. 자그마치, 47km에 달하는 폭 7m의 도로다. 지평선이 보이는 호남평야의 쌀 수탈을 위해 군산항으로 연결시킨 가슴 아픈 도로다. 소위, 쌀 수탈 도로다. 지금은 그저 아픈 역사는 잊혀지고 벚꽃 길로만 유명해져서 더 서러워진 도로다.
그 길로 실려 온 쌀들은 군산항에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으로 실려 가기 위한 통한의 쌀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쌀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숨 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을 지나고 있는 이 시대에서조차 쌀은 여전히 ‘해방’을 맞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올해도 벌써 첫 벼베기가 이뤄졌다. 지금은 진초록 들녘이지만 머지않아 들녘은 온통 황금물결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걱정부터 앞선다. 올해도 어김없이, 쌀값 폭락으로 인한 농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올해만큼은 적어도 황금들판을 트랙터로 갈아엎는 퍼포먼스가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정부가 나서서 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면 참 좋겠다.
그런 면에서 정부의 2005년산 쌀의 사료화 방안은 참으로 아쉽다. 물론, 가축에게 먹인다는 2005년산 쌀을 북으로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먼저, 위쪽의 굶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작금 쌀의 대북 지원을 재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 간절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쌀 문제에 관한 거시적 정책이 나올 수 있겠는가. 배곯는 거라도 막아놓고 통일세도 논해야 되지 않겠는가.
벼는 우리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하루 세끼 ‘끼니’가 되어준다. 만에 하나, 공손한 벼가 고개를 뻣뻣이 쳐드는 날엔 우린 모두 죽는다.
<미디어오늘 2010년 09월 0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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