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지민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미송 2014. 10. 22. 07:34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 이지민

“아는 사람 집이에요?”
“어때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예쁜 집인데…… 옛날부터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이면 괜히 빙 돌아서 이 집 앞을 지나곤 했어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저렇게 하얀색 페인트칠이 돼 있었는데, 한 번도 더러워진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렇게 저 대문을 보고 있으면 저 집 사람들은 지금 무얼 할까 자꾸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왠지 저 집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저 집 안에서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있을 것 같더라고요.”
“첫사랑이 살던 집이구나?”
“에……엣?”
내가 대뜸 묻자 그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다시 그 집을 바라보았다. 첫사랑의 추억을 되돌리기에 그보다 더 완벽한 장소는 없을 듯했다. 살다 살다 집에 질투를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도도하고 청순한 어떤 소녀를 닮은 그 집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내숭떨지 말라고 혼내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 우리 앞으로 한 소년이 지나갔다. 짝사랑하는 소녀의 집 앞을 서성이는 그 짙은 갈색머리의 소년은 바로 그였다.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소년의 분홍빛 뺨과 달큼한 땀내가 밴 하얀 목덜미를 그는 마냥 그리워하며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와 그, 그리고 소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기억 속으로는 걸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억을 간직한 길 속으로는 걸을 수 있다. 나는 질투를 멈추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 순간 무척 슬펐을 것이다. 넓은 줄만 알았던 골목길이 좁아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니까. 어른에게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많이 걷고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걷지 않으니 추억이 없고 그래서 늙는 것이다. 바람과 공기의 입자 속에 숨은 시간의 힘을 느끼기 위해 여기까지 온 그를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행여 그가 이 동네를 떠난다 해도 그리움은 놓지 못할 거라고. 나는 그의 가슴속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지나온 수많은 길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첫사랑 소녀에게 가는 이 길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처럼 아주 가느다란 어떤 길도 존재했다. 내가 그를 바래다주던 어느 밤의 평범한 그 길이.


● 출처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문학동네 2008
● 작가 - 이지민: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0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좌절금지』등이 있음.

 

 

제가 태어난 동네는 3번 국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동네였어요. 그게 제가 자란 도시의 중심가였던 셈이죠. 기차역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낡은 건물 2층에 ‘백볼트’란 카페가 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저와 제 친구의 소굴이었죠. 그 카페에서 이정선이 있던 무렵의 해바라기와 신촌블루스와 들국화를 들었어요. 이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요. 하지만 어제처럼 생생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그때는 정말 시간이 더디 흘렀던 것 같아요. 음악을 들으며 친구와 떠들어대다가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또 시간은 남는데 갈 곳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가슴속 지도가 그려진 거예요. 그렇다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부지런히 걸어 다니는 지금 이 길이 다시 가슴속 지도가 되겠죠.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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