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의 노래 혹은 뮤지카 멜랑콜리아
김진영
늦은 밤 돌아와서 음악을 듣는다(조금 취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 부분(특히 다 카포 파트) 혹은 브람스의 인터메조. 책상에 앉아서 또는 침대에 누워서 나는 마음이 ‘흔들린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이 왜 흔들리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내가 지금 어떤 특별한 감정 상태(신체 상태)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모호하고 불확실해서 곤혹스러운 감정의 상태와는 다르게, 두 가지 사실은 오히려 내게 자명하다. 하나는, 음악이 건드려서 뜻없이 일어난 특별한 마음의 상태를 나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언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슬픔, 기쁨, 평온함, 안도감, 울적함, 추억, 회한, 몽롱함……. 수많은 이름을 붙여 보지만 그 어떤 이름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아마도 Th. 아도르노라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건 당연하다고. 음악의 경험은 ‘내용이 없는 표현’의 상태, ‘순수 표현’의 상태, 그래서 그 어떤 언어도 의미화할 수 없는 ‘무의미의 절대적 상태’에 대한 경험이라고. 또 하나 자명한 건, 흔들리는 내 마음의 상태는 정지나 반복(시계추처럼)이 아니라 운동의 상태, 더 정확히 이동의 상태라는 사실이다. 내 마음은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어디론가 이동한다: 나는 어디론가 가라앉는다, 어디론가 흩어진다, 어디론가 떠나간다……. R. 바르트라면 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건 당연하다고. 음악의 경험은 사랑의 경험이라고. 사랑은 환유처럼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고 번지면서 이동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 음악의 특별한 상태에 대해서 내게도 나만의 특별한 시니피앙이 있다. 멜랑콜리. 멜랑콜리는 내게 어떤 이미지의 경험도 의미의 경험도 아니다. 그건 내게 소리의 경험이다. 어떤 울림, 어떤 소음, 화이트 노이즈, 악보 없는 노래, 음악 너머의 그 어떤 음악…….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12장에서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을 만난다. 하체는 물고기이고 상체는 여인의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요정의 자매. 그러나 세이렌 자매의 치명적인 매혹은 육체가 아니라 목소리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최상급 목소리 - 최상급은 그 자체가 이길 수 없는 매혹이다. 최상급은 도착하면 그만큼 멀어지는 무엇, 그 존재가 끝내 ‘멈’일 수밖에 없는 무엇에 대한 이름이다. 때문에 아무도 이 멈을 먼 채로 놔둘 수 없다. 그 멈 앞에서 가능한 건 그 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뿐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는 또 하나의 ‘멈’이 있다. 그의 권력이 있고, 사유 재산이 있고, 무엇보다 베틀로 남자들을 속이며 오매불망 남편만 기다리는 정숙하고 현명한 거짓말쟁이 부인 페넬로페가 있는 왕국 이타카(Ithaka)가 그 곳이다. 두 개의 멈 사이에서, 도착할 수 없는 멈과 도착할 수 있는 멈 사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오해하고 착각하지 않는다(앞서 매춘녀의 원조인 키르케와의 계약 동거를 통해서 그는 자신이 타고난 도덕적 의지의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했었다). 멈이 던지는 가까움의 유혹에 그는 현명하고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그는 귀는 열어 놓고(세이렌의 섬을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신화의 법률은 명령한다) 대신 육체를 마스트에 묶는다. 배는 섬으로 다가가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 온다. “세이렌의 노래는 내 귀 안으로 흘러들었고, 그 노래를 더 깊이 엿듣고 싶어서 나의 가슴은 어쩔 줄 모르고 뛰었다…….” 가슴은 뛰면서 노래 속으로 투신하려 하지만, 육체는 그 가슴을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다. 그렇게 육체의 운명이, 참을 수 없는 갈망과 실현할 수 없는 관능 사이의 몸짓이, 어쩌면 모든 예술의 원형인 ‘몸부림’의 운명이 태어난다(“나는 눈짓으로 풀어 달라고 명령했지만, 페리메데스와 에우릴로코스가 일어나서 내 몸을 밧줄로 더 꽁꽁 묶었다”). 배는 섬으로부터 멀어지고 노래 소리도 멀어지고 몸부림도 고요히 잦아든다. 하나의 멈은 사라지고 하나의 멈만 남는다. 권력과 사유재산과 결혼이 있는 고향 이타카만이.
사이렌의 섬을 무사히 지나간 오디세우스호의 항선은 이후 ‘경계(Grenze)’가 된다(삶과 죽음을 나누는 선, 그것이 경계다). 그 경계 이편과 저편으로 두 개의 세계가 분리된다. 세이렌의 노래가 있는 곳과 세이렌의 노래가 사라진 곳의 두 세계. 그리고 그 사이는 홍해처럼 갈라져서 바닥 없는 심연이 된다. 심연은 유령들로 채워진다. 아도르노는 그 유령을 가상(Schein)이라고, 블랑쇼는 전설(Legende)이라고 명명한다. 있지도 않은 것의 있음, 있음 속의 없음, 실재 속의 부재, 텅 비어서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갖가지 독사(Doxa) 혹은 이데올로기들. 그러나 카프카에게 그 경계의 심연은 ‘이웃 마을’이 된다. 말을 타고 평생을 달려도 닿을 수 없는 마을, 잠을 자지 않는 바보들이 산다는 ‘남쪽 마을’, 그러나 귀 기울이면 잠 못 자는 바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는 어떤 경계의 마을(‘경계도 영역이다’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러면서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문지방 영역). 카프카의 글들에서는 소리가 난다. 전화기 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성’), 누이동생의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변신’), 매 맞는 조수들의 소리(‘소송’), 입 다물고 행진하는 개들의 합창 소리(‘어느 개의 연구’), 세이렌이 부르는 침묵의 노래 소리(‘세이렌의 침묵’)……. 그러나 이 소리는 외롭게 창가에 앉았을 때만(‘황제의 칙명’), ‘독신자의 불행’ 속에서만, 집을 나와 ‘돌연한 산책’을 떠날 때만, 낯선 성으로 소환되었을 때만, 이유도 모르는 채 체포되었을 때만,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갑충이 되었을 때만,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를 떠다닐 때만(‘사냥꾼 그락쿠스’) 들리는 소리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다가 혹은 늦은 밤 음악을 듣다가, 이 이웃 마을로 입장한다, 내던져진다, 소환당한다. 이 이웃 마을은 어디일까. 그 마을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걸까.
프로이트는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흔적(Erinnerungsspur)’을 말한다. 기억은 없어져도 남아 있는 어떤 것. 그것은 없음 속에서 있다. 실재 속의 부재가 아니라 부재 속에서 실재한다. 기억은 없어도 기억의 흔적은 있는 곳, 그 장소가 오디세우스의 육체다. 오디세우스의 육체를 마스트에 결박하는 건 밧줄이 아니다. 그건 언어다. 육체는 몸부림치지만 그럴수록 언어의 밧줄에 더 꽁꽁 묶인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을 정복했을 때, 부하들이 밧줄을 풀어 주었을 때, 해방된 육체는 이미 경계 저편의 육체가 아니다. 그 육체는 언어화된 육체다. 학교를 졸업한 아이처럼 육체는 이제 말을 한다. 이 말하는 육체로부터 범람하는 육체의 메타포들이 태어나지만, 무덤 속에는 시체만 있듯이 육체의 찬가들 속에 육체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육체가 있다. 귀가 알고 있는 육체. 사이렌의 노래가 흘러들어서 용해되고 소화되었던 육체가 있다. 이 육체는 말하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 노래도 세이렌의 노래는 아니다. 그 노래는 언어에게 묶인 노래, 경계를 넘어갈 수 없이 육체 안에 감금당한 노래다. 노래 부르는 육체, 그러나 경계를 건너갈 수 없는 육체 - 그리하여 또 하나의 육체, 멜랑콜리의 육체가 태어난다.
블랑쇼는 오디세우스와 에이허브를 비교한다. 에이허브는 19세기의 오디세우스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을 만난 것처럼 에이허브는 백경을 만났고 그 울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에이허브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몸을 묶어 세이렌의 노래를 통과하지만 에이허브는 몸을 던져 백경의 노래 속으로 뛰어든다. 오디세우스는 살아남고 에이허브는 죽는다 (그런데 사실은 거꾸로가 더 진실이 아닐까? 오디세우스는 죽었고 에이허브는 살아남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늦은 밤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이 흔들려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는 오디세우스도 에이허브도 아니다. 혹은 오디세우스이기도 하고 에이허브이기도 한다. 나는 그러니까 멜랑콜리의 육체다. 나는 먼 곳으로 떠나간다. 아주 먼 곳, 낮은 곳, 밑바닥의 어느 곳, 경계 너머 어느 곳으로 한없이 하강한다. 하지만 나는 내 방 안에, 책상에, 침대에 묶여 있다. 나는 떠나면서 머물고 머물면서 떠나간다. 에이허브처럼 투신하면서 오디세우스처럼 묶여 있고, 오디세우스처럼 묶여 있으면서 에이허브처럼 투신한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몸짓, 잊혀진 몸짓, 그러나 기억의 흔적은 알고 있는 몸짓을 되찾는다: 나는 몸부림친다. 나는 흩어진다, 모든 감각이 살아나서 깃털처럼 흩어진다, 나의 육체는 수많은 소리로 울리기 시작하고, 나는 확인한다: 나의 육체는 지금 어떤 웅성거림, 덩어리로 뭉친 어떤 소음들의 물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음의 총합이라는 걸.
그리하여 나는 귀를 기억한다. 귀가 기억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다. 세이렌 노래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지를, 왜 치명적인지를 귀로 이해한다:
“자, 이리 와요, 온 세상이 칭찬하고, 아르고스의 자랑인 오디세우스여! 그대의 배를 이 암초를 향해 저어와요, 이 곳을 지나기 전에 그대는 먼저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 누구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듣지 않은 채 검은 배를 저어서 이 곳을 지나간 적은 없었어요. 그들은 모두가 우리의 노래를 듣고 더 깊은 앎으로 행복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우리는 그대의 모든 것을, 저 넓은 트로이에서 트로이인들과 아르고스인들이 신의 뜻에 따라 겪어야만 했던 모든 일을 알고 있답니다. 이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답니다.”
나의 모든 것, 내가 겪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노래 앞에서 나는 더 무엇을 감추고 숨길까? 나는 나를 모두 풀어 놓는다. 또 이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러나 일어날 수 없었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노래 앞에서 나는 더 무엇을 두려워할까? 나는 모든 금지된 것들을 욕망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세이렌은 모르는 걸 하나 더 알고 있다. 나는 에이허브가 아니라는 걸, 나는 오디세우스의 후예라는 걸. 지금 내가 듣는 건 세이렌의 목소리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는 걸, 그건 호메로스의 언어가 부르는 노래라는 걸, 뮤지카 멜랑콜리아라는 걸.
멜랑콜리는 애도의 엑스타지 상태다(Trauer-Extase). 온몸이 텅 비는 슬픔 그러나 동시에 온몸이 느끼는 관능의 상태. 바르트는 이 멜랑콜리의 체험을 슈만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에서 듣는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라인 강으로 뛰어들기 전 <아침의 노래(Gesang der Fruehe)>를 작곡하던 밤 슈만이 건너갔던 선망 상태(Delirium). 그러나 바르트에 앞서 이미 19세기에 이 슬픔 - 엑스터시의 상태, 멜랑콜리의 선망 상태를 알고 있던 사람은 스탕달이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행복한가?라고 스탕달은 묻는다. 물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행복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슬픔에 빠진 애인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다(스탕달, <로시니의 삶>). 슬픔에 빠진 애인은 아름답다. 그건 그녀가 지금 멜랑콜리의 상태, 너무나 극진한 그러나 향유할 수 없는 어떤 사랑의 상태로 건너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 그러나 지극한 환희의 상태, 건너갈 수 없는 곳에서 그러나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 오는 그 어떤 멜로디를 지금 그녀는 듣고 있다. 어떤 음악은 듣는 사람 안에 고여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밖으로 흘러나온다. 슬픔에 빠진 애인에게서는 어떤 멜로디가 누설된다. 누설되는 음악은 그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서 또 무언가를 분비시킨다. 아도르노는 말한다: “슈베르트를 들으면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왜 눈물이 흐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Th. 아도르노, <슈베르트>) 그 어떤 악보도 재현할 수 없는 음악, 모든 작곡 너머에서 들리는 음악, 우리가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듣는 음악, 그리하여 이유도 모르는 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뮤지카 멜랑콜리아 - 누가 이 음악을 모를까? 그 누가 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장웹진 10월호》
[그림설명]
그리스 시대로부터 오늘 날까지 세이렌 자매는 서양 회화의 테마가 되어 왔다. 그러나 캔버스 위에 형상화 된 세이렌들은 거의 언제나 강력한 노래의 힘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신화적 권력의 이미지들이다. 그에 비하면 H. J. 드레이퍼의 세이렌은 좀 특별하다. 그의 회화에서는 유혹 당하는 오디세우스와 유혹하는 세이렌들 사이의 역학이 뒤집어져 있다. 스스로 밧줄에 묶이면서 한 곳만을 무섭게 응시하는 오디세우스의 빛나는 두 눈은 더 이상 허약한 피유혹자의 모습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세 명의 세이렌 자매의 형상들도 강력한 목소리의 힘으로 오디세우스를 지배하는 치명적인 유혹자의 모습이 이미 아니다. 특히 최하단부에서 뱃전을 타고 오르려는 세이렌의 몸짓은 차라리 오디세우스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갈망을 이기지 못하는 매혹된 자의 육체를 보여준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이렇게 쓴다: “오디세우스의 성공 이후 뒤에 남은 세이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해서 신화는 아무 것도 전하는 바 없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어낸 뒤에 스핑크스가 죽고 말았듯 세이렌들 역시 죽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드레이퍼의 회화는 아도르노와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는 것 같다: 세이렌들은 그 후에도 죽지 않고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그러나 더는 자신만만한 유혹이 아니라 간절히 요청하는 애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제발 내 목소리를 기억해 달라고, 제발 내 노래를 들어 달라고...
'문학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빠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0) | 2011.01.14 |
---|---|
이승훈<선禪과 마그리트 Rene Magritte> (0) | 2011.01.01 |
백현국<창작의 기본 태도> (0) | 2010.12.26 |
파블로 네루다 「추억」 (0) | 2010.12.15 |
유제원 <'천의 얼굴을 한 영웅' 이윤기, 신화 속으로 사라지다> (0) | 2010.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