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문예지에 발표한 비평문

미송 2011. 2. 26. 07:59

 

신예 비평가 금은돌이 선정한 10편의 시와 작품론



손현숙,「손」(『문학과 사회』, 2009년 겨울호)

강성은,「안녕 나의 외계인 아기」(『한국문학』, 2009년 겨울호)

진은영,「갇힌 사람 -기형도에게」(『애지 』, 2009년 겨울호)

이혜미, 「비취」(『현대문학』,  2009년 12월호)

박연숙,「서른 세 개의 부리를 가진 새 - 우아한 관계」(『서시』,  2009년 겨울호)

하정임,「겨울의 이마」(『현대시』, 2009년 12월호)

김승일,「화장실이 붙인 별명」(『세계문학』, 2009년 겨울호)

김민정,「제 이름은 야한입니다」(『창작과 비평』, 2009년 겨울호)

김혜순,「안경은 말한다」(『문학과 사회』, 2009년 겨울호)

이근화,「그물의 미학」(『작가세계』, 2009년 겨울호)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할 수 있는 일 찾기


2009년 겨울호 문예지에 실린 시를 훑어보다가 손가락이 멈칫거린다. 왜 내 손가락이 여성 시인들의 시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손현숙, 강정은, 진은영, 이혜미, 하정민, 박연숙, 김민정, 김혜순, 이근화, 그리고 수동적인 적극성이 두드러지는 시편이 돋보이는 김승일(유일하게 남성 시인이다. 애초에 성별을 구분하려 들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 이런 시들이 연못 위 수련처럼 떠올랐다) 이렇게 10명을 골랐다.

  

듣는다, 그녀들이 말하는 소리를. 바라본다, 그녀들이 걸아 간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녀들이 사유한 흔적을. 불러준다, 그녀들이 이름 불러준 세상을. 2009년이 에둘러 사라지는 끝자락에서 나는 시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모은다. 잔치에 초대받는다. 기꺼이 축제를 즐기러 맨발을 담근다. 그녀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경계에 매혹적인 음악이 흐른다. 그녀들의 공간은 타자를 품으며 색다른 빛이 난다. 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엉뚱하고 낯선 곳에 이르러 있다. 직선이 아니다. 간혹, 지상 위에 있다가 달의 표면으로 착륙을 하기도 한다.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품을 줄 알고, 2차원의 평면을 겹 구조의 복합 공간으로 치환시킨다. 부재하는 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결합하다가 때로는 결별한다. 부재의 공간을 환상으로 채우고, 사라져가는 사물과 죽어간 이들을 불러들인다. 이들은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줄 아는 시인들이다. “하나의 낱말은 또 다른 낱말을 끌어들”이고 “자신이 몽상하는 하나의 낱말에서 눈사태 같은 말이 나오게”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할 줄 아는 이들이다. 조용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시인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1. 단어와 사물 사이에 틈을 벌리기


  사진 속 그 남자의 손은 예리하다


  자코메티 조각처럼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는 아직도 우리의 들숨 날숨을 기억하는 듯 연기 사라지는 쪽으로 그의 눈길도 하염없다 칼금처럼 그어진 미간의 주름, 울음을 삼켜버린 사막 같은 저 눈빛, 막막한 표정과 소용없이 흘러가는 시선 그 끄트머리쯤에서 나 살면 안 될까


  담배는 그의 또 다른 손가락 빨기, 배냇짓이다 자기가 자기를 감각하는 최초의 몸짓. 최후의 몸부림 내 몸은 저 손을 기억한다 마음보다 먼저 도착해서 마음보다 먼저 나를 알아차린 저 길고 가느다란 비수, 스칠 때마다 나를 베고 다시 살려놓았다


  그가 내 뱃속에서 몸을 한 바퀴 틀었다


  내 사진에 담겨 침묵하는 동안에도 무럭무럭 자라 내 복부를 찢는다 나는 이제 그를 도로 낳아야 한다 내가 앞섶을 헤치고 젖을 물리기 전, 그의 촉수에 걸려 엄마가 되기 전, 태를 자르고 도망쳐야 한다

              - 손현숙,「손」(『문학과 사회』, 2009년 겨울호) 전문


   손현숙 시인은 공간을 만들어나간다. 그녀의 공간은 딱딱하고 고정된 평면이 아니다. 시인은 농축된 시간과 몸에 간직된 기억을 타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우선 사진을 바라보는 것부터 출발한다. “칼금처럼 그어진 미간의 주름” “울음을 삼켜버린 사막 같은 저 눈빛”을 본다. 그녀가 주시하는 것은 사진 속 “남자의 손”이다. “자코메티 조각처럼” “가늘고 긴” “손은 예리하다” 시인에게는 사진 속 손가락은 접속 코드이다. 리좀의 형태로. 뿌리가 아니라 풀씨의 형태이다. 시적화자는 “사진 속 그 남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다. 시인은 그 남자 곁에 머물고 싶다. 단지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그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막막한 표정과 소용없이 흘러가는 시선 그 끄트머리쯤에서 나 살면 안 될까”라는 소망을 담는다. 시인은 그 남자에 대한 사사로운 정보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 담배 피는 행동이 정신분석학적으로 “손가락 빨기 배냇짓”이라는 분석을 마친 상태이다.

   그의 욕망을 알아챈 시적화자는 그의 여성이자, 그의 어머니가 된다. “배냇짓”하는 손가락에 유혹 당한다. “몸은 저 손을 기억”하고 “저 손”을 감싸안아주고 싶다. “저 손”이 까닥이면 모든 것을 주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그것을 알기에 남자의 손가락은 “비수”이다. “손”이 “비수”가 되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비약한다. 손은 사랑의 징검다리이다. 손은 그를 내 안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첫 단추이다. 손은 본능적인 욕구로 불타오르는 원시적 충동이다. 손은 동물적 사랑의 원동력이다. 시적화자는 가슴이 저리다. 그가 던진 한 마디에 온 하루가 흔들리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심장이 떨린다. 가녀린 손가락은 “스칠 때마다 나를 베고 다시 살려” 놓는다. 드디어 평면 “사진”을 뚫고 나온다. 


   그가 내 뱃속에서 몸을 한 바퀴 틀었다


   4연을 단독으로 떼어놓으며 순간, 차원이 달라진다. 단 한 줄, 단 한 행으로 그를 몸 안으로 들여놓는다. 비현실적 공간이다. 어떻게 그 남자의 손가락이 시인의 뱃속에 뚫고 들어왔는지 설명이 없다. 그 남자는 그녀의 뱃속에서 “몸을 한 바퀴 틀었다” 일치하면서 어긋나고, 어긋나면서 화합하고, 충만하면서도 결핍된 사랑의 동작이리라. 시인은 이 장면에서 평면적인 공간을 입체로 일으켜 세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잉태하듯이, 새로운 공간을 품는다. 그러나 곧 흔들린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흔들림은 치명적이다. 그 손가락에 이끌려 자신의 몸을 열었던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도망”이다. 사랑은 여인을 어머니로 변화시킨다. 모태로 회귀하는 행위로 귀결된다. 사랑의 판타지가 끝나는 순간, 타나토스적인 고통이 다가옴을 직시한다. 이때 “어떻게 빠져나갈까!”(「판옵티콘」, 『문학과사회』, 2009 겨울호) 궁리한다. 리좀은 낯선 영역으로 탈중심화 시킨다. 통일성을 거부하며 다른 영역으로 침투한다. 하나의 지점에 귀결되지 않는다. 시적화자는 “그를 도로 낳”으려 한다. “내 복부를 찢는다” 자신의 몸을 열은 뒤, 닫고자 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내가 앞섶을 헤치고 젖을 물리기 전”까지이다. 그렇게 폐쇄 결정을 내린다. 그 흔적이 바로 “사진”이었다. 시인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추억을 되새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 병원에 갔다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는 아기가 나올 모양이라고 했다 임신이라뇨 그럴 리가 없는데 의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아직 나오려면 멀었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곤 간호사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는 순간 공처럼 둥근 내 배가 조금 무서워졌다 그리고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아 두려워졌다 지난밤 외계인에게 납치되기라도 한 걸까 이렇게 순식간에 배가 불러오다니 그러는 사이에도 배는 점점 더 불러왔다 외계인 아기가 나올까 봐 나는 무서워 울부짖었다 달려온 의사는 귀찮다는 듯 그럼 지금 수술을 해서 떼 내어 버리자고 말했다 나는 그 의사가 더 무서웠다 메스를 들고 내 배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밖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다 나는 달리면서도 점점 배가 불러왔다 걱정 마라 내 아기 네가 외계인이라도 나는 너의 엄마가 되어줄 테니 나는 배를 만지며 울먹였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내 두 발은 공중으로 붕붕 날아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내 뱃속에 아기가 들었는데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니 나는 조금씩 더 위로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풍선처럼 떠올랐다 세상에 내 뱃속에 있는 너는 외계인이 틀림없구나 나는 내 아기의 별에 도착해 뻥 하고 터질 것이 분명해 그러나 이상하게 내 마음도 몸처럼 가벼워졌다 하늘 위에서 아래를 보니 불빛이 서서히 켜지는 저녁의 도시도 아름다워 보였다 안녕 지구 나는 이제 다른 별로 간다 어둠 속에서 달이 내 손을 슬며시 끌어당겼다

     - 강성은,「안녕 나의 외계인 아기」(『한국문학』, 2009년 겨울호) 전문


    강성은의 발상은 깜찍하다. 발단은 “임신”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배가 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증세 때문에 산부인과에 간다. 몸 안에 부풀어 오르는 정체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태도는 냉정하다. “메스”를 들고 언제든지 뭇 생명을 베어낼 수 있다. “배를 툭툭 건드리고” “언제든지 떼 내어 버리자고” 말한다. 그들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잔혹함 앞에 당황한다. 문제는 이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른다는 사실, 즉 무지(無知)는 시인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정체성의 혼란이다. 모른다는 사실(無知)은 시적자아를 공포의 상황으로 내몬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아이를 위협하는 외적현실은 두려움으로 탈바꿈한다. 시인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이다.

   이때 강성은은 “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아이를 “외계인 아이”라고 명명한다. “걱정 마라 내 아기 네가 외계인이라도 나는 너의 엄마가 되어줄 테니” 시적 화자는 책임감에 부풀어 올라 병원을 탈출한다. 위기의 상황에 환상적 상상력이 끼어든다. 마술적 사건이 벌어진다. 이 상상력은 상황을 역전시킨다. 시인은 점점 가벼워진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풍선”처럼 떠오르고 몸과 마음도 가벼워진다. 공중부양이다. 시인은 아예 저 멀리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올라간다. 그곳에서 보니, “달이 내 손을 슬며시 끌어” 당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달의 아이를 가진 것이었다.

   강성은도 손현숙처럼 무엇인가를 품는다. 그녀의 임신은 심각하지 않다. 발랄하고 위트가 넘친다. 거기다가 약간의 스릴도 있다. 그녀의 임신은 자리바꿈을 유도한다. 시인의 위치를 지상에서 우주로 옮겨 놓는다. 안을 뛰쳐나와 바깥으로 벗어나고, 세상의 냉정한 손을 뛰어넘어 달의 손을 붙잡는다. 애초에 “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것은 “외계인 아기”였을 수도 있고 “풍선”이었을 수도 있고 상상임신이었을 수도 있었다. 여성의 책임감이 차원을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인의 상상력이 생명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은 어머니와 아이처럼 상호 교감하면서 서로를 보완한다. 한 몸에 두 생명이 자라는 공간. 말을 통하지 않고도 몸으로 소통 가능한 세계이다. 여기서 주체는 대상을 일방적으로 이끌거나 진두지휘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아이의 반응을 살핀다. 아이의 발차기를 감지하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어주어야 하는 떨림의 공간이다. 상대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의 공간이다.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주는 가운데 앞으로 다가올 카오스를 견뎌낸다. 카오스를 견디는 힘은 주체가 타자를 끌어안는 힘에서 나온다. 주체는 수많은 나로 갈라진다. 나의 나로, 다른 나의 나로, 나를 넘어선 나로, 겨울 속에서 무수히 반복하며 갈라지는 영상처럼 변화한다. 타자와 교감하기 위해서는, 변화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나를 분화시키고 나를 해체해야 한다. 다의적인 주체는 언제든지 물러나고, 부서지고, 파편화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 변화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그는 내 안에 갇혔다

그리고 슬픔은 그의 안에 갇혔다

그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원의 좁은 나뭇잎들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사다리로 올라가

하늘을 뜯어버렸다, 구멍을 막아놓은 판자처럼

빗방울

혹은 별과 검은 빛이 쏟아질 테고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뜯지 않은 서류가

쌓여있고 오후의 햇빛은 빛났다

그가 가는 곳을 신경 쓸 겨울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흘러나와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를 적셨지만 내 탓은 아니다

그런 저녁이면 참

이상하기도 하지, 돌계단에 앉은

그의 곁에서 늙은 개가 축축한 밤의 뺨을 핥는 것이다

달이 조각칼로

지나가는 날들과 죽은 나무들의 껍질을 벗긴다

환하게, 문득

은빛 기둥이 드러난다


아 그렇군, 아주 오래 전

나는 어둡고 부드러운 세월과 결혼한 적이 있다

자두나무 두 그루 사이에 걸린

희미한 기타소리 같은 얼굴

그 세월이 데려온 슬픔의 의붓자식

모든 청춘이 살해된 뒤에도 살아남을

비명의 공증인, 그는

내 안에 갇혔다

     - 진은영, 「갇힌 사람 -기형도에게」(『애지』, 2009년 겨울호)


    진은영은 죽은 사람을 가슴에 품는다. 시인 기형도이다. 89년도에 대학에 들어간 시인은 89년도 3월에 죽은 기형도 시인에 대해 특별한 자의식이 있는가 보다. 진은영은 부재하는 그를 현실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불러들이는 방법은 그를 “내 안에” 가두는 것이다. 기형도는 진은영 시인에게 “어둡고 부드러운 세월”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희미한 기타소리 같은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하다. 시인은 겹의 구조로 기형도를 가둔다. 가슴에 기형도를 가두고, 진은영의 가슴 속 기형도는 그의 가슴 안에 슬픔을 가둔다. 그러니 진은영은 기형도의 슬픔까지 더불어 가둔 셈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그를 떠올리며, 기형도의 감성과 시적 발상을 감지한다.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기형도는 갇혀 있지만 갇혀 있지 않다. 그는 진은영 시인 내면의 심리적 작용 선(線)을 건드린다. 시인이 걸을 때 함께 걷고, 별을 바라볼 때 함께 바라본다. 시인은 미세한 감정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기형도와 긴밀하게 접속한다. 어느 곳에 가면 그가 어떠한 상상을 하는지 짐작이 가능할 정도다. 기형도는 시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순간 그와 연결되던 접속코드가 끊어진다. 시인은 바빴고, 내면에서 그와 대화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고 변명한다. 그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지만, 일상에 파묻힌 그녀는 그의 짐작을 따라가지 못한다.

   문득, “그의 곁에서 늙은 개가 축축한 밤의 뺨을 핥는” 장면을 본다. 시인의 내면에 갇힌 기형도가 현실 바깥으로 걸어 나와 “돌계단”에 앉아 있는 것이다. 안과 바깥이 뒤집혀지는 순간이다. 분명 안에 가두었는데, 그가 어떻게 현실적인 공간인 바깥으로 뛰쳐나올 수 있는 것인가. “돌계단”은 현실적인 공간에 놓인 환상적인 공간이다. 환상 속에서 시인은 “은빛 기둥”을 본다. 잊은 줄 알았던 기형도 시인의 시 정신을 재발견한 것이다. 

    “은빛”은 시인을 깨달음으로 이끈다. “아, 그렇군” 시인의 마음속에 그의 “얼굴”이 도화선으로 살아있던 게다. 그의 눈동자가 내면에 박혀 시인을 지켜보고 있던 게다. 시인은 기형도와 정신적으로 “결혼”을 했음을 기억해낸다. 진은영을 시인으로 이끌었던 선배 시인의 영혼이 시를 쓰게끔 했던 자극제였던 모양이다. 진은영은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다시 감금한다. “모든 청춘이 살해된 뒤에도 살아남을” 상징일 테니까. 진은영은 “나”가 “타자”를 품고 있다가 “타자”를 바깥으로 꺼내 놓는다. 그리고 바깥에 꺼내 놓은 타자를 다시 안으로 품어낸다. 그 과정에서 시적 주체 역시 “나”이였다가, “나”를 잃어버린 껍데기였다가, 원래 “나”로 되돌아온다. 이때 마지막에 되돌아온 “나”는 더욱 단단해진 시적자아가 될 것이다. “타자”와 결속이 더욱 두터워졌을 게다.




2. 경계에서 이름을 불러주는 방식들




    겨울이 깊어가니 눈이 내렸고, 밤이 깊어가니 애인이 찾아왔고, 사랑이 깊어가니 이마가 따가웠다


  하루에 열다섯 번씩 심심해진 애인과 이마를 붙이고 잠이 들고, 우리는 차이도 없이 솜털 같은 입김을 나누고, 도망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엮었다 창밖에는 흰 눈이 쌓이는데 우리는 이웃도 기약도 없이 애인이 되었다


  아득하고 서러운 식물이 키를 높일 때 방 안에는 우리의 웃는 얼굴이 방생 되고, 푸른 곰인형에게도 심장이 생길 듯했다 라디오에서 시대의 가난을 이야기할 때 더 가난한 우리는 서로의 발목을 끊어 서로를 먹이고 배가 부르게 쌓인 흰 눈을 이야기 했다


  우리의 행성이 태양에 가까워지자 행성의 기울어진 이마에서 미처 눈이 녹기 시작했다 우리는 발자국이 남은 눈 위로 서로의 독해진 눈빛을 자주 풀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곧 없는 발목으로 떠나지도 못하는 방에는 식물의 이마 같은 떡잎이 떨어졌다 봄이 오거나 여름이 오거나 할 것이었다 발목도 눈도 없이 뜨거운 이마도 버린 채 우리는 그 방에 갇혀 울었다

             - 하정임,「겨울의 이마」(『현대시』, 2009년 12월호) 전문


    하정임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를 가정한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결합이다. 방 안에서 서로의 “다리를 엮”고 “이웃도 기약도 없”는 “애인”이 된다. “애인”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폐쇄 상태에 들어간다. “눈이 내렸고” 애인과 있는 방은 “밀폐”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하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랑을 위해 도망가지 않으려고 선택했던 엮음이 오히려 그들의 자유를 방해하는 수갑이 된다. 현실 도피로 맺어진 사랑이 파멸의 길을 재촉한다. 강렬한 타나토스의 충동이 시 전체 어조에 흐른다.

   그들은 “서로의 발목을 끊어 서로를 먹”인다. 바깥에는 “배가 부르게” 눈이 쌓였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가난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림의 떡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짐이 되어간다. 눈 내리는 겨울, 자신들이 걸어왔던 사랑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서로의 발목을 먹는다.

   발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길이다. 발은 사랑이 끝났을 때 떠날 수 있는 도피의 출구이다. 타자 앞에 맨발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를 향한 사랑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발은 성적(性的)인 상징이다. 발목을 먹었다 함은 그들이 육체적 결합을 했다는 뜻이다. 사랑의 기억을 먹고, 그들의 몸짓을 먹고, 그들의 영혼을 먹고, 그들의 추억을 먹었다는 의미이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 태어난 크로노스가 왕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먹어치우듯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을 베어 먹었다는 것이다. 권좌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권좌를 빼앗기게 되듯, 그들의 사랑은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그들은 “그 방에 갇혀 울었다” 다른 대안이 없는 꽉 막힌 상태. 그 방은 그와 그녀를 가두며 끝을 맺는다.

   왜 그들의 사랑은 탈출구를 찾지 못했을까? 그것은 새로운 이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흐름이자 관계맺음의 변주곡이다. N극과 S극의 본능적인 끌림이고 끌림이 넘칠 때 도망치는 강렬한 밀어냄이다. 관계는 수시로 비틀어진다. 만남과 헤어짐, 화합과 결별이 꽃처럼 피고 지며 불안정한 지뢰밭이 된다. 사랑에 빠지면 그녀는 그의 그녀가 되고 그는 그녀의 그가 된다. 그가 그를 끝까지 밀고나가다가 보면 그는 철없는 아이가 되고, 그녀가 그녀를 끝까지 밀고 나가다가 보면 그녀는 젖을 물리는 어머니가 된다. 그였다가 그대였다가 남편이었다가 아빠였다가 친구로 변화한다. 사랑은 변화무쌍한 이름을 원한다. 이름을 불러주는 방식은 시의 속성과 동일하다. 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불러들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 역시 새로운 이름을 부르며 거듭났어야 했다.


구름 한 장을 타자기에 넣고 키보드를 두드리자 당신은 자욱한 안개의 세기로부터 탈옥하기 시작한다 내가 검은 새의 말로 말라가는 나와 헤어지는 일, 손가락에서 번져간 허구의 플롯으로 새는 자신을 깨우는 비밀을 알고 있다 하늘을 풀며 날아가는 위기의 전반부는 틀에 박힌 지문을 던져 놓는다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각성 상태의 거울이 노크하듯 두드리며 애무하는 키보드 A,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문자마다 별 볼일 없는 구름의 일대기가 닿아 있다 당신을 인용하다 거들먹거리며 활짝 피어난 문장들을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는다 구름을 아주 잘 알게 되자 새는 그것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새가 아니어도 되는 그렇고 그런 기호가 되었다


  다만 나는 타자기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가끔 비상을 꿈꾸지 않는 싱싱한 문장을 꺼내들 뿐이다

     - 박연숙,「서른 세 개의 부리를 가진 새 - 우아한 관계」(『서시』, 2009년 겨울호) 전문


   박연숙의 시는 떠나기 위한 포즈를 취한다. 이별에도 이유와 변명이 필요하다. 박연숙 은 타자와 교감하기 위해 “타자기”를 끌어들인다. 시인은 “구름 한 장”을 하얀 종이처럼 타자기에 집어넣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타자와 관계 시나리오를 나름대로 작성하고 있다. 그러나 충돌이 벌어진다. 그가 짠 시나리오와 내가 짠 시나리오가 서로 다르다. 두 사람이 하나의 그림을 그리며 합일하지 못하였다. 두 개의 시나리오로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는 “탈옥”하기 시작한다. “탈옥”이라 함은 그와의 관계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한다. 시인은 말라간다. 그와 소통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통 단절은 시인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검은 새의 말”이란 타자와 소통이 안 되고, 내 안의 나와도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그들은 타성에 젖어 있다. “틀에 박힌 지문”으로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눈에 보이듯 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성에 젖은 “구름의 일대기”는 매력을 상실한다. 그 곁에 누가 남아있을 것인가? 그와의 관계에서 의무감이나 책임감은 애초에 형성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시적화자는 내 안의 나와도 헤어지기 시작한다. 작별을 준비하고 있다. 타자 앞에서 “새”가 아니어도 되는 평범한 존재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제목처럼 “우아한 관계”로 남겠다는 것이다. 서늘하고 냉정한 우아함이다. 이별의 방식을 우아한 포즈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여전히 “타자기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별 뒤에 찾아오는 쓰라린 문장으로 지나간 사랑을 추억한다. 역설적이게도 “싱싱한 문장”으로.

   사랑은 서로에게 특별한 이름을 부여해 왔다. 그녀는 그에게 한 마리 새였다.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녀는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녀는 “새”가 아니어도 되는, “그렇고 그런 기호”가 되겠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별을 선언하며 이름을 버렸다.

      

  그가 물관을 꺼내 내 손금에 심어주었네 비취, 입술을 오므리며 먼 나라의 푸른 돌을 불러. 윗입술부터 차오르는 바다, 그 출렁이는 숨을 당겨 맡으면 차갑고 청녹색의 것들이 부드럽게 밀려들어 단단한 심장을 쓸고 지나갔네 뜨거운 입김도 없이, 살얼음으로 짜여진 구름을 나누어 덮고 우리는 서로의 내內를 궁금해하다 잠들었지


  이름을 훔쳐가줘. 떠나는 계절 대신 가장 아름다운 얼음의 장신구를 줄게


  오래 머문 것들은 제 몸에 캄캄한 빛을 새긴다. 물관에서 흘러나온 푸른 파문들이 외로운 가지에 스며들어 얼어붙은 핏줄마다 현을 켜는 악기가 되려 하는가. 이제 곧 봄이 열릴 텐데. 떠나는 길보다 돌아오는 걸음이 더 낯설어질 때, 나무는 저 홀로 백야에 있었네. 손닿자마자 녹아드는 푸른 꽃잎


 그를 위한 두 개의 이름을 가지려네

 쓰러져 바깥이 되는 것들을 위해.

 일렁이는 손금마다 길을 잇대며

                - 이혜미,「비취」(『현대문학』, 2009년 12월호) 전문


   이혜미의 시는 사랑의 입구에 서 있다. 그 시작은 사뭇, 과감하다. 타자가 “물관을 꺼내 내 손금에 심어” 준다. 나무의 뿌리를 통째로 옮겨 심는 방식이 아니라, 꺾꽂이 형태로 어느 중간 지점을 연결 접속한다. 여성 시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타자와 접속한다. 그리고 그것을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몸 안에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감각을 열어젖힌다. 그 안에서 화학적 변화를 감각적으로 전이시키며 파장을 일으킨다. “물관”을 “손금”에 심어주었더니 풀씨처럼 떠돌던 관계가 변화한다. 새로운 영토가 발생하면서 시의 영역이 확장된다. “물관”이 “손금”에 스며드니, 몸이 달라진다. “윗입술부터” 바다가 차오르고 “청녹색의 것들”이 심장을 쓸고 지나간다. 그러나 여전히 탐색 중이고, 신경전이다. 거부하면서도 끌리고, 유혹하고 싶으면서도 도망친다. 겉으로는 “살얼음으로 짜여진 구름을” 덮고 있다. 안정된 관계가 아니다. “물관”이 “손금”에 전이되었으므로 이들은 끊임없이 속“내內를 궁금해” 한다.

   시인은 떨어져서 바라본다. “저 홀로 백야에” 있던 “나무”를. 그 나무를 바라보며 뒤늦게 사랑이 휘몰아쳐 옴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차갑게 대해왔던 “얼음의 장신구”를 벗어던지고 그를 향한 “악기가” 되고 싶다. 시인은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사랑의 입구에서 서성대던 시인은 “물관”이 접속되는 순간부터 그에게 쏠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타자는 주체를 변화시킨다. 사랑의 손길이 타자의 마음을 녹였을 것이다. “손닿자마자 녹아드는 푸른 꽃잎” 타자로 인해 변화된 시인이 다시 타자를 변화시킨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이지 않다. 주체와 타자는 시시때때로 변화 가능하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며, 낯선 길이 보인다. 시인은 “쓰러져 바깥이 되는 것”과 “손금”에 닿았던 “길을 잇”댄다. 사랑이 시작될 테니까.

   여기서 이혜미는 “그를 위한 두 개의 이름을 가지려네”라고 말한다. 왜 두 개의 이름이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시인이 고정되기 않기 위함이다. 언제든지 변화 가능한 이름, 한 점으로 고정되지 않고 겹의 공간으로 사랑을 품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시멘트를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수건걸이를 설치할 때. 가능성에 못이 박혔다. 이봐, 가능성 기분이 어떤가? 가능성엔 기분이 없었다.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타일은 간격을 원했다. 물은 간격을 타고 하수구로 간다. 천천히. 동생이 샤워를 하면서 오줌을 눈다. 변수로군. 나는 동생을 변수라고 불렀다. 이봐, 간격에게 사과를 하지 그래? 변수는 배신이었다.


  엄마는 변기에 앉아 거실을 바라보았다. 왜 문을 열고 싸는 거야? 텔레비전이 하나잖아. 아빠는 거실이었다. 부모가 죽자. 변수에게 거실은 학교였다. 변수는 급식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형이 학교에서 돌아와 학교로 들어오면 변수는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형은 자꾸 지각이었다. 거실이 사라지고 있었다.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아무도 화장실을 청소하지 않았다. 네 달이 흐르고 변기에서 쥐가 튀어나왔어. 그렇다면 변기는 수영장이로군. 다섯 달과 여섯 달을. 나는 행진이라고 불렀다.


  지각은 지각인데도. 쥐가 무서워서 똥을 누지 않았고. 나는 화장실이라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다시 행진. 이제 나는 캄캄한 창고 같았고. 학교가 된 거실처럼. 간격은 변수 같았다. 이봐, 수영장. 창고 안에 고여 있는 기분이 어떤가? 똥이 없어서 쥐가 죽었어. 가능성에게 화장실을 맡기고, 굶어 죽은 쥐를 보러. 나는 창고에 갔다. 캄캄한 가능성 위에 부모처럼 누워.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 김승일 「화장실이 붙인 별명」(『세계문학』, 2009년 겨울호) 전문


    김승일은 이름을 불러주는 방식에 따라 변화되는 상호작용을 단박에 보여준다. 김승일 은 새롭고 낯선 방식의 호명을 통해서 색다른 욕망을 드러낸다. “시멘트”를 “가능성”이라 부르자, “시멘트”는 새로운 속성으로 탈바꿈한다.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라는 전제를 단다. 그 전제 하에 돌연 “시멘트”는 “가능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시멘트”가 문득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돌변하여 꿈틀거린다. 2차원적인 물질이 생경한 차원으로 일어섰을 때, 그 물질이 만든 공간은 낯선 세계로 진입한다. 새로운 길이 열린다. “동생”은 “변수”가 되고 “간격에게 사과”하지 않은 대가로 “배신”이 된다. 그 다음부터 모든 상황은 복잡하게 꼬여간다. “아빠”는 “거실”이 되고 “거실”은 “학교”가 되고 “시간”은 “행진”이 되고 “나”는 “창고”가 되고 “변기”는 수영장이 되고, 다시 “창고” 안에 “변기”가 갇히고 “가능성”에게 “화장실”이 맡겨지고 “나”는 동생 “배신”을 기다리고 있다. 안을 따라 걷다가 어느새 바깥과 만나는 뫼비우스 띠와 같다.

   김승일은 호명 방식에 따라 사물이 또 다른 사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름과 이름끼리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즐긴다. 호명 방식에 따라 변주되는 사물들을 다양한 차원으로 연결접속 시킨다. “자신의 단절을 행하고 스스로 자신의 도주선을 내고 자신의 비평행적 진화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7쪽)

   이러한 시적 진술 방법은 「빗속의 식물」(『문학과사회』, 2009년, 겨울호) 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꽃을 말하면 꽃 대신 숲이 떠오르고” “꽃, 하고 다시 말하면 나무가 된다”  “꽃, 떠오른 적 없으니 게워낼 필요 없고” “소문과 기억은 밀림이 된다” 김승일은 하나의 이름 주변에 파장을 일으키며 다른 이름을 불러들일 줄 안다. 이름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연상을 재촉하며 또 다른 이름을 등에 짊어진다. 이름은 이름을 부르고 낯선 파장을 가진 시적 상황을 끌어들인다. 이름은 시적 공간을 재영토화 하는 깃발이다. 새로운 깃발을 꽂으며 낯선 이름을 얹어 놓았을 때, 그 상황은 또 다른 이름으로 시의 방향을 바꾼다.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느냐에 따라 이름이 배치되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을 게다. 그 이름들이 타자가 되어 시인의 세계를 간섭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했던 무의식을 발견한다. 


한 시인의 시집이 인쇄되고 있었다

불교방송에서 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에게

고가의 만년필을 선물하는 여승도 있다 했다

한 시인의 시집이 채 다 인쇄되기도 전에

시인보다 앞서 새 시집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내가사라는 절입니다

시집 100권 주문합니다

주소 불러드릴게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 553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받는 사람에게

야한 스님,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그로부터 스님과

몇통의 문자메씨지를 주고받았다

밀양 하면 다들 전도연으로 압니다만,

내가사는 여자가 머물기에 참 좋은 절이지요

한번 놀러오라 그리도 말씀하셨으나

아직 스님을 떠올리면 야한이니

아직 갈 때가 아닌 듯해 나는 차일피일이다

      - 김민정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창작과 비평』, 2009년 겨울호) 전문


   김민정의 이 시 역시 이름을 불러주는 방식의 한 사례이다. 김민정은 샤우트 창법으로 자기 안의 감추어야 할 부끄러움이나 성적 욕망을 검열-최소한의 검열이 있겠지만 - 비교적 거침없이 쏟아낸다. 시인은 스님에게 “야한”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시인은 “내가사”의 주소를 정확하게 기재하면서도, 스님의 법명은 밝히기를 거부한다. 첫인상이 인이 박혀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이름. 김민정은 이름을 통해 타자를 밀어내고 있다. 열림 대신 닫힘을 선택한다. 시인 내면에서 그 스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근거가 이름 때문이다. “ 몇통의 문자메씨지를 주고받”았음에도 무상 무욕 무심해야 할 스님의 한마디는 다른 어떤 발화보다도 에로틱하게 전달된다. “여자가 머물기에 참 좋은 절이지요” 이 발화는 복합적으로 해석된다. 시인이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에 스님의 발화는 유혹의 메시지로 해석된 것이다.   

  

   이름은 새로운 관계로 접어들기 위한 시적 장치이다. 이름은 경계를 넘어서는 돌파구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징검다리다. 이름은 경계 바깥에 존재하던 것을 시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실천이고 자리가 모호한 것들을 재배치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름은 부재의 공간을 채우는 환상의 낱말이다. 이름은 타자에게 스며들기 위한 유혹의 손길이었다가 타자를 몸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사랑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름은 사랑을 붙잡아두기 위한 마지막 절규가 된다. 이름은 팽창하고, 변화하고, 생성하고, 소멸하고, 흩어지는 것들이 남긴 발자국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름은 타자와 자리바꿈을 하기 위한 포석이니까.




3.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눈 뜨고 그냥 있다. 난 안경이니까.

결코 무엇을 보는 법도 없다. 난 그저 안경이니까.

저 화덕 위의 키조개가 뭘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있다.

더더구나 나는 눈을 감을 줄 모르니까.

나는 얼음을 먹는 시간과도 같다.

먹고 나면 뭘 먹었는지도 모른다.

모래가 파도를 갉아 먹는 것과도 비슷하다.

또 파도가 몰려오니까.

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무색이다.

나의 왼쪽 눈앞엔 바다가 있고, 오른쪽 눈알엔 하늘이 있다. 그게 다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내가 있다. 그게 다다.

나는 바닷가에 묶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뗏목처럼 그냥 있다.

10년 후에 어디에 이을 거냐고 묻지 마라.

나는 그냥 있을 거다. 난 안경이니까.

아마 다리를 오므리고 누워 있을지도 모르겠다.

벗을 때나 입을 때나 나는 그냥 있다.

나한테 오는 사람은 왼쪽 하늘과 오른쪽 바다 두 개로 나누어져서 온다.

그러니 안경에 대고 말하는 건 난센스다.

제 귀에 대고 말하는 거와 같으니까.

내 앞에서 우리의 기억 운운하는 건 난센스 중에 난센스다.

그렇다고 내가 하얗게 눈먼 것은 아니다.

눈 뜨고 그냥 있는 거다. 멍하니란 말 참 좋다. 멍하니? 멍하다.

잠수부 아줌마가 있다.

25미터 산소줄을 잠수복에 매고

우주인 같은 철모를 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키조개를 줍는다.

하루 8시간 심해 속을 걸어다닌다.

3시간마다 바다에 매어놓은 배에 올라와 우유 마시고 빵 먹고

다시 모래를 뒤진다.

목줄에 묶인 검은 물개 같다. 피부는 미끈거린다.

키조개는 깊은 바다 밑 모래사막에 숨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곳. 키조개와 갈고리와 산소줄, 그리고 물안경이 있는 곳.

그리고 물안경 뒤에 아줌마가 있는 곳.

큰 얼음을 갈아 렌즈를 만든다.

그 렌즈를 입속에 넣어본다.

바다에 비 온다.

바다는 말한다.

나는 눈 뜨고 그냥 있다.

난 안경이니까.

   -김혜순, 「안경은 말한다」(『문학과 사회』,2009년 겨울호) 전문


  김혜순 시인은 노련하다. 김혜순은 시를 생산하는 관능적인 기계라 할만하다. 너무 노련해서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다가오는 반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시인은 철저히 타자가 된다. 그의 이름은 “안경”이다. 시인은 “안경”이라는 이름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본다. 제목 그대로 “안경”이 “말한다”. “안경”은 힘을 빼고 진술한다. 더 이상 과장할 것도 없고, 수식할 것도 없다. 건조한 어조와 문체로 진술을 해 나간다. 이 단순 명쾌함이 오히려 읽는 이를 긴장시킨다. 안경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무색이다.”

   시인은 클로즈업 된 정지 화면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 시야를 점차 확장해 간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에서 롱샷으로 바꾸어 나가는 기술인 풀백(pull-back)기능이다. 가까운 것을 촬영하다가 점차 뒤로 당기면서 촬영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좁은 부분을 촬영하다가 점차 넓은 부분으로 확대하면서, 갑자기 중요한 것이 포착한다. 이때 관람객은 그 새로운 장면으로 인해 심리적인 전환을 맞는다. 시적 진술을 해나가는 시인은 카메라를 이동차(dolly)에  기대어 덜컹거리지 않으려고 한다. 담담한 어조로 진술하는 방식이다. 이동차에 매달린 카메라처럼 시인은 건조하게 말한다. “난 그냥 있는 거다. 난 안경이니까.” 그러나 지극한 사실은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진술이 거듭될수록 시적화자인 “안경”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알 수 없게 된다. 알았다(知)고 생각하는 순간, 모르는 것(無知)이 된다.

   전개가 중반부를 넘어섰을 때 반전을 위한 중요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 잠수부 아줌마”이다.  “하루 8시간” 바다 속에서 일하고, “3시간마다” 배 위로 올라와 “우유”를 마시고 “빵을” 먹는 여인의 삶이다. “깊은 바다” “모래사막”에 숨어있는 “키조개”를 캐는 그녀의 고단한 삶이 조명된다. 시적화자인 안경은 다름 아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고단한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큰 얼음을 갈아 렌즈를 만든다.

그 렌즈를 입속에 넣어본다.

바다에 비 온다.

바다는 말한다.

나는 눈 뜨고 그냥 있다.

난 안경이니까.


  시인은 이 장면에서 연금술을 시작한다. “얼음을 갈아 렌즈”를 만들고 “그 렌즈를 입속”에 넣는다. 이 단순한 두 진술을 통해 마법은 일어난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 환상을 끌어들인다. “얼음”은 그동안 막혀있던 착각의 늪이다. 무엇인가 분명히 알았다고 믿어왔는데, 그것이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장막을 걷어낸다. 세상을 명약관화하게 바라볼 수 있는 “렌즈”를 만들어낸다. 이 “렌즈”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안경”과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나선형의 흐름을 타고 승화된 고차원적인 “안경”일 게다. 그 “안경”은 고단한 여인의 삶에 눈물 흘릴 줄 아는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눈물이 내린다. “바다에 비가 온다” “바다가 말한다.” 여기서 그동안의 사실을 뒤집는 반전이 일어난다. 언제나 눈을 뜨고 있던 바다가 바로 “안경”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바다”와 “안경”이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시적 공간을 넓히고 있었다. 두 개의 이름은 차원을 달리하면서 위치 전환하고 공간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일하는 여인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고 있었다.

  김혜순 시인은 “감성의 분할을 새롭게 구성하고 새로운 대상들과 주체들을 공동 무대 위에 오르게” 하여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12쪽)

  

피부를 통해 치즈나 마늘 냄새가 증발해서

우리는 오늘의 식사가 즐겁다

빵과 빵 사이에

토마토와 양파를 끼워 넣고 입을 벌린다


미세한 구멍들이

서로를 향한 호감과 증오로 서로 다른 크기로 벌어지고

서로 다른 질문들을 쏟아낸다


오렌지 농장 근처에서 실종된 유학생에 대해

점거농성 중인 노동자의 마스크에 대해

남편을 잃은 베트남 여인에 대해

그녀의 사라진 80만 원에 대해


빵과 빵 사이에 끼워 넣을 것이 많았다

우리는 입술을 오물거렸으며

눈시울을 붉혔으며

그리고 잠시 후 한쪽 입술을 실룩거리며 웃었다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처럼

피부 위로 물 같은 것이 잔인한 방향으로 흘렀다

너의 얼굴을 걸고 밥을 먹는다


그럴 때 내 구멍은 조금 아픈 것 같다

그럴 때 네 구멍도 조금 벌어진 것 같다

네 구멍은 조금 어두워진 것 같다


늙으면 머리가 커지고 엉덩이가 퍼지고 다리가 가늘어져

그럴 때 내 구멍이 내 구멍이 ……

너를 향해 인사를 하고

   - 이근화, 「그물의 미학」(『작가세계』, 2009년 겨울호) 전문


   평범한 일상을 고찰하는 이근화의 시. 이근화는 “오늘의 식사”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인은 식사를 하기 위해 “입을 벌린다” 당연히 입이라는 구멍을 벌리고 항문이라는 구멍을 통해 배설을 한다. 그러나 “오늘의 식사”가 목에 걸린다. 입을 벌릴 때마다 그 전에 보이지 않던 “미세한 구멍들이” 눈에 보인다. 혀는 즐겁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빵과 빵 사이에 끼워 넣을 것이” 많다. 불편한 진실들이다. 시인은 순간, 멈추어 선다. 그리고 생각한다. “오렌지 농장 근처에서 실종된 유학생”과 “점거농성 중인 노동자”와 “남편을 잃은 베트남 여인”에 대해. 진실들이 질문을 한다. 

  독자는 식탁 위에서 시인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는가? “빵과 빵 사이”에 벌여졌던 자본주의적인 착취를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서로를 향한 호감과 증오로 서로 다른 크기로 벌어지”는 구멍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그 누구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 먹이사슬 속에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구조를 “구멍”이라는 비유로 생각해 보자. 구멍이 구멍을 먹어치우고 구멍이 구멍에게 먹히고 구멍이 구멍에게 인사를 하고 구멍이 구멍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구멍이 구멍에게 돈을 갈취하고 구멍이 구멍을 위해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 사이엔 “얼굴”이 없었다. 타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지 않고 착취와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시인은 “얼굴”을 떠올리며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한다.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이데올로기와 하등의 상관이 없다.(들뢰즈) 어떤 맥락에 놓이고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로 이름 불릴 뿐이다. 그러면 무엇이 정치적인 것일까? 또 그 무엇이 정치적이 아니던가? 평범하고 고답적인 일상에 파고들어 식상한 것을 조금씩 어긋 내면서 새로운 흐름으로 만들어 가는 게  문학이 아니던가? 내가 내가 되었다가 나를 넘어선 내가 되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가 다시 내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시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타자를 만나고 타자를 안에 품고 타자를 만지고 합일하고, 타자와 결별하면서, 타자를 넘어서는 나. 바람 부는 쪽으로 잠을 자면서 새로운 곳으로 머리카락을 흩날릴 줄 아는 것이 시인 아니었던가? 어느 각도에서 두드려도 제각기 소리를 내는 오색 실로폰이 아니던가? “산문의 폐허”(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솟아오르는 게, 시어가 아니던가? 현실의 경계에서 부재의 틈을 발견하고, 경계에 스며들었다가 튀어나오고, 합일하였다가 도망치는 것들이 시 아니던가? 시공간에 새로운 구멍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시 아니던가?   


 문학이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결국 탈정체화, 즉 주체화의 형태, 해방가능성,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양창렬, 「랑시에르 인터뷰 : “문학성에서 문학의 정치”까지」, 『문학과사회』, 2009 봄호, 448쪽)


   2009년 한 해를 돌아보며 각 문예지에서 진행된 정치성에 대한 논의가 별로 새롭지 않다. 특이한 점은 시인 진은영 시인의 글(「감각적인 것의 분재」, 『창작과비평』2008년, 겨울호)에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평가들이 담론을 먼저 만들어나가지 않고, 시인이 던져놓은 씨앗에 담론으로 뒤따라가는 형국이었다. 비평 담론은 더디다. 담론이 오기 전에 이미 시인들은 이미 몸으로 직감적으로 “사회적 무의식을 해독”하고 “지배적 담론 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종류의 감각적 분배를” 가져오고 있었다. 가장 비정치적인 것 속에서 정치적인 것이 솟아오름을 몸으로 체득하며 천천히, 직감적으로 실천을 하고 있었다. 일상 공간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틈-구멍을 만들어 낯선 흐름을 꾀하고, 공간을 휘어 타인을 만나고 차원을 뒤집어 못나고 핍박받았던 “동물로 취급받았던 사람”을 무대에 올리 있었다. 때로는 달의 손을 잡고 떠오르기도 하고, 사진 속 그 남자를 몸 안으로 품었다가 뱉어놓기도 했다. 다양하게 중간 접속하며, 사물들의 간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자체가 시이고 문학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비평가들이 자크 랑시에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름 붙이며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