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어른들의 위선적인 세계가 싫어서 성장을 멈추어버린 소년.『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엔 나이를 먹지 않는 소년이나 소녀 하나 살고 있지요. 푸른 유리조각 같은 눈동자로 어른이 된 자신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소년. 착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던 시인이 다시 시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도 그 나쁜 소년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피카소가 그린 <청색시대의 자화상>은 가난하고 외로웠던 젊은 날의 초상을 담고 있는데, 그는 푸른색을 가리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표현했지요. 청색시대의 피카소 역시 추운 방에서 밤새 그림을 그리며 배고픔을 잊었을 거예요. 순결했던 그 시간들을 아프게 깨우치는 푸른 시 한 편.
문학집배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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