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여자, 정혜

미송 2011. 3. 27. 16:18
  여자, 정혜 (2005) This Charming Girl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차분하고 단아한 여직원 정혜(김지수)에게 어느날부터 한 남자가 수시로 찾아온다. 작가지망생(황정민)인 그는 매번 정혜를 통해 등기도 일반등기가 아닌 빠른등기를 보내기 위해 부탁을 하고 정혜는 등기를 화물포장하여 도장을 찍고 분류해준다. 이들의 만남은 이렇듯 공적이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여직원과 손님이라는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그가 우체국에 오는 이유는 출판사에 보낼 자신의 원고 때문이지만, 빠른등기를 보내기 위한 목적 외에 다른 뜻은 없다. 하지만, 우체국뿐 아니라 편의점이나 가게 앞에서도 종종 그를 보게 되자 정혜의 마음에 잃어버린 어떤 감정이 살아 숨쉬듯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사랑일까..

 

물론 정혜가 사랑을 못해본 건 아니다. 한창 우편업무로 바쁜 정오 무렵, 남자의 전화를 받고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나간 정혜. 큰 키에 준수한 외모를 하고있으며 세련된 도시인인 그 남자는 정혜가 사귄 적이 있고 잠자리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남자가 말한다. "나, 다음달에 결혼한다." 신혼여행 중 그에게서 아무런 말없이 사라졌던 정혜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해서였을까.. 결혼한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찾아왔다는 그 남자에게 정혜는 타인을 대하듯 어색함이 느껴진다.

퇴근 후 버스에서 회상에 잠긴 정혜, 호텔의 룸, 격렬하게 정혜를 벽으로 몰아붙이며 키스를 퍼붓고 다리를 더듬는 그 남자, 

"잠깐만,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만 있어."

정사 후, 침대에 누워있는 그 남자가 창가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말한다.

"처음 해봤을 때 어땠어? 섹스 말이야.."

"뭐 그런걸 물어보고 그래요."

"괜찮아, 우리가 남이야?"

"그런건 안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얘기해봐. 어땠어?"

"그냥 아팠어요."

 

 

 

 

사실, 정혜는 어릴 적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에 혼자 남게 된 정혜는, 집안을 방문한 어느 아저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그 이후 말수가 극히 드물어지고 타인과의 스킨쉽이나 신체 접촉을 꺼리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조용히 지내게 된다.

이런 그녀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희망이고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혼자가 되어버린 정혜의 아파트는 횡하다. 한 손엔 펜을, 한 손엔 담배를 들고 글을 쓰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늑함과 평화를 찾았던 딸이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더욱더 외로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의 반복은 정혜에게 삶의 공허함을 안겨주지만, 어느날 아파트의 조경을 목적으로 조성된 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고, 키울 작정으로 집에 들여놓는다. 하지만 정혜는 고양이에게조차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고양이 또한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몇날며칠이고 정혜는 단지 사료만 그릇에 채워주고 출퇴근할 뿐, 고양이는 소파의 아래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나른한 오후, 소파에 누워 단잠을 자는 정혜는 어머니의 꿈을 꾸게 된다. 발톱을 깎아주시는 어머니의 다정하신 모습.. 그런데 발이 간지럽다. 잠에서 깨어보니, 고양이가 자신의 발을 핥고 있다. 친구가 되어줄, 외로움을 달래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던 정혜에게 고양이는 드디어 친구가 된 것이다. 목욕을 시켜주고,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는 정혜는 작은 친구가 생겼다.

항상 남보다 먼저 출근하여 잠겨진 문을 열어놓는 부지런한 정혜의 우편업무는 오늘도 시작되었다. 어김없이 나타나 빠른등기를 부탁하는 작가지망생을 보자, 문득 그에게라면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도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혜는 용기를 내어 우체국을 나서는 그를 따라간다. 그의 앞에 서서 이런 말을 하는 정혜,

"저기.."

"뭐 잘못된 것이라도.."

"아니, 그게.. 오늘 저녁 저의 집에 오셔서 식사하지 않으실래요? 그냥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정말 고마운데요, 저 원고마감 때문에 지쳐 있어서.. 저 며칠밤 꼬박 세웠거든요."

"아, 예에.."

무안해서 돌아서는 정혜에게 그가 말한다.

"저기요, 갈게요."

 

굳어진 정혜의 안면 근육이 펴지고 한참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본다. 퇴근 후 곧장 반찬을 사러 마트에 간다. 오랜만에 이것저것 많은 반찬과 먹거리를 요리하느라 정혜가 바쁘다. 한상 잘 차려서 그를 기다리는 정혜.. 그러나 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바람 맞은 것인가? 서글퍼진다.

우체국에 출근한 정혜는 시종일관 우울하다. 퇴근 후,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작가지망생인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모른 척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는 정혜.. 선술집을 찾는다.

혼자 마시는 술은 적적하기만 한데, 옆자리에서 젊은이들이 말다툼을 하고 급기야 주먹다짐을 한다. 주먹질이 난무하는 가운데, 싸움의 원인 제공을 했던 남자가 정혜의 앞자리에 앉아 정혜가 마시던 술을 따라마신다. 친구들이 말려보지만 막무가내.. 남자를 버려두고 친구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앞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 남자를 바라본다. 많이 취해보인다.

그 젊은 남자와 모텔에 왔다. 가방에서 손칼을 꺼낸 그 남자가 술안주로 사온 사과를 깎는다. 껍질을 두껍게 깎아낸다. 사과 껍질이 안 끊어지도록 깎아보겠다는 그는 연신 껍질을 잘라먹는다. 많이 취해보인다.

잠시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는 정혜,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들리는 소리.. 애인인 듯한 대상과 전화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 통화 후 멍하니 앉아있는 그의 어깨가 쓸쓸해 보인다. 정혜는 선 채로 그를 안아준다. 그러자, 누워서 잠들어버리는 그 남자. 많이 취해보인다.

잠이 든 그 젊은 남자의 손칼을 손수건에 쌓아 핸드백에 집어넣고 모텔을 나온 정혜, 그동안 친구가 되어준 고양이를 다시 밖에 놓아주며 더 이상 돌봐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오늘은 우체국 출근도 하지 않았다. 정혜에게 뭔가 생각이 있는 듯 보인다.

 

어릴 적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악마의 집으로 찾아간다. 벤취에 앉아 있자 그 악마가 보인다. 그 악마도 정혜를 본 듯하다. 그 악마가 정혜의 벤취 옆에 다가와 앉는다. 서서히 핸드백에 손이 간다. 손수건에 쌓여있던 칼날의 서슬이 퍼렇다. 정혜, 칼을 손에 쥔 채 망설인다. 한참을 망설인다. 다시 핸드백에 칼을 집어넣고 그 자리를 떠난다.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정혜가 급히 뛰기 시작한다.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을 때 고양이를 찾는다. 이쪽저쪽 한참을 살펴본다. 그러나, 고양이는 없다. 이때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저기.. 우체국에 갔더니 안나오셨다고 해서.. 그날 정말 미안했어요. 알람을 맞춰놓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제가 한번 잠이 들면 기절하는 스타일이라..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정혜씨.. "

 

(이 영화는 이윤기라는 영화감독의 작품이다. <여자, 정혜>라는 작품을 보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여성적인 취향으로만 만든 작품이 아닌가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나로서는 모처럼 보게 된 좋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속에는 절제가 가미되어 있다. 영화로써 갖는 작품 자체에도 절제의 틀이 갖추어져 있고, 출연배우들 역시 그들 각자가 맡은 역할에 절제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무산일기〉를 보고  (0) 2011.05.30
소설vs영화 - 『더 로드』   (0) 2011.05.01
마리Mari이야기  (0) 2011.03.09
울지마, 톤즈 [Don't cry for me sudan]  (0) 2011.03.05
시라노 연애조작단  (0) 2011.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