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무릇 생명이 태어나는 경계에는
어느 곳이나
올가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
저렇게 떨림이 있지 않겠어요?
꽃을 밀어내느라
거친 옹이가 박힌 허리를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저 늙은 동백나무를 보아요
그 아득한 올가미를 빠져나오려
짐승의 새끼처럼
다리를 모으고
세차게 머리로 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꽃을 이리 가까이 와 보아요
향일암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도
검푸른 잎사귀로
그 어린 꽃을 살짝 가려주네요
그러니 동백이 저리 붉은 거지요
그러니 동백을 짐승을 닮은 꽃이라 하는 것 아니겠어요?
◆ 송찬호 -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함.
동백은 겨울에 피는 꽃이지요. 얇은 꽃잎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디는 붉은 꽃을 보고 송찬호 시인은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동백이 활짝」). 생명을 위협하는 겨울과 싸우다 뚝뚝 떨어지는 동백은 여성에 비유되는 꽃이 아니라 “짐승을 닮은 꽃”입니다. 꽃을 밀어내려고 “허리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동백나무에서도 짐승의 신음소리가 나올 것 같죠? 헤쳐 나가기 힘든 일을 겪을 때면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죠.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은 그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 올가미 같은 시간을 지나, 다시 새해가 떠올랐습니다. "세차게 가지를 찢고 나온" 동백꽃의 기운을 받아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 보시지요.
<김기택>
* 문득, 2009년 5월 13일 아들의 싸이월드에서 보았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상병이었던 아들은 휴가를 나왔다 복귀할 때쯤이면 답답해했지요. 그런 심정을 달래기 위해 적었을까요. 유대 외경 미드라시에 전해지는 솔로몬의 지혜. 다윗 왕이 어느 날 궁중 세공인에게 명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반지에는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고 또한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를 적어 달라고 부탁했지요. 고민에 빠진 세공인이 솔로몬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일러준 말이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입니다.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 읽으면 자만심이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읽으면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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