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진이정

미송 2011. 4. 6. 19:51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진이정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허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저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량겁 후에 단지 한 줄기 미소로밖엔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 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1994) 중에서

 

 

엘 살롱 드 멕시코

 

엘 살롱 드 멕시코

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

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

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

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

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

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

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

이태원을 무작정 배회하고 싶다

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

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

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

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

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리라

가슴에 매단 망각의 손수건으론 연신 업보의 콧물 닦으며

체력장과 사춘기 그리고 지루한 사랑의 열병을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 앓아야만 하리라

악, 난데없이 내 맘 속에서 인류애가 솟구친다

이 순간 내 욕정은, 그리움으로 잘 위장된 내 욕정은 온데간데 없다

이게 제정신인가

아님 무슨 인류애라는 신종 귀신이 날 덧씌운 것인가

그날 살롱 멕시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

딸라 한닢 없던 외삼촌만이 명랑하게 딸랑거렸다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시키고 나서

용케 합석시킨 지아이의 붉은 뺨에 뽀뽀하던 외삼촌,

그립다, 어수룩한 그 백인 병사마저

엘 살롱 드 멕시코

이젠 자꾸만 들어가고 싶은

그래 캠프 페이지 위병초소의 산타클로스와 함께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 나, 나

성조기는 사라져도 그 단맛만은 영원하리라

나의 엘 살롱 드 멕시코를 적시는

외삼촌의 스트레이트 위스키처럼, 여태 숙취로 남은 그 취기처럼,

그 옛날의 그리움에 어느새 난 샌드위치되어 있다

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

엘 살롱 드 멕시코

 

 - 진이정 (1959~1993)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 1994>

 

* 학부 마지막 학기였으니까, 2002년 1학기였을거다. 황현산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종종 시를 읽어주시며 시인에 대한 일화를 얘기해주시곤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다소 긴 진이정의 이 시를 정성스레 읽어주신 후에 조금은 긴 정적을 수강생들에게 건네주었다. 긴 호흡 속에서도 진이정 시 특유의 리듬감 때문에 강의실은 이상한 열기 같은 것으로 금세 휩싸였던 기억이다.

 

시를 읽어주신 후에 선생님께서는 진이정 시집에 얽힌 일화를 소개해주셨다. 진이정은 1993년에 죽었다. 1993년 당시 황현산 선생님께서는 『세계사』편집주간으로 계셨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어느 날 낯선 청년이 시집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찾아왔더랜다. 청년의 얼굴엔 안쓰러울 만큼 병의 기운 같은 것이 압도하고 있었는데 시집이 급한가, 라는 선생의 물음에 아무 말이 없더랜다. 그게, 황현산 선생이 진이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랜다. 그리고 진이정 부음. 시집은 진이정이 죽은 이듬해에 나왔다. 그 정도로 아팠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시집 출간을 조금이라도 서두를걸,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시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엘 살롱 드 멕시코. 더럽게 외롭거나 더럽게 누군가 그리운 날엔 이 시를 꺼내어 낭독한다. 사람아 사람아 그대가 건너간 세상에선 아무도 그리워하지 말아라, 엘 살롱 드 멕시코, 엘 살롱 드 멕시코.

 

헤르메스(Herm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神)이다. 신들의 사자(使者)이며 목부(牧夫), 나그네, 상인, 도둑의 수호신으로, 날개 달린 모자와 신을 신고 뱀을 감은 단장을 짚으며 죽은 사람의 망령을 저승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메르쿠리우스에 해당한다. 아래의 글은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이다.

 

 

실존적 헤르메스의 탄생 : 경계의 시학

ㅡ진이정의 시세계

 

박 대 현

 

 

1. 경계 경험의 실존적 상상력

 

모리스 블랑쇼가 예술가를 일컬어 “죽음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라고 했을 때, 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이룬 존재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죽음을 사유함으로써 예술적 감성의 드높은 성취를 이룬 자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는 전향적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이미 예술적 형식을 통해 ‘중화’된 죽음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 속에 감금된 죽음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이렌의 유혹을 힘겹게 이겨낸 오디세우스의 근대적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근대적 욕망이란 자신과 다른 삶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버릴 것 같은 불안을 이겨낸 자기유지의 욕망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매혹적인 유혹이 상징하는 영원회귀의 욕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죽음과 삶, 신화와 근대의 경계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은 채 사이렌의 유혹을 즐김으로써 자기유지가 가능한 근대적 공간을 향해 항해를 계속한다. 사이렌의 유혹을 ‘견디는’ 동시에 ‘즐기는’ 이 독특한 방식 속에 ‘죽음’이 중화되는 공간으로서의 예술이 탄생한다.

 

오디세우스 이후의 인간은 영원회귀의 어둡고 불안한 욕망을 ‘예술 향유’의 방식을 통해 해소하게 된다. 예술은 더 이상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직접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근대의 문명 속에서 가공된 동물의 시체는 더 이상 시체가 아니라 위생적인 상품이 되듯이, 예술은 죽음을 가공하는 공간일 뿐이다. 예술은 영원(죽음)에의 길을 터주는 동시에 그 길을 봉쇄해 버리는 존재로서의 역설적 의미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이 예술이라는 중화된 공간에 머물지 않고 예술가 자신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되었을 때, 죽음은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예술의 영도화(零度化)에 머무는 죽음! 죽음이 먼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을 때, 예술가의 ‘실존적 상상력’은 예술의 공간을 허물고(돛대에 묶인 자신의 몸을 풀고) 직접적인 죽음의 세계와 사이렌이 인도하는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이정의 시는 이러한 죽음의 인식이 예술의 영도화에 이르는 시의식의 절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서서히 확신하면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가열한 ‘실존적 상상력’의 힘은 예술을 통해 죽음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곧 그의 시가 되게 한다. 다시 말해, 시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한 실재 속에서 파괴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아왔던 삶의 모든 과거와 죽음을 넘어 그의 시세계를 우주로까지 확장시킨다.

 

그의 시적 상상은 과거의 추억을 지나오면서 그리움에 몸서리치다가도,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우주로 비상한다. 그리고 다시 현실의 ‘진창’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이승의 표정을 짓는다. 그 흐느낌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자 그리움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 나타난 기이한 표정은 “다른 사람들은 죽음 뒤의 세계를 꿈꾸는데 시인 자신은 벌써 죽음 뒤로 넘어가 이 세계를 꿈꾸”(황현산, <국민일보> 2004. 8. 24)는, ‘거꾸로 선 꿈’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이정은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순간, 이미 죽음을 통과하여 이승이 아닌 저승의 세계를 둘러온 ‘헤르메스’의 지위를 획득한다. 인간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인도하고, 지상의 거주자를 지하세계로, 지하의 거주자를 지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헤르메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체득한 모든 경계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 출현의 원리를 알게 하는 ‘경계의 신’이자 ‘비상의 신’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획득한 전체성의 경험은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 여기와 저기, 나와 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진이정의 시는 헤르메스가 가지고 있지 못한 새로운 감성의 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헤르메스는 죽음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체험은 신의 영역이 아니고 인간의 영역인 것이다. 죽음을 체험하지 못하는 신의 감성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지적인 통찰이 헤르메스의 몫이라면, 세계에 대한 정서적 통각은 실존적 헤르메스의 몫이다.

죽음의 문을 통해 삶의 본질을 내다보는 시인은 현실을 개조하기보다 초월의 세계를 열망하는 형이상학적 거부를 단행하기 마련이다. 현실은 추악한 가상의 세계이며, 육체가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가변성의 세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이정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주의 본성을 향한 형이상학적 시야를 거머쥐는 동시에 그의 육체가 소멸하는 이 현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토로하는 ‘실존적 그리움’을 놓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실존적’ 헤르메스의 탄생! 진이정은 실존에서 해탈로 나아가려 했으나, 다시 삶의 저편에서 이편을 그리워하는 ‘거꾸로 선 꿈’이라는 낯설고 비린 ‘실존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죽음의 감수성과 시(詩)와 현실의 경계

 

죽음의 감수성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의 예감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메타성찰의 실존을 형성하게 한다. 죽음의 감수성을 통한 메타성찰은 자기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짐과 동시에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자기 귀환의 근원적인 성찰과 초월의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죽음의 감수성에 의한 새로운 세계 인식은 진이정의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세계와 예술의 자명성을 해체하는 예민한 시의 향불을 그는 피워 올린다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ㅡ「시인」전문

 

‘시인’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예민한 시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토씨 하나를 찾기 위해 천지를 도는 행위는 예술의 경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세계의 환부와 시의 고통은 상동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언어의 무력감을 시인은 주목한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라는 시구는 시의 무용성을 비웃는 자들에 대한 서글픈 자기과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는 전언! ‘사라짐’이라는 소멸의 감수성은 시인의 지배적인 감성을 형성한다.

 

소멸은 곧 죽음이다. “아플 때, 나는 가장 정신이 맑다”(81)는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존재이유는 “온 세상에 눈물 올라”(108) “상처만이 리얼한”(67) 이 세계에 대한 인신제의(人身祭儀)로서의 희생이다. 따라서 시인의 죽음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사라지는 육체로부터 비롯되는 “서러움의 창고 안”에 있는 “눈물과 한숨의 종교”로써 진이정의 시는 자신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 이는 비유적 진술이 아니다. 진이정은 시로써 자신의 죽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으로써 시를 창조한다. 이는 데뷔작을 제외한 그의 모든 시에서 파악되는 페르소나(persona)가 단일하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그가 써낸 시의 페르소나는 시인 자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결국 그의 시에서 페르소나를 구별하는 몰개성론의 시관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시 속의 죽음이 곧 시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시는 진이정에게 있어 죽음을 중화시키는 공간이 아니며, 날것 그대로의 죽음을 만나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여전히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의 공간 안에 있을 뿐이다. 그는 탄식한다.

 

한강이 푸른 사파이어 같다는 자는

이 거대한 배고픔을 이해 못해

나는 하도 급해 불을 마셨다; 다행히 비유적으로 뜨거웠다

나도 네게 비유로만 말하리라

달은 노래한다; 구름에 나 가듯이 가는 나그네

 

ㅡ「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중

 

“한강이 푸른 사파이어 같다는 자는/ 이 거대한 배고픔을 이해 못”한다. 한강이 겨우 “푸른 사파이어” 정도로 보이는 물신적인 인간에게 이 세계의 진상이 이해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 ‘배고픔’은 “고구려 병사가 나의 국적을 물었다/ 전 허망한 나라에서 왔습니다요,/ 다행히 말이 통했다/ 나도 허망한 나라에서 살고 있어”(74)가 암시하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 세계의 허망함을 깨달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배고픔’이다. 그래서 그는 “하도 급해 불을 마셨다”. 그런데 “다행히 비유적으로 뜨거”운 것이 아닌가? 결국 그도 예술의 공간에서 삶의 허무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나도 네게 비유적으로만 말하리라”라고 외치지만, “달은 노래한다; 구름에 나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반(反)동일화의 패러디를 통해 전통적 시의 공간을 뒤틀어 버린다.

 

그리고 죽음을 중화시키는 예술의 공간을 거부하고 파괴라도 하듯이, 그는 실제로 죽어버렸다. 그의 죽음은 비유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거대한 배고픔’과 죽음을 안고 있던 그의 시 또한 그의 육체처럼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것은 언어적 비유를 뚫고 나온 생생한 실존적 언어의 파열음이다. 그 때문에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다. 그의 죽음은 예술의 경계를 넘어 현실로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예술 향유’라는 ‘놀이’로서의 시를 넘어 육체화된 언어를 보여준다. 그것은 언어에 갇힌 죽음을 향유하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죽어가는 자만이 토해 낼 수 있는 육성이자, 삶의 저편을 예감하는 자의 쓸쓸한 절규다.

 

하여 언젠가 날 보드랍게 애무했던 바로 그 운명의 혓바닥이 이젠 쇠구슬 달린 체인처럼 내 목을 조여와, 나를 체인에 매달린 다른 쇠구슬처럼 마구 휘두르기 시작하는 거야

(…중략…)

그대여 난 종말을 사랑해, 나의 종말인 모월 모일까지는 날 벗기지 마 내 불두덩 핥지 마, 쬐금만 더 참았다 마침표 없는 영원한 색을 쓰고 싶어

 

 ㅡ「사람, 노릇, 하기란, 너무나, 힘들어」중

 

인간의 몸을 받아 살아왔던 시간은 마치 “언젠가 날 보드랍게 애무했던 바로 그 운명의 혓바닥”처럼 황홀한 시간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실존에 처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 운명의 혓바닥은 시인의 “목을 조여” 오고, “체인에 매달린 쇠구슬처럼” 시인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맹목적인 욕구는 “마침표 없는 영원한 색을 쓰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그래서 진이정은 말한다.

 

누가 내 몸 안에서 섹스를 하나 봐

헐떡이는 소리, 세 살 이후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머리 위에서 붕붕거린다

그는 흑인이다

편견이 곧 나다; 나를 버리기란……

그를 쫓아주세요 외국 군대에게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나

(…중략…)

우주는 교미 중이다; 호모인 주제에 말야

내 풀무 허파, 불난 내 몸 부채질하네

빗방울과 땅바닥이 사무치듯

나의 눈물 지도는 은하계에 퍼져 있다

(…중략…)

둔중한 성기로 매를 맞고 싶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중

 

섹스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근원인 동시에, 죽음을 등에 지고 있는 비밀의 문이다. 그래서 진이정은 늘 죽음이 스민 육체 속에서 헐떡이는 섹스 소리를 듣는다. 그 섹스 소리는 ‘식민지’(44) 현실과 겹치면서 강간의 이미지로 전화된다. 살고자 하는 실존적 욕구가 식민지 현실에 의해 강간당하는 이미지의 교합! 바야흐로 우주는 교미 중이다. 우주는 생명을 뿌려대는 동시에 죽음 또한 뿌려댄다. 그래서 우주는 ‘역겨운’ ‘호모’일 수밖에 없다. 허무의 공기로 가득한 시인의 허파는 죽음으로 불난 시인의 몸을 부채질한다. 살아있는 것은 허무로 몸을 불태우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우주의 “둔중한 성기로 매를 맞고 싶”은 마조히즘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실존적 성도착 증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인의 “눈물지도”가 “은하계로 퍼져”나갈 만큼, 인간의 실존적 슬픔은 우주적으로 확장된다. 눈물의 우주이기도 한, “한 티끌의 우주 속에서 나 사랑했노라”고 외치는 시인은 “짧은 생각 동안에, 나는 열 번도 더 태어났어/ 나의 시간은 늘 종말 직전이야”(85)라고 말할 만큼 예민한 종말의식을 드러낸다. 죽음은 그에게 있어 “어둔 밤중에 희게 빛나는 우주의 이빨”(90) 같은 것이지만, “죽음의 골짜기로 스미는/착한 물의 잠처럼” 찾아오는 ‘그대’라는 우주적 근원에 포획된 채, “눈부처에 어린/ 그대 속눈썹”로 여리디여린 “내 영혼을 빗질하”(30)게 한다. 이처럼 진이정은 “허전해, 허무해, 허망해”라는 “내 마음의 세 허씨”(91)로부터 촉발된 실존의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초월하는 우주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퍼렇게 날이 선/ 생각의 작두날 위에서 펄펄 날뛰고 있”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는 “나의 신들”(59)린 상상력이다.

3. 해탈의 상상력과 실존적 그리움의 경계

 

진이정은 삶의 허무를 어떻게 수용하는가? 죽음의 자의식이 육체를 물들이는 순간, “나 수명을 재고 있어”(69)와 같이 매우 예민한 시간의식을 토로한다. 시간은 신의 다른 얼굴이다.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은 신비 그 자체이며, 그 신비스러운 시간 속에서 진이정은 ‘동일성’ 욕망의 한 극점인 해탈의 욕망을 드러낸다.

 

 (…상략…)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ㅡ「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중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 인간에게 영원회귀의 욕망은 가장 오래된 고통의 해결 방식이며, 죽음이라는 실존에 처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다. 역사적 진보의 과정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욕망의 대상으로서 영원회귀는 시간과 생성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론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무화시키는 동시에, 영원한 질서의 존재에 합일하게 하는 신비적 경험의 세계이자 해탈의 세계다. 그러나 진이정은 해탈 욕망의 경계에서 다시 실존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죽음이라는 실존이 그의 육체 속에서 범람하여 가만두지 않아서일까? 그가 보여주는 해탈의 상상력은 이미 실존의 고통이 농밀하게 스며든 것이다. 열반의 문턱에서 다시 사바의 세계로 되돌아와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처럼, 진이정은 실존의 피가 섞인 그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엘 살롱 드 멕시코

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

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

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

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

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

(…중략…)

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

 

ㅡ「엘 살롱 드 멕시코」중

 

보살이 해탈을 단념한다는 사실에서 보살 신화의 경이로움을 찾을 수 있다는 조셉 캠벨의 말처럼(조셉 캠벨, 이윤기 역,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2003, p.213),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이다. 입멸의 경계를 넘어선 보살의 눈물겨운 귀환은 인간 세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진이정은 보살 신화를 통해 그 자신의 그리움을 반추해낸다. 어린 시절 철조망을 넘어가며 놀았던 유년의 기지촌, 창녀들이 미군들과 놀아나던 속악하고 비참했던 그 현실에 대한 그리움을 말이다. 그것은 그가 살아왔던 이 세계에 대한 실존적 그리움이자 사랑이다. 이 실존적 그리움은 해탈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그것은 이 속악한 세상을 더욱 ‘사랑’하고 ‘슬퍼’하기 위한 거부이다. 그러므로 진이정은 해탈의 욕망을 파기할 수밖에 없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난 그런 현실감에 목마른 것이다

자동차 바퀴살을 호이루라고 부르던 시절,

<빵꾸 나오시> 집에서 나는 살았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은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니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중략…)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중략…)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중략…)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ㅡ「아트만의 나날들」중

 

 삼촌의 죽음을 소재로 쓴 이 시는 이 세계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그냥 없어지는 것이다”처럼 그는 인도철학이 말하는 해탈과 열반의 실재를 인정하되, 자신을 구원할 실재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은/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니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진이정은 참으로 불온하게도 우주의 불변하는 본질이자 항구적인 존재의 속성을 가진 영원한 실체라 볼 수 있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합일 상태, 즉 해탈을 더 이상 갈구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죽음과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보는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라고 말하는 이 경험적이고 가상적인 세계는 헛된 것이라기보다는 무한히 아름답고 “세차게 불타 오”를 만큼 눈물겨운 그리움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자아의 본질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실존은 해탈을 위해서는 소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해탈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 그것은 고통의 악순환에 빠진 실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해탈은 실존이 지니고 있는 경험적 자아라는 심리적 실재를 버려야 하는 일이다.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진이정은 여기서 실존의 해탈을 위해서 경험적 자아(“나라는 물건”)를 헛된 것으로 부정해야만 하는 모순적 논리를 절망하고 거부한다.

 

진이정은 이 실존의 아름다움이 결국은 허망하게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눈물겨운 사랑은 우주의 근원을 지나 이 실존의 세계를 향해 있다. 왜냐하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현실감에 목마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는 실존으로서의 절규를 단행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명제의 복원! 진이정이 규정하는 인간이란 결코 현실을 초월한 인간이 아니라 육체성을 가진 실존이다. 그래서 진이정은 실존을 부정하지 않은 채 구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순식간에 종말의 지점을 향해 가기에 그 꿈은 끝내 좌절할 운명에 처해 있다. 실존은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무한 세계를 진이정은 ‘시간’이라 명명하고 고여 있는 눈물 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영원히 잠든 외삼촌으로 상징되는 실존이 서려 있는 이 눈물은 우나무노의 열망을 환기시킨다. 우나무노는 인간을 “살과 뼈의 인간”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불멸성을 지향하지만, 그것의 환상을 깨닫고는 절망하는 인간, 그래서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 규정하였다. 그래서 우나무노에게 있어서 열망의 본질은 형이상학적 성채 속에 은폐된 또 다른 불멸의 삶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바로 이 삶을 연장하겠다는, 그리고 사멸되기 때문에 우리가 가끔 가다가 저주를 퍼붓는 이 삶을 연장하겠다는 바로 그 열망”(우나무노, 장선영 역, 『생의 비극적 의미』, 삼성출판사, 1992, p.269)이다. 우나무노의 진술에서도 확인되듯이, 진이정의 시는 실존의 그리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뼈아픈 고백이며, “신들의 족보에도 없는 종교”(48)라고 할 수 있다.

4. 죽음의 경계를 넘어 다시 현실로

 

진이정은 해탈욕망의 경계에서 다시 실존의 그리움을 뿌리치지 못하고, “옛 장의사 자리엔 무지개 룸살롱이 들어와 있”고, “잠자는 죽음의 코털을 건드린 줄도 모르는”(105) 자본주의 문명의 속악한 진창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진창이란 “짜장면 젓는 폼만 보아도 양갈보 똥갈보를 용케 구분하던 양민들”(115)과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이 살았으며, “외국군대에게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66)고, “민족반역자들이 출세하”(78)는, “개 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78)낄 수밖에 없는 ‘식민지’ 현실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거지가 강남 중산층보단 행복”(44)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다. 죽음을 한껏 체험한 자에게 진창의 현실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죽음으로 인한 실존의식과 초월(해탈)의 욕망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러기엔 진이정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의 실존적 상상력 속에서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며, 그 자신을 생생한 현실의 환부 한가운데 서 있게 한다.

진이정은 ‘민중시대의 문학적 실천’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 사실은 진이정이 해탈이라는 관념의 세계를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개혁과 구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과 맞물려 현실과 해탈이 뒤얽히는 실존적 상상력이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 진이정의 시세계는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육체적인 유한성에서 비롯된 실존적 자각과 해탈의 관념까지 아우르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관념적으로 흘렀다는 비판적 논의보다는 보다 폭넓은 세계관으로 확대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와 죽음, 그리고 근원에의 절망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세계는 관념성을 극복하고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해탈의 상상력과 죽음의 감수성을 치열하게 보여준 진이정이지만, 그가 지닌 시세계의 근저에는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자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단전호흡은 우리 사장님의

비술입니다

할딱거리면서

간신히 횡경막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저희들의 숨쉬기와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지난번 조회시간에 사장님은

고맙게도 자신의 호흡법을

저희들에게 소개를 했는데요

(…중략…)

그 때부터 우린 감히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단전호흡을 시작했는데요

우리 공장에 있던 분진, 카바이트, 납, 소음, 악취가

어느새 기가 되어

이제 우리들의 단전 속으로 모두 들어와 있고

언젠가 심부름 가는 길에 보았던 사장님 댁의

안뜰같이

세상은 다시 청정해진 것처럼

우리들의 눈에는 비쳤답니다 안녕

 

ㅡ「일터에서 온 편지」중(『실천문학』, 1987)

 

단전호흡을 매개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선명한 계급적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위 시에서 진이정이 등단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시적 세계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나머지 데뷔작 「사슴목장에서 온 편지」「무허가 시장」」「상도동 무당집에서」에서도 노동자가 시적 화자로 등장하거나 시의 제재로 쓰이고 있다. 죽음이 그의 육체에 스며들기 전, 그는 민중 문학적 실천을 통해 사회 변혁과 개조를 이루어 내고자 하는 민중시인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가 병들어 가면서, 개조되어야 할 이 현실은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 전화된다.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이 생생한 현실은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폐질환으로 인해 죽음을 서서히 확신하던 그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19)에서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20) “유년의 기지촌”(18)을 추억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현실이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더 나아가 “아아 이 몸은 그 진창의 아들일 터이니”(115)라고 절규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해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던 그가 다시 되돌아보는 이 현실의 추억은 그를 ‘감전’(57)되게 한다. 그의 추억은 너무 생생하다. 너무 생생해서 ‘악몽이다’. “크레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17)던 진창 속의 연꽃 같은 어린 시절까지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억실조”(16)에 걸려 있다고 엄살을 떠는 걸까? 그의 추억은 그의 사회과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한 ‘진창’, 죽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억 다오/ 나는 추억 거지/ 나는 추억 부랑자”(17)라고 절규한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말했던 기형도나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종시를 남겼던 박정만과는 달리, 해탈의 관념에서 다시 현실의 ‘진창’으로 되돌아온 그는 “남자인 희망의 입 속으로 혀를 들이”밀고 “희망을 아직 그녀라고 부르”는 “희망의 호모”(51)가 되어 “슬픔의 화폐개혁”(36)을 꿈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지만, 그의 죽음조차 그 꿈을 걷어 들일 수 없었다.

 

눈물도 없이 나는 운다 울었다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

 

ㅡ「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중

 

이미 죽어버린 그는 “눈물도 없이” 운다. 살아생전 이미 죽음에 깊숙이 침잠해 버린 그의 어조는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란 이미 죽어버린 그가 꿈꾸는 이 세상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가끔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그런 때라야, 겨우 시가 되는 것! 죽음을 체험한 자만이 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전언! 이 전언은 그의 다른 시구를 통해서도 암시되고 있다.

 

나는 건넌다, 다리는 곧 없어질 터이다

사라진 다리로 돌아올 테다

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겠네

 

ㅡ「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8」중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계의 신이지만, 이미 죽음을 체험한 ‘실존적’ 헤르메스의 모습으로 그는 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이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이정은 헤르메스를 닮았다. 하지만, 그는 속악하고 추악한 이 현실을 이해할 수는 없으되 버릴 수 없는 실패한 헤르메스이며, 삶의 경계를 넘어 ‘영원’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실존적 헤르메스다. 그는 실존의 피가 뜨겁게 살아 숨쉬는 현실의 우리에게, ‘살아있던’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시인의 목소리’, 즉 “이미 저승에 가버린 시인들의 목소리”(51)를 이미 ‘죽어버린’ 그가 들려준다. 그리고 “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며 비로소 삶과 죽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구토를 걱정할” 만큼 “시인의 기침은 너무 상투적이”고, “기계로 쓴 시를 읽는 사람들, 뜬소문처럼 우주에 떠 있”(70)는 삭막한 시대이기에 “거꾸로 선 꿈” 속을 헤매는 그의 목소리는 우리의 귓전을 내내 울릴 것이다. 다만,유하의 말대로 “이 추억의 저녁을 지나, 마침내 울음이 나를 버릴 때,/ 세상의 병을 다 앓고 난 마음이/ 내 안의 그대를 영영 데려”(유하「상수리나무 숲에서」)간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시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19) 인생을 앓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죽은 시인의 전언은 무섭다.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은 무섭고 눈물겹다. 그의 죽음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오랜 공명을 가지고 폐부를 울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사소한 그림자 하나하나에도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잎이라고 눈이라고 풀씨라고”(14)라고 명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진이정의 시편들은 그가 가진 이 세계의 눈물겨운 사랑이 어떤 것이었나를 보여준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검은 강물에 서서히 가라앉는 자만이 토해낼 수 있는 육성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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