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박제영

미송 2011. 7. 1. 19:54

詩집 밖의 詩人들은 얼마나 詩답잖은지 / 박제영

 

 

詩인 김연숙이 전화로 시방 詩인 문혜진이 옆에 있다고 인사동 무슨무슨 술집으로 오라고 해서 물어물어 갔는데 마침 詩인 박정대가 소월詩문학상을 받은 날이라 뒤풀이를 하고 있던 모양인데 워낙에 詩(집)밖에서 詩人들 만나는 일을 꺼렸던 터라 갑작스레 모詩인모모詩인 詩人떼를 맞닥치고보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저쪽 구석에서 그래도 친한 詩인 김연숙이 손을 들어주고 그 옆에 보고싶던 詩인 문혜진하고 고영민도 앉았길래 그 옆 한자리 슬그머니 끼어 잠시 조용히 있다 갈려고 한 것인데 詩인 김연숙이 생뚱맞게 상받고 뒤풀이하는 자린데 주인공한테 가서 술 한 잔 권하는 게 좋지 않겠냐 떠미는 바람에 기왕지사 언죽번죽 "나 박제영인데 축하합니다 술 한 잔 받으소" 했던 건데 詩인 박정대 앞에 앉았던 詩인 김상미가 "당신이 박제영인가, 푸른... 뭐라던가 썼던" 하고 거드는 탓에 건넸던 술잔만 머쓱해지고 한 술 더떠 그 옆의 詩인 박완호가 "그 친구 정대형 학교 후배요 고대" 하고 거드는데 詩인 박정대는 뜬금없이 "난 고대가 아니고 정대야" 하는 통에 이거야 원 멀뚱멀뚱 난감하고 계면쩍어 다시 슬며시 詩인 고영민 옆 자리에 앉았다가 지며리 생각해봐도 詩집 밖의 詩人들은 얼마나 詩답잖은지.

 

 

 

박제영씨는 누구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시사랑을 전파하는 시인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가 그러더군요. 그림이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라 고요. 모든 예술이 다 그런 것이겠지요. 시도 결국 보이는(읽히는) 말로 보이지 않는(읽히지 않는) 어떤 것을 그리는 것이겠구요. 시를 읽는 재미란 어쩌면 행간을 읽는 재미이겠다 싶습니다.”

 

허홍구 시인의 ‘무서운 일’에 붙인 그의 해설처럼 단순히 시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알기 쉬운 일상생활 속 비유를 곁들여 시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박제영 시인은 보내는 시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그만의 원칙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인들의 시가 아닌 최근 문예지에 발표된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경향의 시를 선택해 보내고 있다.

또한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에 보내는 만큼 가슴이 따뜻해지고 희망이 가득한 내용이 담긴 시를 주로 선택한다. 그의 사이버상의 아이디(ID)인 ‘소통’ 처럼 시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문학집배원 운동을 통해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겠다는 박 시인은 “시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그리고,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며 “시창작과 동인 활동을 지속해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춘천 출신의 박제영 시인은 고려대를 졸업했으며 지난 1992년 시문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대학 졸업 후 (주)대우에서 홍보업무를 맡아오다가 지난 2005년부터 도개발공사 홍보팀장직을 수행해 왔다.

 

최초의 사이버 문학 동호회인 ‘빈터’의 동인이며 도내 시인들의 모임인 ‘A4’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 시인은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1998), ‘푸르른 소멸’(2004), ‘뜻밖에’(2008) 등 3권의 시집을 냈으며 현재도 문예지 등에 꾸준히 새로운 시를 발표하고 있다.

 

 

푸르른 소멸 1

-사막

 

박제영

 

누군가는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는데

시간을 건너온 것은 모두 사막이다

소슬히 뒹구는 낙엽이 사막의 무늬를 지녔듯이

늙으신 아버지 저 주름 또한 사막의 징후이듯이

시간이 걷히면 사막이 된다

 

박제영 시집 『푸르른 소멸 』,[문학과 경제사]에서

 

 

사막이란 황폐한 땅을 이르는 말이다. 때문에 풀과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없는 땅이다. 그런 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사람은 생명의 한계를 뛰어 넘겠다는 의지가 강할 것이다. 박제영 시인은 푸르른 소멸을 통해 우리 삶에서 잊혀져 가는 삶의 소멸에 대하여 근원적 마음을 열고 있다. "시간이 걷히면 사막이 된다" 는 말에서 사람의 삶도 황폐해 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걷힌 아버지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보며 사막의 바람이 헤졌고 간 흔적을 바라보듯이 시간의 이랑을 발견하고 있다. 삶과 삶 사이에 놓인 시간이라는 것은 삶의 울타리다. 그 울타리가 무너져 더는 내 삶의 둘레에 두지 못할 때 아무리 넓은 마음도 차지 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그 마음 공간이 모두 사막일 것이란 생각이다. 푸르른 소멸은 그렇게 사람 삶 속에 찾아오는 것이라 느껴진다.

 

 

 

가령

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다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 박제영, 「가령과 설령」 전문

 

 

강희안의 시가 '신'과 '인간'의 관계성에 관심을 둔다면 박제영의 시는 '가령'과 '설령'이란 부사어의 차별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시의 화자는 부사어 '가령'을 '佳嶺', '설령'을 '雪嶺'이란 말로 치환하여 해학적인 말재롱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가령'이란 부사어는 '~일지라도'라는 긍정적인 용언과 결합하는 말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가령/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라고 말한다. 시란 어떤 확정적인 언술로는 도달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를 통해 시(언어)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갈파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설령'이란 부사어는 '~이 아닐지라도'라는 부정적인 용언과 결합하는 말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설령/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라고 말한다. 시란 역설적으로 어떤 불확정적인 언술로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가시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일차적으로는 '가령(佳嶺)'을 '아름다운 고개', '설령(雪嶺)'을 '눈으로 덮인 고개'라는 의미로 구분하지만, '이를테면'이라는 부사어와 함께 차용하면서 말재롱의 효과를 배가한다. 화자에 따르면 '가령'(이를테면)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이 '가령'인 셈이다. 이렇게 화자는 즐김의 장소인 '가령'이 "도처에 있"는 반면 '설령'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고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설령'(이를테면)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는 까닭에 춥고 배고프다는 전언이다. 따라서 화자는 '가령'에는 '등반자'가 필요하지만 '설령'에는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시적 인식의 메시지를 말재롱의 효과를 통해 긴요하게 함축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에 대해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글 : 강희안 시인

- 출처 : 「새롭게 쓰는 시창작 강의」(『시에』 2010년 봄호) 중에서

 

 

 

동백숲 / 박제영

 

오동도 사월 동백 붉은 숲 오르다 보면

신 벗고 걷는 길을 만난다

촘촘히 박힌 형형의 돌 색색의 자갈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우뚱거리는

손에 들린 신들도 덩달아 흔들리는

맨발의 풍경을 만난다

 

지난 밤에 친구놈이 오동도로 떠났다

신을 벗고 사월 붉은 동백 숲으로 들어갔다

영안실 412호

새벽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우뚱거렸다

더러는 서로의 신이 바뀐 줄도 모른 채

붉은 동백 숲을 빠져 나왔다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근황 / 박제영

 

박형,

 

잘 살고 있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죽네사네 하면서 죽진 못하고 삽니다 죽어라죽어라 삽니다 이 달에도 쥐꼬리 월급 받았지만 이것저것 빼고 나니 빚만 50만원입디다

 

회사는 아직 안 짤렸냐고, 그래도 용케 버티고 있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도의회며 시민단체며 언론이며 바깥에서 회사를 조지면 윗분들께서 나를 조지시고 나는 술을 조집니다 내가 술을 먹다가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 술이 나를 먹어치울 때까지 술을 조집니다 술이 쓰다가 달다가 마침내는 아무 맛도 없습디다

 

요즘은 왜 시를 발표하지 않느냐고,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을 거냐고 물으셨지요?

변방의 촌무지랭이까지 찾아줄 잡지가 어디 있겠나 그리 생각하니 속이 좀 편해집디다 시 같은 시를 쓰겠다고 이십여 년 매달렸는데 이제는 시 같지 않은 시를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시기 빠지게 살아보니 시가 별 것 아닙디다

바람이 많이 차갑습니다

내내 여일하시길

 

추신

춘천의 안개, 그 속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아무 것도 없습디다

 

 

‘조지시고’에 대한 사유 혹은 誤讀

 

나는 박제영 시인을 안다 할 수도 그렇다고 모른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모두 다 아는 것도 같기도 하나 따져보면 전공이나 나이나 말투나 술버릇 등 개인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모른다 해도 무방하겠지요.

 

내가 그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시인이라는 것, 巫病처럼 詩病을 앓은 病歷의 소유자라는 것, 월요시편지 배달부라는 것, 풀잎 같은 두 딸의 아버지라는 것, 강원도개발공사에서 밥을 벌고 있다는 거, 그 회사가 유배지 같은 대관령 고원에 있다는 것, 페이스 북에서 나의 몇 안 되는 이웃(친구)이라는 것. 그리고 동종에 종사하는 동업자 정도.

 

그의 말을 빌리자면 詩歷도 나이도 내가 선배라는데 사실 며칠이나 선밴지 정말 선배가 맞긴 한지 구체적으로 확인한 바 없고,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시에 독자,, 그저 공손한 독자, 자유로운 독자라는 것.

 

어제 수요일 늦은 오후, 페이스북 [박제영의 탁시]에 ‘근황’이라는 시 한 편이 올라와 있더군요. 눈에 몸에 대관령 골짜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면서 잘 계신가? 문득 궁금해진 그의 근황(?)

 

물론 나는 이 시에 등장하는 박형이 누군지 모릅니다. 시인 자신일 수도 있겠고 타인이어도 무방한, 보시다시피 이 시는 그 박형이 근황을 물으면 시인이 답하는 서간문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흠을 찾자면 지나치게 정석에 매달려 있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회사는 아직 안 짤렸냐고, 그래도 용케 버티고 있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도의회며 시민단체며 언론이며 바깥에서 회사를 조지면 윗분들께서 나를 조지시고 나는 술을 조집니다 내가 술을 먹다가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 술이 나를 먹어치울 때까지 술을 조집니다”

 

시를 읽다가 3연 “바깥에서 회사를 조지면 윗분들께서 나를 조지시고 나는 술을 조집니다” 이부분, 이 시를 쓰면서 ‘조지시고’라는 다소 저항적인 단어를 찾아낸 시인은 남모를 통쾌감을 느꼈을까요?(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아마 그랬을 겁니다) 나는 피식 아니 빵하고 웃음이 터졌답니다. 한 사내가 곤고한 일상을 하소연하고 있는데 주책스럽게 웃음이라니요. 그런데 나오는 웃음을 어쩝니까, 그냥 웃었지요. 웃다 보니 비로소 그게 웃을 일이 아니란 걸 안 거지요.

 

‘조지시고’가 갖은 온갖 추측(?), 우리말의 다의적 해석에 나도 그만 감정통제가 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요. 사람들은 이럴 때 ‘해학’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저 담담하다가 감정이 푹 꺾이면서 갑자기 내 사이클이 슬픔으로 바뀌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자유로운 독서라 해도 좋겠고 誤讀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나의 시 읽기는 어디까지나 내 멋 대로니까요.

 

“술이 쓰다가 달다가 마침내는 아무 맛도 없습디다”

“시 같은 시를 쓰겠다고 이십여 년 매달렸는데 이제는 시 같지 않은 시를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시기 빠지게 살아보니 시가 별 것 아닙디다”

 

“추신

춘천의 안개, 그 속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아무 것도 없습디다“

 

첫 횡부터 마지막 횡까지 허무감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허무를 대신하는 안개, 춘천의 안개 속 풍경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답하고 있는데, 춘천의 안개를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이건 온몸으로 안개를 껴안아 본 자만이 줄 수 있는 답이니까요.

 

근자에 만난 그의 시편들은 대체로 쓸쓸했습니다. 억지로 봉합한 것들은 언젠가 터지게 마련 아닌가요.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껴안고 여기까지 온 길이 버거워서 때로는 내려놓고 싶은 유혹 왜 없었을까요.

 

얼마 전 그에게서 배달받은 244호 월요시 [남탕]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허무감은 여전했습니다. “생각하면, 나의 비망록도 당신의 비망록도 어쩌면 허망록이 아닐런지...” 라고.

 

없는 답을 기대하며 허공에 묻습니다.

우리 모두 평생 해온 이 짓거리들이 끝내는 허망록일까요? 그럴까요?

 

 

2011. 6. 9. 망포마을에서 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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