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1962년 러시아에서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스탈린 치하의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힌 한 개인의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하루를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추위와 배고픔은 이 소설 전반에 백 뮤직으로 지겹도록 깔린다. 등장인물들은 추위로 인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배를 채우기 위해 빈틈없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지상과제인 생존을 위하여.
책을 읽다보면 추위만으로도 인간에게 지독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수용소는 유리창은 꽁꽁 얼어붙었고, 건물 전체는 천장 근처의 벽을 따라 하얀 거미줄 모양으로 성에가 끼어 있을 정도로 밖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일어나서 문을 나서면 혹한이 온몸을 움츠리게 하고,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엄습해 기침이 나올 지경이다. 주인공은 점호를 하러 가는 순간만큼 괴로운 순간도 없다고 한다. 어둡고 춥고 배는 허기진 데다,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지내나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혀가 얼어붙어 서로 말하기조차 귀찮다.
작업장이라고 해 봐야 몸을 녹일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고 움막 한 채 없고, 모닥불을 피울래야 나무토막 하나 없는 곳. 몸을 녹일 유일한 방법은 죽어라 곡괭이질을 하는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나 수용소도 사람이 거하는 곳이라 식당, 이발소, 목욕탕, 의무실이 있다. 주인공이 온몸이 쑤시고 아파 의무실에 갔을 때의 느낌은 절절하다. '이처럼 깨끗하고 환하고 조용한 곳에 꼬박 오분 앉아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라고.
추위에 대한 대화를 들어보자.
"날씨가 좀 풀린 것 같아요."
"영하 십팔 도는 될 것 같아요. 그 이하는 아니에요. 벽돌을 쌓기에는 좋은 날씨죠."
영하 십팔 도가 벽돌쌓기 좋은 날씨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지역에서는 눈보라가 일면 작업이 중지될 뿐만 아니라 막사에서 식당까지 가는 데도 쳐놓은 동아줄을 잡고서야 겨우겨우 찾아갈 지경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댄다. 여름엔 건조하고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고 겨울에는 살을 에는 냉랭한 한풍이 몰아치는 불모의 땅, 거기에 수용소 철조망을 치고 사람을 가두어 두었음에랴. 이토록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다니. 누가? 무슨 권리로? 솔제니친은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이유 때문에 10년을 갇혀 지냈다. 기본욕구인 마음대로 움직일 자유를 뺏긴 채.
배고픔은 또 어떤가. 가장 굶주리는 달은 7월, 그 때는 야채 대신 쐐기풀을 끓여 준다. 어느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고, 우리 선조에게도 개나리꽃 피는 4월이 춘궁기로 잔인한 달이었지만, 러시아는 7월이 잔인한 달이다. 배급은 보통 풀 죽이 두 번 나오거나 멀건 보리죽이 나온다. 죽을 먹는 순간에는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한다. 슈호프는 영양실조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는 동안 이를 몇 개 잃었다. 누군가가 먹다 남긴 찌꺼기라도 걸리는 날이면 그릇을 핥는 재미도 있지만, 멀건 죽 한 그릇과 이백 그램의 빵이 수용소의 모든 생활을 지배당할 줄은, 덤으로 얻게 된 죽 한 그릇에 어쩔 줄 모르고 행복에 겨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그릇의 죽이 자유보다, 전생애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 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유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아침 식사시간 십 분, 점심과 저녁 시간 오 분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열한 시간 동안이나 배정된 작업을 마치고 다른 반 보다 먼저 수용소에 들어가려고 경쟁을 벌이고 식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난장판을 벌인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끝내 예의나 염치를 버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체자리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간다. 직접 청하지는 못하고 약간 등을 돌리고 무관심한 척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담배가 짧아지는 것에 신경을 집중하거나, 페추코프가 남의 국그릇을 가지고 싸우다가 몰매를 맞고 훌쩍이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신은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의 밥그릇을 넘보는 그런 작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준식은 『옥중서한』에서 '인간이 겪는 고난이란 것은 그 인간이 고난의 무게에 눌려 비굴해지거나 비겁해지거나 야비해지거나 탐욕스러워지지 않을 정도만 혼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더 없이 훌륭한 스승인 것입니다. 그리고 혼의 힘은 그러한 고난을 극복할 때마다 무럭무럭 성장하여 다시 다음에 오는 고난과 대결하겠지요.'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혼의 힘이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힘이 아닐까.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소용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순 있어도 단 한 가지,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는 존엄을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죄수들은 몸만 따뜻해지면 아무데서나 금방 잠들어 버린다. 주인공은 1941년 집을 떠난 이후로 시트를 깔고 잠을 잔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잠자리에 들어 하루를 정리하는 그의 마음은 흡족하다.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고 힘든 작업을 하지 않았고 점심 때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고 저녁에는 체자리의 편의를 봐주고 그의 저녁을 차지했으며 잎담배를 피우고 몸도 다 나았다. 무엇보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기에 행복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과 자잘한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다. 그것뿐이다. 그 누구도 그 고통에서 구해줄 수 없고 그의 위치에서 대신할 수 없다. 적나라한 생존이다. 역설적으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억압이 있는 한 삶을 향한 의지는 지속된다. 자유로울 때보다 더욱 성실하게 생을 살아낸다.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수용소가 육체의 감옥이라면 자신을 규정하는 경계가 마음의 감옥이다. 육체가 감옥에 갇혀 비루하다면 마음은 스스로 그어 놓은 금에 갇혀 남루하다. 감옥에 갇힌 육체가 고립되었다면 마음의 감옥에 갇힌 사람은 소통 불능이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 마음의 감옥을 품고 사는 지도 모른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또한 당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차이는 우리의 의식주가 풍부하고 육신이 덜 고단하다는 것. 우리는 모두 실감하지 못하지만 갇혀 산다. 그것이 육체의 감옥일 수도 있고 마음의 감옥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두부를 예의바르게 부치고 밥알을 정성 들여 씹어 먹었다. 끊은 지 오래된 담배를 봄볕아래서 꽃비를 맞으며 한 가치 피웠다. 나도 주인공처럼 하루를 정리하면서 흡족하다. 사지육신 멀쩡하고 내 손으로 밥 벌어먹고 약간의 저축이 있으며 그다지 늙지 않았고 아직 큰 불행이 닥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존의 극단에 처해 예의와 염치를 버릴 일이 생기지 않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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