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논리와 프란시스 베이컨
1) 감각(sensation)이란 무엇인가?
구상화하기를 추월하는 두 방식이 있다. 하나는 추상적인 형태로 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형상의 길, 바로 그것에게 세잔은 감각이라고 하는 간단한 이름을 주었다. 형상은 감각에 결부된 느낄 수 있는 형태이다. 감각은 살의 시스템인 신경 시스템 위에 직접 작용한다. (증략) 감각이란 쉬운 것, 이미 된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이다. 감각은 주제로 향한 면이 있고(신경시스템, 생명의 움직임, 본능), 대상으로 향한 면도 있다(일 장소 사건). 차라리 감각은 전혀 어느 쪽도 아니거나 불가분하게 둘 다이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47)
인상주의자들을 뛰어넘는 세잔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 감각이란 빛의 색이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비록 신체가 사과의 신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의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이다(48). .-->세잔의 정물화그림 (로렌스가 사과의 사과적 본질이라고 말했던 것) 고흐와 고갱과 함께 후기인상파 대표적인 작가 후에 입체파에 큰 영향을 줌. 표면의 감각의 생생함--대상의 본질
공포가 아닌 고함, 얼굴이 아닌 머리, 구상이 아닌 형상.
2) 형상과 아플라
베이컨에게 동그라미는 흔히 인물, 즉 형상이 앉아 있는 장소를 제한한다. 인물은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며 몸을 구부리기도 한다. 이 동그라미 또는 타원형은 다소간의 자리를 차지한다. 동그라미는 그림의 옆 변을 벗어날 수도 있고, 세 그림을 가지고 하나로 만든 삼면화의 한가운데 위치할 수도 있다. 동그라미는 자주 인물이 앉아 있는 동그란 의자나 인물이 누워 있는 타원형의 침대에 의해 대체되기도 하고 번복되기도 한다. 또 동그라미는 인물의 신체 일부를 감싸는 원형물이나 인물의 신체를 둘러싼 빙빙 도는 원들에 의해 반복된다 --루시안 프로이트의 초상연구1971/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1966/삼면화1970/인간신체에 관한 연구들1970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 프랑크 아우어바흐 영국 3대 구상회화
형상(figure) 그 자체도 한 그림 안에서 동그라미나 평행 육면체에 의하여 고립된다. 이 이유는 무엇일까? 베이컨은 이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성격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형상은 고립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성격을 갖게 된다. 회화란 재현할 모델도, 해 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다. 그런데 회화가 구상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는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탱하는 것, 다른 하나는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화가가 형상에 집착하고 그가 두 번째 길을 택한다면, 이것은 결국 형상적인 것을 구상적인 것과 대립시키기 위한 것이리라(12-3)(장프랑소와 료타르는 형상적인 것(figural)을 명사처럼 사용하여 구상적인 것(figuratif)과 대립시킨다)
사실 그림의 나머지를 체계적으로 점유하는 것은 활기차고 단일하며 부동의 색으로 된 거대한 아플라들(aplat:골격-평면적 색채면)이다. 얇고도 단단한 아플라들은 구조화와 공간화의 기능을 한다. 하지만 아플라들은 형상의 밑이나 뒤 혹은 그 너머에 있지 않다. 그들은 바로 옆에 혹은 차라리 바로 주변에 있으면서, 형상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촉지적이거나 눈으로 만지는 근접 시각 안에서 그리고 근접 시각에 포착된다. (중략) 아플라는 배경처럼 작용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단지 아플라가 형상들과 가지는 엄밀한 상관관계 덕이다. 이 상관관계란 고르게 근접한 하나의 동일한 면 위에 놓은 두 구역 간의 상관관계이다. 이 상관관계 혹은 이러한 연결은 두 구역, 즉 아플라와 형상을 가르는 공통의 경계에 의해 다시 말해 그들의 윤곽에 의해 주어진다. 그 공통의 경계가 바로 장소, 즉 트랙이거나 동그라미이다. (중략) 그는 자신의 회화에서 근본적인 세 요소를 구별한다. 그 요소는 물질적인 구조, 동그라미-윤곽, 세워진 이미지이다. 조각에서의 용어로 생각한다면, 세 요소는 골격과 유동적인 받침대, 그리고 받침대를 타고 골격 속을 돌아다니는 형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면, 그것들은 통행로, 웅덩이, 웅덩이에서 나와서 그들의 일상적인 순회를 하는 인물들이 될 것이다(15-6).--개와 함께 있는 남자/1953(책, 50쪽)
윤곽은 장소이며, 물질적 구조에서 형상으로 형상에서 다시 아플라로 이행
3) 신체-고기와 동물되기
신체는 형상이다. 아니 형상의 물적 재료이다. 형상의 물적 재료를 다른 편에 있는 공간화하는 물질적 구조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신체는 형상이지 구조가 아니다. 거꾸로 형상은 신체이기에 얼굴이 아니며, 얼굴도 없다. 형상은 머리를 가진다. 머리는 신체에 귀속된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형상은 머리로 축소될 수도 있다. 초상화가인 베이컨은 머리의 화가이지 얼굴의 화가가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면 얼굴은 머리를 덮고 있는 구조화된 공간적 구성이지만, 머리는 신체의 뾰족한 끝으로서 신체에 종속되어 있다(31).
고기는 살과 뼈가 서로를 구조적으로 구성하는 대신에, 국부적으로 서로 맞부딪힐 때의 신체 상태이다. 입과 작은 뼈라할 수 있는 이빨도 마찬가지이다. 고기 속에서는 살이 뼈로부터 내려오는 것 같고, 뼈는 살로부터 솟아나는 것 같다. 베이컨에게 신체에 대한 해석이 있다면 그 해석은 그가 누워 있는 형상을 그리고 싶어 하는 데 있다. 이때 팔이나 허벅지는 위로 곧추어서 뼈의 역할을 하고 살은 그 뼈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것 같다(33).--> 증인들과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두 형상(1968)/누워있는 형상(1959)/축 늘어진 여자(1961)/누워 있는 형상(1969)
고기에 대한 연민! 고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베이컨의 가장 높은 연민의 대상, 영국인이며 아일랜드인인 그의 유일한 연민의 대상이다. 고기는 죽은 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살의 모든 고통과 색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는 발작적인 고통, 상처받기 쉬운 특성이 있을 뿐 아니라 매력적인 창의력이 있고, 색과 곡예가 있다. 베이컨은 ‘짐승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지 않고 차라리 ‘고통받는 인간은 고기다;라고 말한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 영역이고,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고기는 화가가 그의 공포나 연민의 대상과 일체가 되는 바로 그 일이며 그 상태이기조차 하다. 화가는 확실히 도살자다(34). 회화(1946)
고기는 이 머리를 통해서 달아나고 밑으로 내려온다. 그것은 앞서 나온 두 개의 십자가형에서 볼 수 있다. 베이컨의 모든 머리는 고기와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다. (중략) 결국 고기 자체는 머리이고, 머리는 <십자형의 조각>에서처럼, 고기의 국한되지 않는 힘이 되었다. 여기서 고기 전체는 십자가의 꼭대기 위해서 웅크린 개-기의 시선 아래서 집어댄다. 삼면화 <스위니 에고니스트들.....>의 파가 뚝뚝 흐르는 판에서처럼, 열려진 입이 동맥과도 같은 윗옷의 소매 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입은 고기 전체가 얼굴 없는 머리가 되는 국지적이지 않은 힘을 얻는다. 입은 더 이상 특수한 기관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몸이 빠져나가고 살이 흘러내리는 구멍이다. 고기에 대한 큰 연민 속에서 베이컨이 고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36-7). 교황II(1960)/51 미스 머리얼 벨처(1959)/십가가형의 조각(1950)/엘리엇의 시 <스위니 에고이스트들>에 영감을 받은 삼면화(1967)
신체에서 고기로
4) 고기-되기와 기관 없는 신체
머리-고기란 인간의 동물-되기이다. 그리고 이 됨 속에서 신체 전체가 빠져나가려하고, 또 형상은 물질적 구조와 합치려 한다. 이미 우리는 이것을 형상이 뾰족한 점이나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려고 자신에게 가한 용쓰기 속에서 보았다(39).
신체 전체는 소리치는 입을 통해 빠져 나간다. 신체는 교황이나 유모의 입을 통해 동맥을 통해 나가듯 빠져나간다(39).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센트 10세 초상화(1953)/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의 유모연구(1957)/교황(1954)
체험된 신체의 한계인 유기체 너머에는 아르토가 발견하였고, 또 그가 기관이 없는 신체라고 명명한 것이 있다. “신체는 물질 덩어리이다. 그는 혼자이며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들이란 신체의 적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하기보다는 우리가 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적 구성에 더 반대한다. 이 신체는 강도 높은 강렬한 신체이다(57).
입도 없고, 혀도 없으며 이도 없다. 후두도 식도도 없으며 위도 없다. 배나 항문도 없다.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일 따름이다. 유기체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신체는 전적을 살아있지만, 유기적이지 않다. (중략) 감각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잔인성은 어떤 무서운 것의 재현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체 위에 작용하는 힘들의 행위 혹은 감각인 것이다(58).
유기체가 아닌 기관 없는 신체로
5) 삼면화란 무엇인가
삼면화는 틀림없이 그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가 엄정하게 제기되는 형태이다. 즉 분리된 부분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하며, 이 관계는 논리적이거나 서술적이어서는 안된다. 삼면화는 어떤 점진적 진행도 내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스토리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삼면화는 그 나름대로 다양한 형상들에게 공통적인 일을 구현해 내야 한다.
감각의 짝짓기와 공명으로서 삼면화
삼면화는 증인들의 그림., 그러나 형상적인 증인은 보고 있지 않는 증인 볼만한 상황에 있지 않을 증인 일 것이다(90). --수평적 형상위에 놓여 있는 증인. “당장이라도 곧 물어 뜯을 그런 머리가 아니라 입의 수평적 변형에 맞춰 미소 짓고 있는 흉측한 머리이다”(90)--인간머리의 세 연구(1953)/삼면화(1973)
증인의 이행: 표면적인 증인에서 리듬적인 증인으로: “다음에 복잡한 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은 증인 기능이 그림 속에 순환함에 따라 표면적인 증인이 리듬적인 증인에게 자리를 물려줌에 따라, 두가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리듬적인 증인은 즉각적으로 리듬적인 증인이 되지 않았더랬다. 리듬적인 증인은 증인 기능이 그를 통과하고 그에게 도달하였을 때에야, 비로서 리듬적인 증인이 된다. 그렇지만 그러기 전에는 리듬적인 증인은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리듬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흔히 삼면화에 누워있는 인물들은 아직도 수동적이거나 수동적인 격정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격정의 잔여물은 이 인물들을 수평선 위에서 정렬하게는 하지만, 아직 다른 곳으로부터, 온 어떤 중압감이나 생동감, 풀어짐이나 수축을 가지고 있게 한다(91쪽).
세 번째 요소는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다른 두 그림과의 관계. 내려옴과-올라옴, 수축-팽창의 관계. 상반된 두 리듬은 어떻게 분배되는가?(92). )/십자가형 아래 형상들의 세연구(1944)
우리는 여기서 아주 복잡함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이 여러 대비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아서이고, 또 그들의 용어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결합의 자유가 나온다(94). 삼면화(1973)
세 판이 공존해야 하는 필연성을 기초한 삼면화의 규칙 1) 세 개의 리듬 혹은 세 개의 리듬적인 형상들의 구별, 2) 그림 속에서 증인들의 순환과(표면적인 증인과 리듬적인 증인) 증인 리듬의 존재, 3) 능동적인 리듬을 나타내기 위한 선택된 성격에 따른 모든 변화들과 함께 능동적 리듬과 수동적 리듬의 결정.
수평적 형상 위에서의 증인-리듬적인 증인-수동적-능동적 증인
바로 이것이 삼면화의 원칙이다. 형상들의 극대의 분할을 위한 빛과 색의 극대의 통일성. 이것은 램브란트가 가르쳐 준 것이다. 리듬적인 인물들을 만드는 것은 바로 빛이다. 그 때문에 형상의 실체는 삼면화와 함께, 절정에 달한 세 힘의 층리를 통과한다. 우선 형상의 일이 있다. 이 때 신체는 고립과 변형, 그리고 흩어짐에 종속되어 있다. 이어서 두 형상이 동일한 일 위에 포착되었을 때, 다시 말해 신체가 짝짓기의 힘, 멜로디적인 힘에 잡혀 있을 때, 첫 번째의 사실 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삼면화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빛과 보편적인 색 속에서 신체들의 분리이다. 이 보편적 색과 빛은 형상들의 공통된 일이며, 그들의 리듬적인 존재이다(98-9), 인간신체에 다른 세연구(1967)
6) 감각의 다이아그램
구상적으로는 생의 불행한 면을 그린다 하여도 그것은 강한 생명의 형상에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베이컨 베케트, 카프카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들이 무서운 것, 절단된 것, 인조 신체, 추락, 파산자들을 재현한 그 순간에 그들은 악착스러움과 현재함을 통해 제압되지 않고 꺾을 수 없는 형상들을 굳건히 세웠다. 그들은 진정 굳건히 웃을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생명에게 주었다(76쪽).--잠자는 형상(1974), 증인들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두 형상(1968)
고함이 베이컨의 입들에서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베이컨은 외침 너머에는 그가 접근 할 수 없었던 미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나는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미소들을 그렸다. 미소는 가장 이상한 기능인신체의 소실을 담당한다. 베이컨은 바로 여기에서 즉 고양이의 웃음에서 루이스 캐럴을 재발견하였다(40쪽).
-->회화(1946)
베이컨은 여러 면에서 아르토와 유사하다. 우선 형상을 들 수 있는데, 형상은 엄밀히 말해 기관 없는 신체이다(신체를 위해 유기체를 해체하고 머리를 위해 얼굴을 해체한다). (중략) 그리고 감각이란 신체 위에 작용하는 힘들과 파장과의 만남으로서 감각적인 체조이고 외침-숨결이다. 이렇게 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 감각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잔인성은 어떤 무서운 것의 재현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체 위에 작용하는 힘들의 행위 혹은 감각인 것이다(58).
기관 없는 신체에 작용하는 잔인성: 유기체의 해체, 얼굴의 해체(가학적)
공포에서 고함으로 고함에서 미소로(피학적)
사도-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증으로서의 감각
구상 |
형상 |
추상 |
재현 동일성의 원리 플라톤주의 유기체적 신체 편집증 |
감각 생성의 원리 칸트/스피노자주의 기관없는 신체 정신분열증 |
관념 추상화의 원리 헤겔주의 신체없는 기관 신경증 |
사건의 생성: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 의미론적 층위로서의 텍스트
지금까지 메타비평에서 텍스트의 인식론과 존재론은 의미의 재현과 의미의 생산조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의 지형을 차별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차별화를 개념화하자면 재현모델과 생산모델로 구분하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메타비평에서 재현모델과 생산모델은 텍스트를 바라보는 변별적인 입장으로 이항대립화 되었지, 각각의 영역이 안고 있는 한계들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재현모델의 텍스트 내부에 대해 생산모델은 텍스트 외부로서만 극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리얼리즘에서의 재현모델을 비판하고 등장한 것이 생산․이데올로기 모델이지만, 재현모델의 의미과정의 내부에 대한 생산모델의 비판은 텍스트 외부의 생산조건으로 대체된다. 텍스트는 절대적인 진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이데올로기적 국면에 따라 구성될 뿐이다라는 생산모델의 비판은 재현모델의 내부를 내재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다. 생산모델은 텍스트 내부의 의미생산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재현모델의 구성적 요소, 혹은 대립 항으로 기능할 뿐이다. 생산모델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생산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표현되는 의미들의 집합적인 생산을 텍스트의 존재형태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육체의 감수성, 표현의 욕망, 감각의 생성․변이와 같은 의미생산의 문제를 텍스트의 존재론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앞서 검토한 텍스트의 인식론적 층위와 존재론적인 층위에 대한 검토는 단순한 반영론과 생산론의 대립을 피하려는 의도 하에서 기술되었다. 인식론적 층위에서 기호학의 의미화과정과 존재론적 층위에서 텍스트의 물질성을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제 언급하고자 하는 텍스트의 의미론적인 층위는 인식론적 층위와 존재론적 층위와 변별되기 보다는 서로 교차되어 있다. 그것은 텍스트의 인식론과 존재론과 분명 다른 층위에 있지만, 그 층위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즉 그 두 층위를 함께 이접․종합시킬 수 있는 토픽이다. .
재현모델과 생산모델의 이항대립적인 한계는 결국 텍스트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다른 층위를 하나의 지반에서 서로 교차․포함할 수 있는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지반은 텍스트의 의미론적 층위를 말한다. 의미론적인 층위는 텍스트 내부의 의미가 텍스트의 물질적 형태를 생성하며, 텍스트의 물질적 형태 역시 텍스트 내부의 의미를 생성한다는, 말하자면 텍스트 내부와 외부를 의미 와 제도로 이분하지 않고 모두 <표현의 욕망>으로 <감각의 변이>로 이접시킨다. 텍스트의 의미론적인 층위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호론과 감각론에서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2. 의미란 무엇인가? -사건의 표면효과
들뢰즈는 사건-효과들과 언어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떤 명제들 속에서 표현되거나 표현 가능한, 즉 언표화되거나 언표 가능한 것이 사건들의 특성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명제들 속에 세 가지 차별적인 관계가 있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데, 그것이 지시(denotation)와 표명(manifestation), 의미화(signification)이다. 지시는 명제들이 자료들의 외부적 상태와 맺는 관계이고, 표명는 그 명제가 스스로를 말하고 표현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라면, 의미화는 단어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개념들과 맺는 관계. 즉 통사적 연결점들이 개념의 암시들과 맺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것과 별도로 명제들의 네 번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미(감각)이다. 의미는 사물들의 표층에서 무형적이고 복합적이며 환원할 수 없는 실체를 가진다(19쪽). 말하자면 의미란 사건의 계열들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가변적이고 생성적이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의미의 생성은 사건의 계열화와 그 계열화로 인해 발생되는 물질성의 표면효과이다.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에서 말하고 있는 사물의 두 가지 성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의미가 어떻게 생성하는지를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스토아학파는 첫째, 사물은 “응집력, 물리적 성질, 서로 간의 관계, 능동과 수동, 그리고 ‘상태(state of affairs)를 지닌 물체들”(48-9)로서 정의된다. 물체들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그 의미를 규정받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살아있는 현재는 행위를 동반할 뿐 아니라 능동태와 수동태를 표현, 측정하는 시간적인 외연이기 때문이다”(49). 이 때 살아있는 현재는 물체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괴시켜버린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공간 안에 실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서로 간의 관련 하에서, 서로를 위해서 원인일 뿐이다. 둘째, 모든 물체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원인은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 어떤 것, 즉 효과를 생산해낸다. 들뢰즈는 이 효과들이 물체들이 아니라 비물체적이며, 바로 사건이라고 말한다.
효과들은 사물들이나 사태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것들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차라리 존속한다고 말해야 된다. 이것들은 사물들이라기보다는 실존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50).
들뢰즈에 따르면 스토아학파가 비물체적인 사건들을 물체의 두께에 대비시킴으로써 의도한 것은 사건의 ‘표면효과’(surface effect) 때문이다. 사건의 표면효과는 물체의 생성적 시간에서 발견되는 플라톤적 이데아의 초월적 형상을 전복시킨다. 들뢰즈가 말하는 물체-비물체는 플라톤이 말하는 본질-형상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물체와 비물체는 처음부터 현재의 사건 속에서 모두 실체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에게서 말하는 “사물들의 상태들, 양들과 질들은 실체와 동등한 의미에서 존재들”이며, 그것들은 실체의 여러 종류들이다.(54)“ 그런 점에서 실존하지 않는 비물체적인 것으로서의 플라톤적 형상은 초월적 존재(extra-being)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사건의 표면효과로서 비물체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텍스트의 의미론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계 지워지지 않는’ 의미들의 생성을 가능케 하는 사건들이 표현의 힘이고 욕망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모든 것이 표면 위로 올라온다.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작업이 가져온 결과들이다. 무규정적인 것이 올라온다. 미친듯한 생성, 무규정적인 생성은 더 이상 바닥에서 으르렁거리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표면으로 올라와 되돌릴 수 없는 존재가 된다(55).
3. 사건의 두 가지 계기-되돌릴 수 없음과 발생
그렇다면 사건의 표면효과와 의미의 생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질까? 들뢰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건이 의미생성에 어떤 특이성을 갖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의미는 사건에 있어 두 가지 계기를 갖는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음과 발생이다. 사건은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외관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래서 내부와 외부, 개별과 집단, 특수와 일반의 규정과는 무관하다(190). 사건은 하나의 효과로서 발생으로서 의미를 생성하며, 내부와 외부, 개별과 집단, 특수와 일반의 구분을 해체하는 특이성을 생산한다. 이 특이성에서 고정된 의미를 가지는 개체들의 인칭들은 소멸된다. 그것은 중성적이며, 4인칭적이다. 특이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가령 루이스 캐럴(Louis Carre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는 개체성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사건들을 생산한다. “여기에서는 거대한 소음, 검고 중성적인 광대한 구름, 요란한 까마귀가 전사들 위를 날면서 그들을 분리시키지 않거나 그들을 더 구분하기 힘들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분리시킨다. 이 전쟁의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되돌릴 수 없는 기도를 분명하게 거부하는 신은 바로 투시와 불가능성 텅빈 하늘, 즉 아이온(Ion)이다”(192). 사건의 특이성은 “개체적이지도 인칭적이지도 않은”(194) 상태를 지칭하는 데 이 상태에서 의미의 잠재적인 에너지가 생산된다. ‘사건-특이성’은 항상 잠재성의 표면에 붙어 다니면서 의미를 생산한다. 의미의 장소는 심층이 아니라 표면인 것이다(196). 들뢰즈는 ‘사건-특이성’이 의미의 장소인 표면에 어떤 효과를 생산하는 것은 마치 니체가 말하는 “능력에의 의지, 자유롭고 고삐 풀린 에네르기의 세계”와 같다고 본다.
더 이상 무한한 존재의 고정된 개별성 안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노마드적 특이성들. 개체적이지도 인칭적이지도 않은 그럼에도 특이한 결코 미분화된 심연이 아닌 어떤 것. 한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뛰어다니면서 언제나 각 수 안에서 파편화되고 변형되는 동일한 하나의 던짐의 부분을 이루는 주사위 놀이를 실행하는 어떤 것. 의미를 생산하는 디오니소스적 기계.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가 더 이상 단순한 하나의 조작 안에 있기 보다는 새로운 담론 안에서 서로 같이 현존하게 되는 그러한 기계. 이 새로운 담론은 더 이상 형상의 담론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형의 담론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순수한 무정형이다(201).
4. 사건의 표면 효과로서 리어왕과 광대
이렇듯 텍스트의 의미는 어떠한 고정된 코드화, 개별화를 거부하는 사건의 특이성이 표면효과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효과의 생산은 바로 표현의 생산이다. ‘사건’의 ‘표면’을 ‘효과’화하는 것이 의미라면 세익스피어의 King Lear에서 리어왕과 광대의 관계만큼이나 그 맥락을 잘 제시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리어왕이 자신의 왕국을 딸들에게 분할해주고 난 뒤에 딸들에게 점차로 외면당하면서 맞게 되는 몰락 과정에 광대는 보통 리어왕의 ‘대리자아’로 이해되곤 했다. 광대는 리어왕의 분신이자 광기 시에 분열된 자아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래서 광대가 리어왕에서 익살을 떨고 맥락없는 말을 던지고 때로는 그의 가슴을 찌르는 비판적인 풍자사설을 늘어놓는 것은 결국 리어왕 자신의 이중독백으로 볼 수 있다. 광대는 리어왕을 표상한 것이고, 분열된 자아의 ‘거울-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리어왕의 잘못된 결정을 가시 돋힌 풍자로 대응하는 광대는 자신의 과오를 투시하는 리어왕 자신의 무의식의 대리자였을까? 사건의 표면효과로서 의미는 이런 관계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광대가 리어왕의 대리자아였다면, 아니면 정반대로 그의 단순한 대화파트너였다면 광대와 리어왕 사이에서 사건을 표면효과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개체의 동일성과 독립성은 모두 단순한 표상과 상징관계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표면효과는 개체의 인칭이 사라질 때, 언표행위의 표상성이 사라질 때 생겨난다. 표상이 아니라 생성이, 반영이 아니라 표현이 광대와 리어왕의 인칭성과 개체성을 소멸시킬 때, 광대는 리어왕의 사건의 효과로서, 리어왕은 광대의 사건의 효과로서 나타난다. 들뢰즈의 다음 인용문을 보자.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것은 바로 자유롭고 노마드적인 특이성들이다. 모든 바닥보다 더 깊은 곳, 그것은 표면, 피부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이국적 언어 스스로가 자신의 모델이 되고 현실이 되는 언어, 미친 듯 생성은 표면으로 올라가 아이온, 영원의 직선위에 놓일 때, 형태를 바꾼다. 마찬가지로 자아는 녹아버리고 나는 금이 가고 정체성은 상실된다. 이들이 가라앉기를 그치고 표면의 특이성들을 해방시킬 때, 무의미와 의미는 그들의 역동적 대립관계를 끝내고, 결국 표면의 무의미와 그 위를 미끄러지는 의미로서 정적발생의 공현존 속으로 들어간다. 비극과 얄궂음/아이러니는 새로운 가치, 즉 익살/유머에 자리를 내준다. 왜냐하면 아니러니가 존재와 개체의 또는 나와 표상의 공외연성이라면, 익살은 의미와 무의미의 공외연성이기 때문이다. 익살은 표면들과 안감들, 노마드적 특이점들의 기법이며, 언제나 자리 옮기는 우발점의 기법이다. 그것은 정적발생의 기법이며, 순수사건의 할-줄-앎이며, 또는 ‘4인칭 현재’이다. 모든 지시작용, 기호작용 현시작용은 유보된다. 모든 깊이와 높이는 소멸된다(248-9).
광대의 익살은 리어왕이 처한 사건에 하나의 표면효과를 일으킨다. 익살은 역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건의 표면효과이다. 사건의 표면효과는 광대가 리어왕의 분신으로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그의 광기를 여과시키는 역할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광대가 리어왕의 인칭과 개체성을 완전히 비인칭적이고 비개체적인 것으로 만들 때, 즉 그가 리어왕과 자신 사이의 인칭과 개체성의 구분을 소멸시킬 때 생겨난다. 광대는 리어왕의 타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리어왕은 광대의 동일자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광대는 리어왕과, 리어왕은 광대와 관계를 맺는다. 바보광대가 리어왕에게, 리어왕이 바보광대에 관계맺는 것은 오직 사건 속에서이다. 요컨대 리어왕의 딸 거너릴(Goneril)과 리어건(Regan)의 배신 앞에서, 폭풍우가 내리치는 황야에서, 광기의 순간에서, 광대와 리어왕은 사건의 표면효과를, 즉 의미를 생산한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Lear: Does any here know me? This is not Lear:
Does Lear walk thus? speak thus? Where are his
eyes?
Either his notion weakens, his discernings
Are lethargied-- Ha! waking? 'tis not so.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Fool: Lear's shadow(sc1, iv:223-228).
리어왕: 여기 나를 아는 놈 있느냐? 이건 리어가 아니다.
리어가 이렇게 걷다니, 이렇게 말하다니,
리어의 눈은 어디 있느냐?
머리가 둔해지고 분별력이 잠들었느냐? 하! 깨어 있느냐? 그렇진 않구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
광대: 리어의 그림자지.
딸에게 배신당한 리어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그림자일 때, 즉 사건의 실체나 동일성으로가 아니라 사건 속의 이마주로, 시물라크르로 존재할 때이다. 리어는 자신의 존재가 사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실체가 불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사건 속에서 리어왕의 실체는 소멸되고, 오직 사건 속에 존재하는 표면효과로서의 자신의 그림자만이 있을 뿐이다. 광대는 시물라크르의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광대의 익살은 곧 사건의 표면효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광대의 익살이 리어왕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5. 사건의 시뮬라크르와 반플라톤주의
시뮬라크르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들뢰즈의 논의로 돌아가야할 것 같다. 들뢰즈는 본질과 외관, 이데아와 그림자,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시뮬라크르를 구분한 플라톤의 논의에서 시뮬라크르-사건의 의미를 찾는다. 플라톤의 이러한 이분법은 사물라크르의 자연발생적인 사건효과를 억제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즉 플라톤은 “좋은 복사물들과 나쁜 복사물들을, 아니면 차라리 보다 근거있는 복사물들과 비유사성의 끝없는 심연 속에 놓여있는 시뮬라크르를 구별함으로써 지원자들을 선별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뮬라크르에 대한 복사물들의 승리를 확보하는 것. 시뮬라크르들이 제멋대로 기어올라와 여기저기까지 ‘끼어들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것이다”(410-1). 시뮬라크르-사건 속에서의 리어왕은 사건 이전의 리어왕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사건 속의 리어왕은 과거의 리어왕을 복사한 것이 아니다. 사건 속의 그는 “복사물들의 유사성의 원천이 되는 동일자와 관련해서 정의할 수 없”(411)는 새로운 비유사성을 가진 존재이다. 사건 속의 리어왕은 도상적이고 형상과의 유사성을 지닌 그림자가 아니라 도상을 지워내고 형상을 통하지 않는 그림자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다른 종류의 그림자를 시뮬라크르로 정의했고, 이 시뮬라크르는 “공격, 끼여듦, 전복을 통해, ’아버지에게 반항해서, 그리고 형상을 통하지 않고 지원하는 존재들이다”(410). 리어왕은 사건 속에서, 즉 딸들의 궁정에서, 황야에서, 들판에서 희생자의 모델이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는 그림자가 된다. 그 그림자는 바로 플라톤주의적 형상의 타파이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의 타파는 다음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들을 기어오르게 하라. 그리고 도상들이나 복사물들 사이에서 그들의 권리를 긍정하라”(417).
사건의 표면효과로서 의미는 그런 점에서 미시적이고 탈영토적이다. 가타리는 고정되고 통사화되고 수사화된 기표적 기호학의 언표지층과 미시분절적이고 탈영토화되고 물질적 강렬도를 가진 비기표적 기호론의 언표지층을 구분한다. 전자는 영토화하려는 권력관계를 가진 의미작용의 논리이고, 후자는 탈영토화하려는 미시욕망의 집합적 배치이다. 가타리는 이런 설명 속에서 왜 기표와 비기표를 구분하려 했을까? 그것은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표현의 미시욕망을 표상화․영토화하려는 기표적 의미작용과 그 욕망의 흐름을 자유롭게 하고, 그 강렬도를 높이는 비기표적인(비표상적인) 의미실험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구분에서 후자의 관점은 텍스트에 어떤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두가지의 논의가 가타리에게서 중요하다. 하나는 소쉬르의 기표-기의가 안정된 표상관계를 형성하는 것과는 다르게 예름슬레브의 표현-내용의 구분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층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표현-내용의 구분은 형식-실체의 구분과 그 구분들의 물질적 힘을 의미하는 질료와의 배치를 통해서 다중적인이고 복수적인 기호의 흐름을 생성한다. 들뢰즈는 예름슬레브의 기호의 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없는 신체, 다시 말해 형식화되지 않고 비유기적이며 비지층화되거나 탈지층화된 신체와, 그 신체를 흐르는 모든 흐름, 즉 원자 이하의, 분자 이하의 입자들, 순수한 강렬도, 전생명적이고 전물리적인 자유로운 특이성을 질료라고 불렀다. 그는 그 형식화된 질료를 내용으로 불렀다. 이것은 두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러한 질료들이 ”선택된다“는 점에서 실체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특정한 질서에 따라 선택된다는 점에서 형식이다(내용의 실체와 형식). 그는 기능적 구조를 표현이라고 불렀는데, 그 역시 두 가지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 고유한 형식의 조직이란 관점과 그 화합물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실체의 관점이다(표현의 형식과 실체)(G. Deleuze/F. Guattari, 1987:43).
들뢰즈의 이 지적은 텍스트 질료의 분자적이고 다층적인 흐름들이 기호의 의미들로 변환되는 과정이 다층적이고 우발적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텍스트의 물질적 형태로서의 질료가 기표-기의의 이분법적 표상관계를 넘어서 의미의 다층적인 배열 안으로 변환되는 경로를 지도그리는 실천은 재현모델과 생산모델의 부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요컨대 예름슬레브의 기호론은 의미의 생성과 감각의 변이를 극대화하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는 문제를 가능케 했다.
둘째로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가 의미 실천의 능동성을 담지한다는 점이다. “‘기표+기의=의미작용’이란 방정식이 환상의 개인화에 예속집단에 속하는 반면,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기계적 무의미한 의미’라는 방정식은 집단환상에 주체집단에 속한다”(가타리, 1998:293)라는 지적은 기표의 표상을 거부하는 기계적 욕망이 그 어떤 것에 예속되지 않는 표현의 집합적인 실천을 기획한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는 외디푸스적 표상체계 근거한 정신분석의 해석과 대조적으로 욕망의 미시정치를 기도하는 분열분석의 실천과 그 맥을 갖이한다. “분열분석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번역불가능한 기호적 실체의 형성을 도움으로써, 욕망의 의미와 무의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주체화양식을 의미작용 및 지배적인 사회규칙에 적응하도록 하지 않음으로써 기호적 다중심주의를 촉진한다”(318).
텍스트의 의미론은 결국 텍스트의 질료의 힘, 표현의 강도, 감각의 변이를 어떻게 극단적으로 실험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 관건이라 할 수 있다. 가타리는 비기표적 기호계의 강렬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예술적 기호계로 보았는데, 이는 예술적 기호가 갖는 감각의 생성이 탈영토적인 의미들의 탈주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예술작품들은 “감각들의 집적, 지각들과 정념들의 복합체”(들뢰즈/가타리, 1995:234)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미적 대상에 대해 지각을 통해 어떤 정서를 갖는다면, 그것은 대상을 모방(동일화)하거나 다른 형태로 전이(유사화)되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의 실체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욕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그것을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이며 “생산된 유사함”(249)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정념이라는 것은 하나의 비텍스트적인 생성, 즉 은유가 아니라 기계이며, 표상이 아니라 생산의 힘이다. 텍스트의 의미론적인 층위는 바로 텍스트의 비텍스트적 표현의 끝없는 자기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의미론적 층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들뢰즈가 “표현의 펼침/접힘의 운동, 문체의 횡단성, 이미지들의 공명효과”는 중요한 토픽으로 볼 수 있겠다.
6. <의미의 논리>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건의 표면효과
1) 제 1계열 순수생성
-임(be)과 되기(become): 크다와 커진다/작다와 작아진다
“아 기분이 조금 이상해! 마치 만원경처럼 잡혀지는 것 같아”
그런데 사실이었다. 앨리스의 키가 10인치가 되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정원으로 통하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꼭 알맞은 키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앨리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혹시 키가 더 줄어들면 어떻게 하나 조금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어 잠시 기다려보았다
앨리스는 일어나서 탁자로 가서 자신의 키를 재보았다. 분명히 2피트(60센치)였는데, 아주 빠르게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들고 있는 부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부채를 던져버렸다(29쪽)
무엇을 먹거나 마실 때면 반드시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니까. 이 병속의 것을 마셔도 그렇게 되는지 한번 볼까. 이것으로 다시 키가 자라게 되면, 그렇게 되는지 한번 볼까. 이것으로 다시 키가 자라게 되면 좋을 텐데. 이렇게 작아진 것도 이제는 피곤해.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일이 일어났다. 반병을 마시기도 전에 머리가 천장에 닿아 버린 앨리스는 고개가 부러지지 않도록 얼른 몸을 굽혀야 했다(55쪽).
-생성의 동시성: “앨리스가 이전보다 더 커지는 것과 이후보다 더 작은 채로 있는 것은 동시적이다(의미의 논리, 43쪽)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가는 것은 생성의 본질에 속한다(43쪽)
-무한한 동일성: “순수생성의 역설은 다름 아닌 무한한 동일성이다. 과거와 미래, 어제와 내일, 더와 덜, 너무와 아직,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 등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무한한 동일성”(46쪽)
“그럼요 적어도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한 거에요. 그러니까 둘 다 똑같은 의미잖아요.”
모자장수가 말했다.
“조금도 같지 않아!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먹는 것을 안다와 내가 아는 것을 먹는다가 같은 의미가 되는 셈이지!”
삼월토끼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얻는 것을 좋아한다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는다가 같은 의미가 되는 거란 말이야”
겨울 잠쥐가 잠꼬대를 하듯이 덧붙여 말했다.
나는 잠잘 땐 숨쉰다와 나는 숨 쉴 때 잠잔다가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지.(107)
삼월 토끼가 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앨리스에세 말했다.
자를 조금 더 하겠니?
앨리스는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아직 한잔도 마시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마실 수는 없잖아요.
모자 장수가 말했다. 한잔도 마시지 않았으니 조금 더 마실 수는 있지만 덜 마실 수는 없다는 뜻이지, 그렇지.(115)
-사형집행관의 주장의 고양이의 몸이 없어서 머리를 자를 수 없으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해본 적이 없으므로 결코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왕의 주장은 머리가 있으면 머리를 벨 수 있는 것이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136쪽).
-인칭적 동일성의 흔들림
고유명사 또는 단수명사는 한 지식의 항구성에 의해 그 동일성을 보장받으며 이 지식은 일정한 고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지와 휴지(명사적인 경우이든 형용사적인 경우이든)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들 속에 구현된다. 그래서 인칭적인 자아는 신과 세계 일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명사와 형용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정지와 휴지의 명사들이 순수생성의 동사들에 연결되고 사건들의 언어로 미끌어 들어갈 때, 자아, 세계 신 등의 동일성은 상실된다. 역설은 양식(유일한 의미, 방향, 고정된 동일성의 고착)을 파괴한다(의미의 논리, 47쪽).
하루 밤 사이에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잘 생각해보자.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내가 어땠었지? 약간 이상했었지. 내가 전과 똑같지 않다면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구란 말인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야!(27쪽)
에벌레와 앨리스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애벌레가 천천히 수연통에서 입을 떼며 축 늘어진 나른한 음성으로 앨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넌 도대체 누구니?
처음 건네는 말치고는 친근한 인사말은 아니었다. 앨리스는 약간 겁먹은 듯이 대답했다.
현재는 저..... 저도 잘 몰라요. 선생님, 적어도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해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제가 어려 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68쪽).
2) 제2계열: 표면효과
-스토아적 이분법
심층적이고 실재하는 존재함의 수준: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물질적인 무한한 복수성의 수준
사태 와 사건, 현재와 무수히 분할된 과거와 미래,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명사/형용사와 동사 능동, 수동과 능동과 수동의 결과 실존과 존속
생성이란: 사건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효과. 비물질적 사건
혼잣말을 하면서 위를 올려다 본 앨리스는 다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가 물었다.
너 아까 피그(pig)라고 말해니 아니면 피그(fig)라고 말했니?
앨리스가 대답했다.
돼지라고 말했어.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머리가 어질어질 해.
고양이가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이번에는 꼬리 끝에서부터 아주 서서히 사라지면서 잠깐 동안 빙긋이 웃더니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앨리스는 아니, 이럴 수가! 웃지 않는 고양이는 종종 봤지만, 고양이가 사라져버렸는데, 빙긋이 웃는 모습만 남다니! 이렇게 이상한 일을 처음이야!라고 생각했다(109-101쪽).
3) 제 5계열 의미
사물과 명제 사이, 주어와 동사 사이, 지시와 표현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것.
무한 소급 내지는 증식의 역설(프레게의 역설)“ 각각의 이름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의미의 논리, 88쪽). 의미는 신체의 작용/반작용에서 파생된 결과이기에 여기서 떼어 내 고정하는 순간, 즉 그것에 존재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의미가 추출되어야 할 대상이다. (고양이 없는 고양이의 웃음/촛대 없는 촛불)
의미의 인과율은 환영적이다. 따라서 의미의 인과적 연관의 분석만으로 어떤 하나의 의미에 이를 수 없다(의미의 논리, 93쪽).
고양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도 알다시피 개는 말이야. 화가 났을 때는 으르렁거리고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흔들지. 그런데 나는 기분이 좋으면 으르렁거리고, 화가 나면 꼬리를 흔든단 말이야. 그러니깐 난 미친 거야.
앨리스가 말했다.
나는 으르렁거린다고 말하지 않고 가르랑거린다고 말하거든.
고양이가 말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데 넌 오늘 여왕님과 크로케 경기를 할거니?
앨리스가 말했다.
나도 진짜하고 싶어. 그런데 아직 초대를 받지 못했어.
그렇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이렇게 말하고 고양이는 사라져버렸다.
앨리스는 이런 일로 이제 거의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고양이가 있던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났다.
고양이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기는 어떻게 된거니? 그걸 물어본다는 게 깜빡 잊었어.
앨리스는 고양이가 다시 돌아 온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돼지로 변해버렸어.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어.
고양이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사라졌다(99쪽).
공작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 이유는 네 홍학이 어떻게 성깔을 부릴지 몰라서 그렇단다.
한번 시험해 볼까?
앨리스는 아주 많이 걱정스러웠으므로 신중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물어(bite)버릴지도 몰라요.
그렇지 홍학과 겨자는 둘다 매워(bite). 여기에 어울리는 격언은 끼리끼리 어울린다라는 거야.
앨리스는 대꾸했다.
그런데 겨자는 새가 아닌 걸요
공작부인이 말했다.
그래 맞는 말이야. 넌 언제나 명확하구나!
앨리스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겨자는 광물질이에요.
앨리스의 말이라면 무조건 찬성하겠다는 기세로 공작부인이 말했다.
물론 그렇지. 가까운 곳에 커다란 겨자 광산(mine)이 있단다. 딱 어울리는 교훈은 내 것(mime)이 많아지면, 네 것은 그만큼 줄어준다는 것이지(143-4쪽).
4) 제13계열: 분열자와 어린 소녀
의미를 만들어 내는 무의미(캐롤)과 의미를 먹어치우는 무의미(아르또)
캐롤에 대한 아르또의 발언: 무의미는 더 이상 의미를 제공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작은 소녀들과 아이들 가운데 있다고 믿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광기 안에 있었다(의미의 논리, 165). 이제 분열자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를 복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제거된 표면 아래의 심층에서 말을 파괴하는 것. 정동을 쫒아내는 것. 신체의 고통스러운 열정을 승리의 행위로, 복종을 명령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173쪽).
고양이가 말했다.
그럼 계속 걸어가면 분명히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거야.
앨리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것을 하나 더 물어보려고 했다.
그곳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고양이가 오른쪽 발을 쳐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모장 장수가 살고.....
그리고 이번에는 왼쪽 발을 흔들며 말했다.
저쪽 방향으로 가면 삼월토끼가 산단다. 그들은 둘 다 미쳤으니까
앨리스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난 미친 사람들에게는 가고 싶지 않은 걸.
고양이가 말했다.
하지만 나도 그건 도와줄 수가 없어. 너와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우리들은 모두 미쳤어.
앨리스가 물었다.
내가 미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넌 틀림없이 미쳤어.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올 리가 없지
앨리스는 전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네가 미쳤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 (중략)
고양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도 알다시피 개는 말이야. 화가 났을 때는 으르렁거리고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흔들지. 그런데 나는 기분이 좋으면 으르렁거리고, 화가 나면 꼬리를 흔든단 말이야. 그러니깐 난 미친 거야.
(97-8쪽).
왕이 화난 어투로 이렇게 덧붙이자 모두들 웃었다. 그리고 왕은 그날 거의 스무 번도 외쳤던 말을 했다.
자 배심원들 판결을 내리세요
앨리스가 소리쳤다.
안돼! 안돼! 선고부터 하고 판결은 나중에.
여왕이 얼굴이 벌개 지면서 소리쳤다.
입닥쳐!
앨리스가 말했다.
싫어요!
여왕이 목청껏 소리쳤다.
저 애를 처형해라!(198쪽)
5) 33계열 앨리스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심층의 앨리스: 심층으로의 한없는 추락으로 시작하여, 심층의 분열적인 요소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앨리스. (먹기, 마시기, 눈물바다).
-상층의 앨리스: 2층을 가득채운 앨리스, 토끼와 도마뱀을 몰아내는 앨리스, 상층의 목소리로서 나무 위의 고양이
-표면의 앨리스: 카드맨들의 왕국, 끝임없이 목을 치라며 거세하는 여왕.
경기 내내 여왕은 끝임 없이 다른 선수들과 싸우면서 저자의 목을 베라 또는 저 여자의 목을 베라라고 소리쳤다. 병사들은 여왕에게서 사형 선고를 받은 선수들을 체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치 모양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30분 후에는 병사들이 전부 가버렸다. 왕과 여왕, 그리고 앨리스는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체포되었다(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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