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위하여] 여행가방 편
김경미
1. 여행가방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보면 특이한 여행가방 축제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매년 1월초, 독일의 한 항공사가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크의 한 중학교 체육관에서 여는, 승객들이 분실하거나 잊고 간 후 보관기간이 지나도록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들을 경매에 붙이는 가방축제다.
그런데 경매에 나온 가방들은 안이 텅 빈 여행가방들이 아니다. 마약 포함 여부만을 검색한 뒤 가방 안의 모든 내용물을 원래 그대로 둔 채 밀봉한, 누군가의 여행물품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들어 있는 여행가방들이다. 밀봉했으니 사려는 사람 누구도 내용물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방을 경매받은 새주인들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석에서 가방을 개봉한다. 그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내용물들에 따라 마치 복권 추첨 때 같은 탄성이 쏟아지기도 하고 환호가 터지기도 한다. 가방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이유로 여행 중이었는지, 한 사람의 여행과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짐작되거나 추측되기도 하고 그 사람과 갑자기 낯선 사람의 여행 소지품을 갖게 된 새주인 간의 운명의 끈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지기도 한다. ‘여행가방’이라는 껍질이 아니라 ‘누군가의 여행과 삶’이라는 내용이 경매되는 축제인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의 표현으로라면 <몇몇 물건들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 운명의 발견>의 축제 현장이기도 하다.
공항 검색대에서 잠시 내 여행가방이 그 체육관에서 공개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네 개의 작은 바퀴 중 두 개의 바퀴가 빠지고 없는 이 여행가방의 주인이 한국에서 시를 쓰고 방송작가 일을 하는 한국의 한 중년여성이란 것을, 이제 더는 지금까지의 인생의 가치관이나 기준으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함으로 그 내용물들을 꾸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까, 짐작해본다.
2.
몇 달 전에 발표한 시 속에 썼었다.
<앙코르와트엔 아직 가지 못했습니다 / 주황색 가사(袈裟) 입은 촛불들 간절할수록 꺼지기 일쑵니다> - 시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 일부
그런데 이제 마악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여행가방을 꺼냈다. 간절할수록 꺼지기 일쑤던 바람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자기 안에 깃든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나 허약과 정면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치명적인 약점은 죽음에의 불안과 공포다. 여행을 준비하려는 순간부터 대형비행기 사고가 왜 굳이 나를 피해가겠는가 숨이 막힌다. 비행기 사고를 피하고 나면 여행 목적지의 위험성이 굳이, 하필 나를 피해갈 것 같지 않다는 짐작에 또 숨이 막힌다. 가령 이번 여행지인 앙코르와트의 캄보디아는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우기 때 벼락 맞아 죽는 사망자가 훨씬 많은 곳이다. 지금 캄보디아는 우기다. 나 한 사람을 위해 태양이 솟지는 않아도 벼락은 쉽게 떨어질 것 같다. 잘못과 실수와 게으름과 불신이 많았던 인생이니까.
그러니 여행가방 안에 가장 먼저 죽음에의 불안을 잊게 해 줄 강력한 불안진정제들을 챙긴다. 그것들은 작은 알약들이기도 하고 한 권의 책이거나 화집이기도 하고 몇 편의 영화나 음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죽음에의 공포가 나만의 약점이 아니라는 생각,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된 치명적인 약점이 <죽음>이란 생각. 낯선 곳으로의 여행가방을 챙기면서 한번쯤 자신의 인생을 여행 이전까지로 마감시켜 보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란 생각을 반복하면서 옮겨 둔 <강하고 담대하라>는 문구가 적힌 작은 아크릴 명찰이기도 하다. 불안해지면 비행기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이름이라도 되듯 그 명찰을 꺼내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것이다. 내가 내 짐작과는 달리 생사의 이치에 아직 얼마나 미숙하고 비겁하며 허황된지를 깊이 반성하면서.
그리고 또 여행가방 안에는 가장 싫증난 옷과 가장 아끼는 옷을 동시에 챙겨넣는다. 싫증난 옷은 여행지에서 입고 난 다음 그대로 두고 올 것이다. 그 옷과 함께 너무 익숙한 모든 것들에의 싫증과 짜증, 권태, 무기력 같은 것들도 떨쳐두고 올 수 있길 바라면서. 아끼는 옷과 좋아하는 옷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되므로 반드시 챙긴다.
거기에다 이번엔 연필과 색연필을 더 챙겼다. 그곳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한 블로그에서 본 글 때문이었다. 벼락 같은 원시적인 심판에의 두려움을 다소나마 탕감받아 보려는 원시적인 속셈에서다.
3.
역시 비행기에서는 결코 잠들지 못한다. 덮개 없는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바다 위 허공을 까마득히 떠가는 느낌과 싸우며 여행에서 자신의 강점만을 생각하고 의지하는 사람들. 모험심 많고 겁 없고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잘 자는 이들. 낭만과 설렘 외에는 다른 여행 준비물이 거의 없는 사람들. 그런 이들의 가방은 얼마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며 역동적일 건가만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내내 깨어 있는다. 신발을 한쪽만 신고 나온 듯 마치지 못하고 온 일들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그러다 내린 한밤중의 공항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그건 국제공항이 아니라 시골역사였다. 방학을 맞아 시골 친척집에 내려간 여학생을 저 먼 추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 문학소녀의 가방 안에 든 책과 공책들도 끄집어냈다. 두 개의 바퀴가 없어도 여행가방은 가볍고 빠르게 잘만 따라왔다. 그 여행가방을 버리고 새것을 사서 돌아가려던 계획을 바로 취소해 버렸다.
그러나 다음 날 하루 종일 몇 개의 사원들을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서울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 많은 사원들의 섬세한 탑과 부조와 창문과 회랑들, 그런 사원들을 몇 개의 뿌리로 휘감아 삼키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을, 밀림의 흔적을 더 봤다가는 마음 안에 다른 것을 위한 공간이 하나도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곳을 계속 관광 차원으로만 보고 돌아다니게 될 시간들이 지레 불편했다. 어서 익숙한 책상으로 돌아가 오늘 본 모든 것들을 천천히 곱씹으면서 정리하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듯했다.
하지만 다음 날 여행이 관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시금 기웃댄 사원들은 전날과 달리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무들이 자신들을 집어삼키는, 사람들로부터 폐허라고 불리는 이곳에 좀 더 오래 머물며 더 천천히 인간과 자연과 시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해 주었다. 왜 그곳이 특히 더 내 마음을 뒤흔드는지를 좀 더 오래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더위를 잘 안 타고 땀이란 걸 좀체 흘리지 않는 편인데도 길에 나서면 땀이 툭, 떨어졌다. 솟거나 맺히는 느낌을 채 받기도 전에 이미 몸의 어디선가 툭, 떨어지거나 흘러내렸다. 힘든 움직임의 증거였던 땀이 그냥 무심히 있는 데도 굵은 빗방울처럼 떨어져내린다는 사실에 괜히 화들짝 놀라곤 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땀흘리는 노력이란 것, 그 노력을 매일 전면적으로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건 지구상의 열대나 온대의 위치에 따른 불행이나 행복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의 폭과 깊이의 차원에 관련된 또 다른 화두였다. 아무래도 세상은 인간의 것이기보다 자연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원에서도 길에서도 어디에서도 땀처럼 따라다닌다.
폭우와 벼락은 여행기간 중에 딱 한 번뿐이었다. 그 때문에 손해본 건 내 여행의 한결같은 최고절정인 하루치의 저녁노을뿐이었다. 나중엔 오히려 타들 듯한 햇빛을 가려줄 차양 그늘이라도 되듯 폭우와 벼락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서 그늘이 귀하다,라는 상투적인 구절을 수첩 한귀퉁이에 메모해 두기도 했다.
4.
옷 두어 가지와 낡디 낡은 가방 하나를 방 한 구석에 남겨두고 바퀴 두 개가 빠진 여행가방을 다시 챙겼다. 11$을 주고 산 원피스를 챙겨넣으려다 보니 <향중아들>이라는 한글명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한글이다. 상가집에 입고 가면 좋을 그 검정 원피스를 넣다 말고 떠날 때 했던 간절한 생각을 되돌려본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쪽으로 인생관을 대폭 수정해야 하리라며 떠난 여행이었다. 그러나 가방에 담아가고 싶은 단어들은 다시금 <폐허>나 <그늘> 같은 단어들이다. 태생이나 천성을 바꾸기는 힘든 걸까, 다시금 또 비행기에 대한 두려움이 솟는다.
돌아와서야 알았다. 비행기값의 절반에 해당되는 열쇠를 그곳에서 분실했으며, 그곳에 있을 때는 못 느꼈던 먼지가 목 가득히 쟁여진 채 따라왔다는 것을.
그러나 그 때문에 착 가라앉은 채 좀처럼 되돌아가지 않는 목소리를 오히려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라도 된 듯 기꺼워하면서 이제 비로소 앙코르와트 여행책을 읽는다. 다녀와서 읽는 여행책이야말로 가장 여행책답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행가방은 이제 창고 대신 책꽂이 옆에다 늘 세워두기로 했다. 내 자신이, 아니 인간이란 존재가 짐작과는 달리 생사의 이치에 얼마나 미숙하고 비겁하며 허황된지를 늘 보고 느끼기 위해서.
《문장웹진 2010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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