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최민석의 <누구신지……> 중에서

미송 2011. 8. 11. 08:15

최민석의 <누구신지……> 중에서 

 

 

 

1. 설렘은 익숙한 것도 낯설게 한다.(2011년)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랐다. 반라의 여성이 옆에서 곤히 자고 있기 때문이다. 간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깨질 듯이 무거운 걸 보니, 어제 필시 기억이 절단될 만큼 술독에 빠진 것 같다.

이때, 여자가 눈을 뜬다. 드러난 자신의 가슴과 그런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깜짝 놀라 말을 한다.

“어머. 누구세요?”

남자가 대답한다.

“네. 저. 그게…… 실은 저도 제가 누구인지…….”

이번에는 남자가 묻는다.

“……그런데 그……그쪽은 누구신지?”

이번에는 여자가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저도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대통령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아연한다. 분명 이상한 여자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여자와 함께 있는 게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은 듯하다. 분명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기묘한 아침이다.

 

이 둘은 부부다. 남자는 70세, 여자는 72세. 그리고 지금은 둘 다 치매에 걸렸다. 부부지만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 원래는 둘 만 살았지만, 남편이 먼저 치매에 걸렸고, 남편을 보살피던 아내마저 치매에 걸리자, 한 달 뒤 자식들은 부부를 요양원에 보냈다.

 

 

2. 당신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1964년)

 

오전 열시에 내리쬐는 7월의 햇살은 무자비할 정도로 따가웠다. 마치 창(窓)의 존재를 무시하듯이 창(槍)처럼 파고드는 햇살에 여해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여해(如海)는 가까스로 실눈을 하고서 한쪽을 떴다. 하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몸을 돌이켜 누웠다.

그러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하얀 이불을 가슴께까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반라의 여인이 옆에 누워 팔로 머리를 괸 채,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어머. 어머. 이러기예요.

네. 제가 뭐요?

아니. 다 큰 남자가 혼자 집에 못 간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겨우 물어물어 집 바래다 줬더니, 또 혼자 못 잔다고 울고불고 난리 쳐서 겨우 재웠더니,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제가 그랬다고요? 여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도 난리를 쳐서 잠든 거 확인하고 가려니까, 허리춤에 손을 스윽 감고 눕혀버린 게 누군데요.

네? 제가요?

아. 네. 그럼 제가 제 손을 허리 감았겠어요?

아니. 그럴 리가. 전 그럴 리가 절대 없다고요. 최근에 좀 우울하긴 했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어머. 누군 뭐, 그런 사람인지 아세요.

어떡하실 거예요. 전 정말 나이도 어리다고 해서 동생 데려다 준다는 생각으로 왔단 말이에요. 여경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여해는 여경(伃景)이 울자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서 무턱대고 달래기 시작했다.

아. 아니.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어젯밤 일이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 라고 말하자 여경은 더 크게 울어버렸다. 천장이 내려앉고, 방바닥이 일어날 만큼 서럽고 큰 소리였다. 여해는 어찌해야 할 바를 더욱 모르게 돼버렸다.

여경은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낼 만큼 꺼꺼거리며 울었다. 몸속에 있는 산소까지 모두 다 뱉었다 싶을 즈음에서야 여해를 쏘아보며 말했다. 울먹거렸고, 흔들렸고, 자칫하면 못 알아들을 정도로 여경은 빠르게 다그쳤다.

아니, 어젯밤에 사람을 그렇게 두 번씩이나 못살게 굴어 놓고, 이제 와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게 말이 돼요? 그래서 제가 다섯 번이나 물어봤잖아요. 저 사랑하냐고요. 그리고 분명 열 번이나 대답했잖아요. 죽을 때까지. 기억이 끊길 때까지. 나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할 거라고요.

여자는 성토하듯이 말을 뱉었고, 그 말이 어찌나 컸던지 여해는 행여 옆방에 소리가 새어 나갈까 여경의 입을 막아버렸다.

네? 제가 그런 말까지 했다고요? 아니. 어째서 제가 그런 말을.

제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전혀 없어요.

여해가 말하자, 여경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여해의 손을 뿌리치며 말을 쏟아냈다.

왜요. 술이 깨니까, 후회가 되나요. 친구들이랑 어울려 술 마실 때는 좋았다가, 몸속에 있는 답답한 것을 쏟아내니 이제 눈앞에 닥친 현실이 마음에 안 드나요?

여경의 눈에서 활이라도 날아올 것 같았다.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아. 여경 씨. 맞다. 여경 씨라고 했죠. 여경 씨는 지금 보아도 아름다워요, 라고 여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다. 마침 그의 시선은 여경의 가슴께에 닿았다.

어머. 어디를 보시는 거예요, 라며 여경은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더욱 끌어올렸다.

아.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어젯밤 같은 고백을 할 처지가 전혀 아니거든요.

흥, 이라며 여경은 폐에 있는 모든 공기를 코로 내뱉은 뒤, 뭐, 다음 주에 베트남 파병이라도 가시나요, 라고 쏘아붙였다.

아니요. 베트남에 가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저 다음 주에 입대하거든요.

 

말을 끝내자마자 여해는 눈앞이 번쩍거렸다. 보드랍게 보이는 여경의 손에서 몹시 매운 맛이 났다. 여해는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어질어질한 풍경 속에 바다처럼 그렁하게 맺힌 여경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라디오에서는 잡음과 함께 비틀스의 〈It won't be long(길지 않을 거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3. 함께 침묵하고, 함께 말하고(2011년)

 

이곳은 마치 세상이라는 생명체의 호흡이 정지한 듯 고요하다.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고 소리도 없다. 세상이 죽은 느낌이다. 삼십 분째 미동조차 없는 풍경과 적막만 이어지고 있다. 멀리 있는 트랙터마저 망자의 뼈처럼 일체의 움직임이 없이 경직돼 있다. 수십 년째 굳어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고요가 익숙한 것 같아요. 여경이 말했다.

그렇지요, 라고 최 씨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젊으신 분이 이곳에서 무얼 하시나요.

아.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줍니다. 여해는 강 건너에 있는 트랙터의 상표라도 알아내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아. 그렇군요. 여경이 대꾸했다.

네. 사람들은 말을 해야 살 수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으면 곤란하거든요. 이곳은 매우 조용합니다. 소리 자체가 별로 나질 않죠. 다른 곳에서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숨소리가 이곳에서는 확성기에 댄 것처럼 크게 들릴 지경입니다. 그러니 더욱 사람들은 소리를 그리워하죠. 아, 그렇다고 해서 제 말은 이곳에 소리가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다양한 소리가 있죠. 개소리, 문 여는 소리, 휠체어 끄는 소리, 주사 놓는 소리, 청진기 대는 소리…… 따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사람의 소리가 소중합니다. 특히 사람의 소리를 들어 주는 이가 없어서, 모두 공허한 상태로 지내고 있죠. 사람은 자신들에게 쌓인 경험을 말로 풀어내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거든요. 마치 낮에 산소를 마신 나무가 밤에 이산화탄소를 내뿜어야 살 수 있듯이 말이죠.

그러더니 최 씨는 카프리썬에 빨대를 꽂았다. 한 모금을 당기더니 쭉쭉 소리를 내며 이내 전부 마셔버렸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들어 드립니다. 상당히 노곤한 일이지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듣기만 하는 건데, 이곳에 와서 10kg이나 빠져버렸습니다. 어찌나 피곤한 일인지요. 열심히 먹고 있는데, 도무지 살이 찌지 않습니다. 저는 숫자나 보건학 용어라든지 어려운 말을 모릅니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상당한 칼로리가 소모된다는 정도는 압니다. 순식간에 허기집니다. 어쩔 때는 어지럽기까지 합니다. 영혼까지 소모될 지경이죠.

여해는 이번엔 팥빵을 하나 뜯어 단숨에 우걱우걱 먹어치웠다. 보통사람이라면 빵을 먹고 음료를 마실 테지만 여해는 그런 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럼 몹시 바쁘시겠네요. 여경이 다문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여해는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먹던 빵을 마저 꿀떡꿀떡 삼켰다.

그래서…… 요즘은 야근이 무척 많습니다. 그저께는 김 씨 노인이 밤새워 말하는 바람에 철야근무까지 했습니다. 글쎄 자식들이 자기 밥에 발기 억제제를 타고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몰래죠. 혹시나 늘그막에 늦둥이를 봐버려, 유산이 줄까 봐 그러는 거랍니다. 그래서 김 씨는 밥을 먹는 척하며 매번 숨겨 둔 봉투에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기는 빳빳하게 되지만, 계속 살이 빠진다고 하네요.

전 믿을 수 없다고 했고, 그러자 김 씨 노인이 여전히 빳빳한 자기 남근이 그걸 증명하지 않냐며 불룩한 가죽바지 앞부분을 쑥 내밀더군요.

가죽바지요?

네. 김 노인은 항상 가죽바지만 입습니다. 반들반들한 재질이지요. 군살이 없이 마른 상체와 가죽바지 아래로 불룩해진 남근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김 노인을 보니, 짐 모리슨이 떠오르더군요.

네. 짐 모리슨요?

도어스의 보컬 짐 모리슨 말입니다. 〈러브 미 투 타임스(두 번 해줘)〉를 불렀죠. 김 노인 역시 아직은 두 번 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밥을 제대로 못 먹는 바람에 어쩌면 이제부턴 힘들지 모르겠다며 상당히 낙심하더군요. 그래서 전 어쩔 수 없이, 제가 먹을 빵과 카프리썬 오렌지 맛을 김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듣는 것만 해도 상당히 칼로리가 소모돼 허기지는데, 꿀떡거리며 먹어대는 김 노인을 멍하게 보고 있자니, 저는 더욱 허기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빵을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여해는 급식으로 나온 여경의 단팥빵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아. 빵을 좋아하시는군요, 라고 여경이 물었고, 여해는 쑥스럽게 웃으며, 네, 여해는 빵을 몹시 좋아합니다. 한 번에 열 개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손으로 짧은 머리를 쓱쓱 내리며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기다렸다는 듯이 여해의 몸에서 떨어졌다.

여자는 미소 지으며 남자를 살짝 바라보더니 “제 이야기는 언제 들어 주실 건가요?”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마치 4월의 캠퍼스에 떠다니는 말처럼 들떠 있었다.

“글쎄요. 저도 일정이 빡빡해서. 최근에는 벽을 보고 혼자 말하는 노인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시간 내기가 여간 쉽지 않네요.”라고 염려 섞인 진지한 톤으로 답했다.

하지만 반드시 시간을 낼 겁니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시간은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 개념이니까요. 물리적 시간이 아무리 없더라도, 제 심리적 시간은 항상 여유 있습니다. 한쪽 방향을 위해 흘러가니까요, 라고 여해는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그러고선 여경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해와 여경이 주고받는 눈길은 달팽이 크림의 원료로 삼아도 손색없을 만큼 끈적끈적했다.

아, 몰라요, 라며 여경은 치킨 집 신장개업 때 춤추는 공기인형처럼 마구마구 몸을 흔들어 댔다. 여해는 어흠, 하며 서서히 일어나더니 〈러브 미 투 타임스(두 번 해줘)〉를 부르며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며 춤추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 왔고, 나뭇잎들은 바람에 부딪히며 음악을 만들어냈다. 강 건너에 걸려 있던 태양은 ‘마침내 강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연인을 만나러 간다’는 듯 발그레한 색깔을 발하며 강 속으로 서서히 잠겼다. 저녁 무렵 강 표면에는 채 식지 않은 열기를 마지막으로 불태우는 태양의 열정이 불그스레하게 번졌다. 죽어 가는 태양의 마지막 온기는 세상과 두 사람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주변은 점점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갔고, 두 사람은 마치 그림자극에 나오는 종이인형처럼 서로 같은 색이 되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둘은 춤을 추었다. 오래도록 추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춤을 추다가 지친 남자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여자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여자 역시 감상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감았던 눈을 뜨고 난 후 깜박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누구지요. 대통령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아연한다. 분명 이상한 여자다. 그런데, 이 이상한 여자와 함께 있는 게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다. 이 둘은 부부다. 남자는 최여해. 여자는 주여경.

둘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병원에서 요청한 일은 아니다.

 

둘은 해가 지는 저녁노을 아래,

구름이 잠자는 5월의 하늘 아래,

바람의 입김이 시원한 여름밤의 한가운데,

세상이 약속한 듯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는 가을 안에서,

서로의 말을 하고, 서로의 말을 들어 주었다.

 

가끔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가끔 손을 잡기도 했다.

가끔 춤을 추기도 했고, 가끔 여해가 여경을 안으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설렘과 어색함, 익숙함과 낯섦이 둘을 감쌌다.

 

충일했던 생을 마감하는 태양은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 사이로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와 빛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4. 사랑의 증명(1980년)

 

여해에게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은 시간이었다.

여해는 자신의 사랑이 호르몬의 생성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육체적 향연에 대한 부채감으로 유지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시간으로 증명해 보였다. 여해에게 사랑이란 대상이 먼 곳의 어느 무리에 섞여 있어 알아볼 수 없을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그 특정한 곳을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감정은 힘이 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둘은 서로에게 향하게 되어 있다. 그 감정은 강한 자성을 가지고 있다. 완전히 분리된 세상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밖에 없다. 서로 발길이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존재한다면, 서로의 발길이, 눈빛이, 피가 같은 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어떤 마성 같은 것에 이끌려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되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저 그 입에서 나오는 음파와 공기 자체에 내가 흔들리고 만다. 여해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이런 생각에 빠졌는지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 그저 그런 감각이 자신을 지배할 뿐이다. 물론 이런 것이 사랑이라면, 전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경을 향해서만은 백 퍼센트 가능할 것 같았다.

여해는 여경을 생각할 때면 이미 자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아니었던 그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완전하게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돼버렸다. 여해는 여경으로 인해 또 다른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제대를 한 후, 여경을 만나지 못했다. 여경과 함께 보낸 일주일의 기억이 군에 있는 내내 자기 주위를 감돌았다. 함께 눈을 뜬 여해와 여경은 일주일 동안 모든 공기를 함께 썼다. 그날 아침부터 입대하는 날 아침까지 모든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육체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여경은 첫 만남부터 순서가 엉켰으니, 그 순서를 되돌려야 한다고 했다. 여해는 동의했다.

하지만 아무리 뇌를 짜내도 함께 보낸 밤에 대해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하려 해도 더욱 머리가 텅 비어지는 느낌만 가득했다. 마치 배가 표류해 정신을 차려 보니 가려던 섬에 도달한 느낌이다. 주변에는 난파한 배의 조각들만 흩어져 있고, 어떻게 그 섬에 도착했는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애초에 가려 했던 섬이다. 물론 돌아갈 배는 사라졌으니 그 섬에 사는 수밖에 없다. 그 섬이 낯설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다. 방에는 마치 난파선의 흔적처럼 여해와 여경의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대신 아침의 느낌은 선연했다. 아침에 자신을 바라보던 여경의 눈동자와 곧 떠나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자신의 뺨을 때렸던 그 손의 느낌. 그것은 실재하는 아픔이었고, 그만큼 생생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체의 분노가 없었다. 오히려 아쉬움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렬했던 것은 눈동자였다. 그날 아침 여경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흔들렸다. 그 눈동자는 얼핏 보더라도 그렁하게 젖어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 가득 고인 감정들은 마치 차 안에서 흔들리는 위태로운 물잔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여해가 느낀 그날의 여경은 어쩌면 영원히 이별의 대상으로 남을지 모르는 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꾸역꾸역 삼켜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착각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해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여해가 속한 이해의 세계에서 그것은 착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경은 계속 여해를 피했을까.

여해가 휴가를 나왔을 때도, 제대를 했을 때도, 그리고 첫 시집을 냈을 때도, 여경은 없었다. 여경을 알던 여해의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겼고, 여경의 집도 사라졌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여해는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없었지만 꾸준히 보냈다. 하지만 제대를 하고 나서야 그 집에 여경이 더 이상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여경의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여해는 의아했다.

어째서 여경은 그런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일까. 64년의 봄은 여경과 여해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경에게 여해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수신자가 없다면 왜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오지 않은 걸까. 혹시 여경은 추리영화처럼 이곳에 이따금씩 와서 편지를 몰래 가져가는 게 아닐까. 실제로 그런 가능성을 지울 수 없어, 여해는 며칠 동안이나 여경의 집 앞에서 기다렸지만 여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여경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거나, 아니면 여해의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여해는 몹시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여경의 집이 있던 골목길은 세상의 모든 암흑을 집결해 놓은 것처럼 캄캄해 보였고, 밤바람은 북극의 냉기를 오랫동안 얼려 놓은 것처럼 차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여경이 없으니, 자신의 존재도 점점 희박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여해는 여경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집 앞에 가서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건 여경을 기다렸다. 그러므로 여해에게 여경에 대한 기다림은 일상이 돼버렸다.

 

여해는 시인이 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언제나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여해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어느 날 자리를 잡고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마음을 글로 쏟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창작이라기보다는 언어의 형태를 빌린 감정적 배설이었다. 모든 것은 여경 때문이었다. 여경에 대한 생각이 여해를 온통 지배해 여해는 그것을 글이든, 말이든, 땀이든, 무엇으로든 표출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그 대상이 언어였을 뿐으로, 여해는 언제나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인이 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여경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경은 여해의 시가 출판이 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 만한 정도가 되었을 때도 찾아오지 않았다.

여해는 생각했다. 여경이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몇 단계를 거쳐서라도 여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몇 단계를 다시 거슬러오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여경은 그러지 않았다.

즉, 여경은 여해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거나, 여해로부터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경이 여해에게 큰 감정을 느끼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소식을 들었다면 안부 정도는 전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부는 물론 존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여해가 이해하기로 여경은 필시 자신에게 감정을 느꼈다. 분명 뜨거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연락이 도저히 닿지 않거나, 애써 피하고 있다. 여해는 이 말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연락이 도저히 닿을 수 없거나, 애써 피하고 있다.

여경은 내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거나, 나로부터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도망가고 있다. 닿지 않거나, 피하고 있다.

그러다 여해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둘의 가능성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여경은 나의 연락이 도달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다른 의미로 그것은 나의 연락이 도달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고, 그러므로 여경은 나로부터 의식적으로 도망가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세상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다.

생각이 이까지 미치자 서른아홉 살의 여해는 몹시 슬퍼졌다.

여해는 결혼도 않고, 여태껏 여경만 기다렸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연애도 하고 육체적 관계도 가져 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여해는 여경이 아닌 어떠한 사람과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뿐이었다.

 

 

5. 비는 모든 것을 씻을 듯이 내리고(1993년 봄)

 

여해는 여느 날처럼 오디오세트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었다. 자신이 듣는 곡을 모아서 녹음한 테이프였다. 가장 먼저 에릭 클랩튼의 〈Alberta〉가 나왔고, 그 뒤 스티비 윈더의 〈Lately〉, 사이먼 앤 가펑클의 〈Wednesday morning 3 AM〉이 차례로 나왔다. 그리고 여해가 의도한 무음이 30초 정도 흐르고, 빌리 조엘이 〈she's always a woman to me〉와 〈Just the way you are〉를 연달아 부르면, 다시 등장한 사이먼 앤 가펑클이 〈April come she will〉을 불렀다. 무음 탓인지 마치 앞의 곡들과 무음 뒤의 곡들은 서사 구조가 다른 두 개의 단막으로 나눠진 느낌이었다. 마지막 무대는 언제나 비틀스가 등장해 〈It won't be long〉을 부르고, 〈In my life〉로 무대를 마쳤다. 여해는 신중히 곡을 선정했고, 곡과 곡 사이의 연계성을 세심하게 살폈다. 마치 테이프 하나로 오페라를 만든다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여해는 그런 마음을 담아 녹음했다.

곡의 흐름은 외도한 여자를 기다린다는 것이었고, 그 기다림이 결코 길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곡인 〈In my life〉를 듣자면, 왠지 기다림과 떠나보냄이 삶 자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날도 여해는 어김없이 카페 문을 열고, 에릭 클랩튼의 기타를 깨웠다. 여해는 십 년 전부터 시를 쓰지 않았다. 대신 조금씩 모아 둔 돈으로 카페를 열었다. 〈여전히〉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장소는 여해와 여경이 술에 취해 첫날밤을 보냈던 당인동 자취방이 있던 곳이었다. 64년의 그곳은 세월이 지나 한강시민공원이 생겼고, 그 앞에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들어섰다. 도로에는 나무가 줄이어 심어져 있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졌고,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이 흐드러지는 도로였다. 가을에는 질세라 낙엽이 떨어졌고, 일조량은 풍부해 언제나 도로에는 따뜻한 햇살들이 넘실거렸다. 여해는 예전 자신의 자취방이 있던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자, 그 일층을 세 얻었다. 기본적인 공사는 인부들이 했지만, 웬만한 인테리어는 직접 했다. 카페에 놓을 가구를 직접 합판과 원목을 적절히 섞어 자르고, 못질하고, 망치질 했고, 정성스레 니스 칠까지 했다. 카페 안에는 비틀스, 롤링 스톤스, 도어즈, 더 후, 애니멀스 등의 60년대 록그룹의 LP가 꽂혀 있었고, 파블로 네루다, 황지우, 기형도 등의 시집도 누군가의 손에 펼쳐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여해는 손님이 없을 때면, 소파에 몸을 푹 맡긴 채 벽 한쪽 전체를 드리우고 있는 유리벽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가득한 날에는 유리벽에 희뿌옇게 쌓인 먼지를 보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유리를 때리는 빗소리를 한없이 듣고, 그 빗물이 유리벽에 부딪혀 미끄러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날도 유리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해는 유리벽에 낀 먼지를 바라보며, 정말 많은 먼지가 묻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틈이 날 때마다 유리벽을 정성스레 닦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유리벽에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닦아낼 수 없는 얼룩이 어느 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해는 에휴, 라며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이먼 앤 가펑클이 느릿느릿 무대에 올라, 웬즈데이 모닝 쓰리 에이엠을 부를 즈음이었다. 폴 사이먼이 먼저 올라와 기타를 언제나처럼 꾸준히 치고 있었고, 아트 가펑클이 왠지 꾸물대며 무대에 올라와 노래를 하는 느낌이었다. 역시 사이먼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묵묵히 기타를 계속 쳤고, 가펑클은 사이먼의 기타에 맞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가펑클이 “그녀는 부드럽고, 그녀는 따뜻해. 그러나 내 마음은 무거워”를 부를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부드럽고, 따뜻한 비였다. 여해는 어김없이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유리벽에 미끄러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비는 어느 한순간부터 쏟아부을 듯이 내렸다. 정확한 시점이 딱 언제였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한순간이었다. 이때까지 정말 땅에 떨어지고 싶었지만 참고 참다 내린다는 듯이 사정없이 내렸다. 억눌렀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 내리는 것 같았다. 가뭄으로 맘 졸이던 농부라면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붓듯이 내리는 비에 오히려 당황할 만큼의 양이었다. 압도적인 양으로 거세게 내리는 비는 유리벽의 먼지를 말끔하게 흘려보냈다. 그리고 신기하리만치 여해가 그토록 벗겨내려 했던 얼룩도 깨끗하게 씻어버렸다. 여해는 기이한 그 광경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유리벽 이외의 다른 것도 씻기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여해는 문득 유리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빗물이 자신을 타고 내리며 ─ 어찌 보면 어루만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먼지에 뒤덮인 몸을 씻겨 주고, 햇살로 뜨거워진 몸을 시원하게 식혀 주고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유리벽 입장에서는 고맙다는 말 할 틈조차 없고, 따라갈 수도 없다. 빗물은 그저 어딘가에서 갑자기 와서, 자신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 쓰윽 손대더니 어딘가로 흘러가 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리벽이 참 딱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는 빗물 같은 짧고 시원했던 순간을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감내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 그런 운명을 타고나는 존재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여해는 그 모든 생각을 한순간에 떨쳐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리벽 밖으로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 여경이 비를 흠뻑 맞은 채 서 있었다. 레인코트를 입었지만 우산은 들지 않았다. 여경은 그저 비를 온몸으로 맞은 채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평생을 기다린 순간이 소나기처럼 어떠한 예고도 없이 여해에게 한 발자국씩 또각또각 다가왔다.

그리고 여경은 여해만 있는 카페의 유리문을 밀었다.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부터 갈색 레인코트와 끝선이 살아 있는 자줏빛 구두까지 어느 하나 흠뻑 젖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동자마저 64년의 봄처럼 그렁하게 젖어 있었다.

“글쎄. 어딘가를 가다가, 도저히 이곳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었어. 마치 무언가가 나를 강하게 당기듯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어. 뭔가 홀린 듯이 걷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예전 64년의 봄 속으로 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나는 나를 이끄는 그 감정에 내 온몸을 온전히 맡겼어. 내가 보는 눈, 소리를 듣는 귀, 그리고 나를 이끄는 발. 나를 이끄는 그 감정으로부터 내 몸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온전히 맡겨버린 거야. 아무렇게 돼도 좋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러니 내 발길이 이곳에 닿았어. 그리고 이곳에 니가 있었어. 신기하지?”

여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신기하지 않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다려 왔거든.” 여해의 목소리가 카페 안의 빗소리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화음과 뒤섞여 울렸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건 제발 묻지 말아 줘.”

“넌 도대체 누구야?”

“뭐야. 이러기야.”라며 여경은 빗물 젖은 눈동자로 웃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나. 글쎄. 내가 누굴까. 혼자 못 잔다고 울고불고 난리치는 다 큰 남자?”라고 여해는 말했다. 난 널 항 상 기 다 려 왔 던 사 람. 이라는 말이 입속에 맴돌았으나 여해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혼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십둘의 남자는 오십넷의 여자에게 아무 말 없이 웃음을 건네 보였다. 유리벽을 적시는 빗물이 여자의 눈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무대에 오른 비틀스가 〈It won't be long(길지 않을 거야)〉을 부르고 있었다.

 

 

6. 당신이 알아볼 수 없을 때라도(2011년)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부디 알아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의 감정에 매달리어

위태롭게 계절의 변화를 견뎌낸다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오늘은 언덕길에 올라 차라리 바퀴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에 빠졌다가, 어김없이 너에게로 굴러가고 싶어졌다.

어제는 자전거를 타다가 차라리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로라도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에 빠졌다가, 주책없이 네 앞에서 쓰러지고 싶어졌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부디 알아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의 감정에 매달리어

눈앞에서 달력이 찢겨져 가는 것을 감내하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또 해가 지고, 나는 여전히 거미처럼 하나의 감정에 매달려 있다.

 

여해는 도대체 이게 무언가 싶어 골몰히 보았다.

자신의 가방에 있는데, 이게 무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필체인 것 같은데, 자신은 도대체 이런 글을 적은 기억이 없다. 메모지 끝에는 64년 4월 5일. 이라고 씌어져 있다.

여해는 문득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누가 내 필체로 이런 글을 써놓았다. 그것도 이렇게 유치한 글을. 필시 누군가가 내 필체를 흉내 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쌍놈은 ─ 아니 쌍년인지도 모르겠다 ─ 내 필체를 따라해 내 서명을 위조하고 있다. 내 통장에서 돈을 빼가고, 내 집을 팔아치우고, 내 카페를 팔아치운다. 이 쌍놈을 잡아야 한다. 여해는 주체할 수 없는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내쉬며 나섰다. 그러다 간호사와 마주쳤다.

“어. 미스 김, 잘 만났군. 이거 말이야. 이 메모. 이거 쓴 작자 좀 찾아낼 수 있겠나?”

간호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할아버지께서 쓰신 거잖아요. 저한테 몇 번이나 말씀해 주셨는데요.”

어. 내가, 라고 여해가 반문했고, 간호사는 “네. 그럼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요. 한 여자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아 쓰셨다고 하셨잖아요. 기다리기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고, 지쳐버리기도 했지만, 결국 언제나 다시 생각나게 했던 한 여자 때문에 쓰셨다고 하셨잖아요.” 간호사는 마치 학생에게 수학문제 풀이 방식을 알려 주듯이 말했다.

“아. 미스 김은 왜 자꾸 날보고 할아버지라고 그래. 동갑끼리.”

“어, 어. 그, 그렇지. 우린 친구지.”라고 말한 뒤 간호사는 어디선가 빌려온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여자 친구한테 편지 쓴다고 계속 쓰고 버리고 모은 게 나중에는 시가 됐다고 그랬잖아.”라고 말한 뒤 뒤늦게 “요”를 붙이고선 간호사는 가던 길을 갔다.

간호사가 사라지자, 여해는 알 수 없는 메모지를 든 채 텅 빈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문득 복도 천장에 길게 늘어선 형광등이 어지럽게 보였다. 여해는 눈부신 형광등 사이에서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리고 여해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집을 잃고, 아주 먼 길을 헤매고서야 이제 다시 집을 다시 찾은 아이처럼 서럽게 어깨를 떨며 여해는 복도 한가운데서 흐느꼈다.

 

 

*

 

미안해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갑자기 존댓말을 해서 미안해요. 제가 나이는 두 살 많지만, 이 글은 왠지 존댓말로 써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야 제가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남이 되자는 의미에서 쓰는 존댓말은 아니에요. 저는 지금 어떻게라도 이 글을 써놓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동안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어요. 사실 답장을 예전처럼 계속 쓰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어요. 누구보다 잘 아는 이야길 해서 죄송해요. 저도 제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픈 말은…….

우린 그날 자지 않았어요. 아니, 잔 건 맞지만, 관계는 없었어요. 64년의 봄에 당신은 나를 포근히 안아만 줬어요. 나는 그 안에서 어찌나 가슴이 뛰었는지 몰라요. 밤을 꼬박 샜어요. 그러고선 아침 햇살에 잠을 깬 당신을 참으로 가지고 싶었어요. 당신은 햇살과 잘 어울렸어요.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나는 그런 당신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저는 이미 누군가와 함께 있었어요.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한 일주일이 얼마나 내겐 소중했는지 몰라요. 계속 편지를 보내 오는 당신을 보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결국은 이렇게 존댓말까지 써버리는 바보가 돼버렸어요. 이 말을 꼭 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아, 편지를 써놓긴 했지만 부칠 자신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나를 평생 기억해 주겠다는 그 말 정말 가슴 뛰었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한 일주일 내 삶의 모든 것을 떼어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모두 무너져 내리길 바라고 있어요. 모두 무너져 나는 아무것도 없는 홀가분한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되돌아가는 생각을 종일토록 해요.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정말.

 

여경은 종이를 북북 찢으며, 푸― 쓸데없는 영수증을 모아 두는 것도 병이야. 병, 이라고 말했다. 찢겨진 종이 한 부분에 적힌 ‘정말’이라는 단어는 무언가에 젖어 번져 있었다. 여경은 서랍을 열어 영수증을 차례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럴 때마다 여경은 귀찮다는 듯이 푸―라며 긴 한숨을 쉬었고, 찢겨진 종이에는 서명이 아닌 깨알 같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우표조차 붙이지 않은 편지는 쓰레기통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여경은 영수증 정리를 다하고 나서 화장대에 앉았다. 머리를 곱게 빗고, 얼굴엔 기초 크림을 발랐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문간에서 느닷없이 큰 목소리가 들렸다. 여해였다.

 

저 말입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바퀴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한 곳으로 굴러가다 으스러져도 좋은 바퀴 말입니다.

 

여경은 화장을 하다 말고 돌아보았다. 여해가 근사한 재킷에 머릿기름으로 머리를 넘기고 서 있었다.

 

혹시 그 다음 생에 또 태어난다면 그때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로 태어날 겁니다.

내 몸이 녹슬고 내 발이 내 맘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결국 멈추지 못하고 한 곳으로만 굴러가는 자전거 말입니다.

 

호흡은 불규칙했다. 재킷에도 폐의 운동이 드러날 만큼 가쁘게 숨을 뱉고 있었다.

여경은 아…… 근데, 모범택시가 더 근사한데. 자전거보다, 라고 말했다.

 

여해에게 하얀 귀 위로 채송화를 꽂은 여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경은 환자복에 볼품없고 주름 가득한 얼굴에다 귀에 과자봉지를 접어서 꽂았지만, 여해에겐 하얀 원피스를 입고 햇빛 찬란한 초원에서 걸어오는 여인이었다. 과자봉지를 꽂은 여경이 웃자, 여해도 따라 웃었다. 여해는 꽃을 따줘야겠다 싶어, 여경에게 한 송이를 건넸다. 병실에 있던 조화가 화병에서 빠지며 화병이 떨어져 깨졌다. 둘은 아랑곳 않았다. 여경은 여해에게 살며시 웃어 보이더니,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외출을 하려면 화장을 해야 해요, 라고 말했다. 여해는 험프리 보가트처럼, 물론이지요. 얼마든지 그러시죠, 라고 말하고선 침대 모서리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았다. 병원 침대의 낡은 스프링이 삐거덕거렸다.

 

여해가 건넨 꽃을 머리에 꽂은 여경은 크림을 찍어 발랐다. 새로 산 크림은 예전 것보다 조금 더 끈적끈적하다고 생각했다. 피부에 잘 스며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을 더 겹칠 하고 있었다. 여해는 화장을 하기 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되어 고개를 돌리고 벽을 바라보았다. 벽에 꽃 모양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모두 여경이 그려 놓은 것이었다. 여경은 똑같은 꽃을 수천 개 벽에 빽빽이 그려 놓았다. 그 광경이 마치 여해에게는 꽃이 가득 핀 초원처럼 보였다.

여경은 조금만 기다려요, 라고 말했고 화장품을 얼굴에 고르게 폈다.

여해는 천천히 하세요, 라고 말했고 아까 읊었던 말의 의미를 여경이 알아 주길 바라며, 기다렸다. 침대의 노쇠한 스프링이 몇 번 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경이 고개를 돌렸다.

여경의 머리에는 꽃이 꽂혀 있었고, 얼굴에는 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여해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피부색이 전혀 다른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여해는 여경 씨, 화장을 왜 이렇게 진하게 했어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일흔 살의 남자는 그저 조용한 웃음으로 일흔두 살의 여자에게 자신의 팔을 건넸다. 그러자 여자가 팔짱을 끼고 옆에 나란히 섰다.

둘은 이제 방문을 열고 나선다.

 

문득 여해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하는 데이트인데, 이 기분이 낯설지만은 않다.

이 여자 부근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이 사람에게 끌려간다.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다. 아니 그 모습이 새로운 내가 되는 것 같다.

낯 설 지 만 은 않 다.

아무래도 이 여자와 연애를 시작해야겠다.

그게 언제까지일는지는 ……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문장웹진 8월호》

 

 

창작 노트

 

사실 이 소설은 버려질 운명이었다. 쓰는데 속도도 붙지 않고, 재미도 감동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기획을 하는 정희태란 형이 그럴 순 없다 하여, 속는 셈 치고 발표하기를 했다. 내 저주받은 취향과 형의 축복받은 취향 사이에서 갈등했으니, 고민은 해보나 마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언제나 절판이 되었거나, 음악은 음원 유통이 안 되거나, 영화는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만족하는 소설엔 혹평 혹은 무관심이 뒤따랐고, 스스로 부끄러운 소설에는 격려와 칭찬이 뒤따랐다. 쓰는 사람으로서 당혹하기 그지없는 결과지만, 다 나라는 인간의 저주받은 취향 때문이다.

 

이 소설은 친 할머니에 대한 헌사다. 할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씀 드리면, 할머니는 언제나 얼굴을 붉히시며 “전 그런 거 몰라예.”라며 몸을 꼬셨다. 치매란 그런 병이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변을 치워줬던 새끼에게 기저귀 갈임을 당하고, 변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더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더 사랑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할머니, 이 소설은 할머니 때문에 썼어요.”
천국의 어디선가 몸을 꼬며 그러실 것이다.
“전 그런 거 몰라예.”

 

 

<감상후기>

저 위, 개구진 눈빛을 다시 올려다 본다. 이미 피식 웃었다. 내 저주받은 취향이란 말이 넘 재밌다. 끝부분도 정말 파격적이다. 똥을 변으로 표현했지만 한마디로 벽에 똥칠하는 그녀 얘기 아닌가. 마지막 장면에서 여경의 팔짱을 낀 여해의 늠름했을까 흔들렸을까 싶은 어깨.  황순원의 소나기 서정으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뭔가 신세대 감각으로 업그레이드된 느낌 느낌, 느낌이 쉬우면서도 리듬있게 닿는다.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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