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13년의 하이퍼텍스트
-이정섭 ,『유령들』(심지, 2008)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자기의 작품을 읽지 말고
그 작품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을 읽어보라고 충고한다
- 질 들뢰즈
1. 묵시록/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시집을 펼치는 순간 책갈피에서 뿜어 나오는 강력한 빛이 눈부셨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았던 사람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녹아 없어졌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집을 읽은 사람들은 보지 말았어야 할 인간 종말의 낱낱을 목격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던 파티마의 어린 목동처럼 한동안 섬뜩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밀란 쿤델라가 언급했던 ‘현대의 협력자’ 혹은 종말을 이끈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스미디어의 소란에 환호하고, 광고를 보고 멍청한 미소를 흘리고 있으며, 때론 자연을 망각하고, 그것을 미덕으로까지 인정받는 천박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햇빛 들지 않는 그늘 속에 들어부었던 슬픔의 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 있다.
마야문명이 예언했던 세상의 종말은 2012년 12월 23일이다. 일찍이 인류의 종말을 예언했다 실패한 노스트라다무스도 2012년을 다시금 거명했다는 예언서가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주역도, 티벳승려도 하물며 미항공우주국(NASA)까지도 지구변화에 대해 2012년을 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2013년은 지구 종말이후를 뜻한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상정했던 역사적 기념비들처럼 이 시집은 그동안 박해받던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이다.
묵시록이 상징을 통해 예언하듯 이 시집 또한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언어와 사물이 서로 불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라캉이 말하듯 기의는 기표 밑으로 자꾸 미끄러지고 있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불편한 결합과 의미의 불확정성은 당황스럽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의미의 간극은 이 시집을 환타지로 유도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집에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몸의 이미지’와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하부 이미지’는 경직된 우리의 사고와 관념을 깨뜨리는 리얼리즘이다. 시인의 뜻을 따르면, 우리 삶의 모습에서 ‘햇빛’을 허물고, ‘그늘’로 변주시키려는 민중적이며, 탈중심적인 형식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시집을 읽어야 하는가? 우선 “부분은 전체를 포함한다.”는 논리가 귀에 솔깃하다. 그리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던 마들렌의 소중한 경험이 떠오른다. 그러므로 전체를 통해 무엇을 얻어낼 생각은 말자. 이때부터 이 시집은 들뢰즈가 말했듯 “전체화할 수 없는 부분적인 조각들을 이웃시켜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내는 기계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기계에 합당한 이름은 ‘하이퍼텍스트’가 아닌가?
이제 우리는 이 시집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시인이 정해 놓은 한 가지 순서로 시를 읽을 필요가 없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마우스로 링크를 선택해서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정보를 읽어 나가듯 시를 읽는 것이다. 결국 이 시집은 읽는 사람에 따라 수천수만 개의 텍스트로 변주될 것이다. 여기에 적는 것은 다만 한 가지 텍스트 읽기에 불과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선택을 따라 이 시집에서 ‘욕망하는 기계’를 클릭 하고, 이어 ‘기관없는 신체’, 그리고 ‘탈주’를 클릭했다.
2. 말랑말랑한 욕망
내가 나임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주체로서 내 스스로를 체험하는 계기를 어떻게 마련하는가?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수줍음을 느낄 때 자신을 경험하였고,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책임감 속에서 스스로를 깨달았고, 라캉은 타자가 겪는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하였다.
이정섭은 후각적 충동에 민감하다. 이 충동은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어떤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맡았던 냄새의 근원은 배설물이다. 인간이 쏟아낸 악취는 시인을 절망에 빠뜨리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성(性)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먹고 먹히는 경제논리처럼 돈으로 거래되고 있어 생생했던 살냄새는 불판위에 올려진 고깃덩이처럼 탄내를 풍긴다(<달 달 무슨 달>). 경제불황 속 도시는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빈곤의 냄새를 가득 품고 있는 도시에서 우리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결빙기>).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세상은 화약냄새가 진동하고 어린 아이들이 시한 폭탄처럼 전쟁기계로 내몰리고 있다(<복수는 나의 것>). 후각을 통해 감지한 세상은 종말의 징후로 가득하다. 이처럼 서기 2012년 종말의 때는 무엇보다도 후각을 통해 감지되었다. 그러기에 시인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냄새에서 찾는다(<달빛에 돋은 사마귀>).
느티나무 아래 군청색 햇빛이 고여 있다 점점 묽어져 젖은 흙길을 푸르게 물들이는
느티나무를 가로질러 걸어가던 소년이 푸른빛에 녹아내리고
담장을 따라 하늘이 번진다 철책이 자란다 그 곁을 뛰어가는 소녀의 머리가 어두워진다
포로가 된 붉은 가방은 생살 사이에서 딱딱해지고 굳은 다섯 개의 방을 건너 변신하는
소녀의 몸에 금속성 냄새가 이식된다 부패하기 시작한다 머리가 줄어든다 사라진다 머리가 사라진 소녀가
소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눈보라처럼 비상구처럼
느티나무에는 군청색 토르소들 주렁주렁 여물고
그림자 밟은 햇빛은 독한 약품 냄새를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햇빛의 냄새> 전문
종말의 후각적 징후는 ‘햇빛’에서 연유한다. 인류가 오랫동안 향유했던 ‘태양을 숭상하는 문명’은 비로소 쇠퇴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을 길들였던 태양의 질서는 ‘딱딱하며, 굳은 것이며,’ ‘금속성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 고정화된 틀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인류는 자유스런 변신을 억압당했고, 축소되고 축소되어 아예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반복했다. 그동안 태양이 조장했던 밝은 논리와 교술은 독한 방부제였을 따름이다. 태양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모두 부패했다. 시인은 ‘그림자’를 욕망하고 있다. 그를 존재케 하는 냄새는 태양의 발아래 신음하는 ‘어둠’에 갇힌 대상들이다. 그것은 2013년 종말 이후에 펼쳐질 세계를 예감하게 한다.
이즈음 ‘욕망’을 링크했다. 금방 들뢰즈와 가타리가 상정했던 ‘욕망’으로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욕망’을 모든 것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욕망을 결핍이나 결여, 부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욕망’은 무엇인가를 생성하게 하고, 생산하게 하며, 창조한다. 다시금 이정섭이라는 ‘욕망하는 기계’를 클릭한다.
꿈꾸는 동안 붕어빵은 황금으로 변하지 먼 훗날 황금은 돌아올 테지만 멀미하는 나는 일 없어 꼼짝없이 꿈에 갇혔네 그녀는 내게 마음 주지 않았어 ......꿈꾸는 동안 태양은 허가받은 만큼 녹아내리고 마취에서 깨어난 붕어는 뼈 없는 몸 흔들어 금가루를 뿌리네 빵냄새를 가꾸는 그녀가 나는 좋은데 내게 마음 주지 않았어......태양은 사뿐히 마법을 건너뛰었네 다리 아픈 그녀는 눈썹 긴 달빛에 이끌려 구석구석 검은 재를 채웠네 배신이 무르익는 동안 신나는 호루라기 식어버린 마법을 덤핑 판매하는 호루라기 소리, 붕어 떼는 연이어 태양계를 탈출하고 빵집은 영영 문 열리지 않았지 꼼짝없이 꿈에 갇힌 날들 불편한 나는 간절히, 알싸한 빵냄새를 꿈꾸는데
-<겨울에 살해당한 마법사 이야기>에서
이 시에서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햇빛의 변주가 ‘황금 붕어빵’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황금 붕어빵’에 집착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하는 순간에 금방 채울 수 있는 ‘식욕’과 같은 것이다. ‘그녀’에 대한 의식적 지향은 시인을 ‘꿈’이라는 상징적 질서에 가두고 만다. 거기에 매개로 등장하는 것이 ‘햇빛의 냄새’다. 그 냄새는 의식적인 것이며, 결핍을 모르는 우악스런 폭력이다. ‘꿈꾸는 동안’ 즉, ‘햇빛 냄새’에 중독돼 있는 동안, 우리는 마술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 마술이 갖는 놀라운 무의식적 자유를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황금빛 향기’에 삶의 생기와 자유를 정지당한 우리 자신을 떠올려 보라. 자본 논리에 쉽게 유혹 당해 그 황금빛 꿈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는 재가 되어 소멸했고, ‘호루라기’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은 종말을 예견하는 경종이다.
신선한 살코기에는 관심 없어 테라스에 앉아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 썩는 일은 우리 행복에 대한 보증이니까 맘껏 미끄러져 춤춰야겠어 커피 향 가득 붉은 잇자국을 남긴 아지랑이는 살냄새를 흔들며 떠나네...... 손에 잡히지 않는 더운 김이 졸졸졸 살냄새를 따라가네. 저당 잡힌 신선한 근육에는 관심 없어 캠브리지 멤버스는 가까이 다가오질 않고 은근슬쩍 추방을 강요하는 오전 막바지
구겨진 작업복으로 무장한 막일꾼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온다.
그만 달아나야겠어
신선한 건 도무지, 무서워 죽겠다니까.
-<Fresh Life Restaurant> 에서
비로소 시인을 존재하게 하는 냄새를 링크했다. ‘신선한 살코기’ 냄새다. 황금빛 냄새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냄새다. ‘햇빛’ 영역 안에 속한 사람들. 다시 말해 ‘멤버’들은 아지랑이와 같은 가벼움을 가장 하고 있지만 모두 거품이다. 시인은 이 거품 속에 진동하는 것을 부패의 냄새라 풍자한다.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더운 김’에 가져다 놓는다. 통상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칭한다. 그 황금빛 알싸한 냄새 틈을 비집고 저당 잡힌 냄새가 다가온다. 그것은 꿈속에 갇힌 의식화된 요원이 아니다. ‘구겨진’자들이며, 추방당한 존재며, 횡단하는 타자들이다. 이처럼 시인이 욕망하는 냄새, 즉 ‘그늘의 냄새’는 신선한 것이다. 시인의 욕망은 ‘햇빛’처럼 딱딱하지 않다. 그늘처럼 ‘말랑말랑하다’. 죽음을 딛고 생명을 잉태할 그늘이다. 그가 욕망하는 그늘에 숨어 잠시 우리의 타자화된 심신을 쉬어도 좋을 것 같다.
3. 햇빛기계를 부수고
이정섭의 욕망기계는 강력하다. 시인의 욕망은 사회의 고정적인 가치, 체계, 질서 등을 거부하며, 중심부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시인이 저항하는 지배의 실체를 링크해 보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관’이라 명명하고 있다. 기관이라는 기제는 우리 개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흐름을 방해하고, 사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획일화된 이데올로기 속에 가두고자 한다. 시인의 신체는 이 복종과 굴종의 체제를 해체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것은 생성과 생산의 욕망이다.
르네가 태어났을 때 르네는 바람 르네는 향기 르네는 견디기 힘든 유혹......
르네가 늙었을 때 르네는 바카라 르네는 바다이야기 르네는 확신할 수 없는 펀드
바게트를 찬미할 시간이야 르네 엉덩이처럼 부풀어 오른 거품을 터뜨리자 묽게 번진 마스카라는 추억에 감금하자 복숭아꽃 벌건 춘화도 건너 신호는 제자리걸음 무단횡단을 감행하는 학생들 싱싱한 고기를 냉동 보관하는 모델하우스
-<르네의 사생활 -공룡시대>의 에서
서기 2012년은 공룡시대다. 이 시대가 멸종을 예고하고 있음을 어린 아이들이 먼저 알고 있다. 현대는 공룡시대다. 지루한 드라이브에 감염된 시대다. 그러나 제자리걸음,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덩치를 갖고 ‘무단횡단을 감행하는 학생들, 싱싱한 고기를’ 가두는 모델하우스 같은 시대다. 르네는 그 생활에서 몸의 자유를 획득하는 상징으로 기표화되지만, 그것은 공룡의 다른 모습이다. 어린 시절 르네는 욕망의 대상이었지만 늙은 르네는 공룡시대의 기표로서, 그 흉물스런 종말의 기표를 함축하고 있다. ‘르네가 늙었을 때 르네는 바카라 르네는 바다이야기 르네는 확신할 수 없는 펀드’로서 시인을 자본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공룡’이라는 거대한 기관 속에 갇힌 현대인들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되는 가치 체계 속에서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기력하다. 아무런 대처 능력이 없다(<공룡은 인형을 좋아해>). 생명을 죽이는 이기적인 욕망들은 자본주의적 환각(커튼피그트리)과 폐쇄적 신앙의 결합을 통해 기관 없는 신체(아기)를 죽음으로 이끈다(<이기적인 유전자들>). 현대인의 삶은 노예선(아미스타드)에 실려가는 노예와 같다. 햇빛 아래 ‘약시’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생각’이 없다는 것과 일치한다(<아미스타드>). 이는 모두 공룡시대의 일이다. 산모의 평화가 아이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듯,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날’을 시인은 산 것이다. 의사도 간호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처럼 아이의 현기증은 시인이 겪는 삶의 소용돌이다. ‘귀신’이 달라붙는 죽음과 같은 현실이다.(<병원놀이>)
그 앞에 서서 아이는 말이 없었네
십 여 미터나 되는 단단한 어금니가 날이 선 듯 번쩍거렸네 녹슨 철제 난간 너머 아이가 물고 다니던 꿈이 굴러다닐지 어망처럼 꼬인 격자무늬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네 지붕 위를 보고 싶은 아이들은 천천히 벽을 타고 있었네......
물은 아이의 속도보다 빠르게 차오르고, 옹벽은 완강하게 물을 껴안고, 아이는 물에 잠기고, 그 앞에 누워 저녁놀 말이 없었네
어디선가 젖은 연탄 말리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올랐네
-< 어디선가, 아이 말리는 연기>에서
급기야 시인은 기괴하고 참을 수 없는 증오를 우리로 하여금 링크시키게 한다. ‘아이’는 ‘기관 없는 신체’다. ‘십 여 미터나 되는 단단한 어금니’를 하고 ‘공룡’이라는 기관이 ‘벽’으로 변신하여 아이 앞에 서 있다. 넘을 테면 넘어 보라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 벽을 넘어서려 한다.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말의 때에 모든 선한 자들을 죽여 없애듯 ‘기관 없는 신체’를 참혹하게 해체한다. 저 ‘젖은 연탄 연기’는 주검 앞에 피어오르는 향불처럼 침묵하며 밀려온다.
공룡시대 아이들은 때로는 최면에 걸린 듯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 그저 대상도 없이 무기력하게 총질을 한다(<천국의 아이들>). 때로는 실종되고 만다. 세상을 잘못 읽은 아이들은 기화해 버리고, 세상은 공장처럼 아이들을 생산하고 있다(<실종사건 전문탐정의 수첩>). 분해 조립되어 순치된 아이들만 세상에 남는다(<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6
햇살 한 줌 들지 않아도 노래는 있다
봄 물어오는 여치 계단을 스치는 가을에는 귀뚜라미
원활한 호흡을 걱정하는 환풍기까지
뱃가죽부터 켜켜이 먼지 쌓여도
알몸으로 골고다를 오르던 사나이처럼 가만히
어둠 안을 때 어둠보다 빨리 안기는 어둠
동굴에 사는 모든 벌레가 자유로운 것은
소리를 만지는 안목을 가져서다
가느다란 늑골 사이로 퍼지는 선율이
동틀 무렵 고단하게 뒤척이는 어둠을 부축해
지하 깊은 곳으로 대피하는 아량도
어둠의 상처를 알아듣는 더듬이 때문이다
9
지구의 자전이 밤낮을 만드는 게 아니다
알량한 태양의 양심이 지하를 기웃거리는 잠깐
불온하게 우리 꿈꾸는 것일 뿐
-<지하로 가는 길>에서
마침내 시인은 ‘공룡기관’을 키운 ‘햇살’을 부수고 지하로 향한다. 서기 2012년의 11월이다(종말은 그 해 12월에 예정돼 있다). 종말을 예감한 것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알몸’ 상태다. 그것은 어둠이 주는 혜택이다. 햇빛아래서 행했던 분별과 시기와 분리와 배제를 거부하고 서로의 상처를 더듬는 어둠의 축제다. ‘양심’은 알량한 것이다. 이 시시하고 하찮은 기관의 시혜를 거부하는 것을 시인은 ‘불온하다’ 한다. 그래서 우리도 ‘불온’을 클릭한다. 여지없이 김수영에게 링크된다. 김수영은 정치권력의 검열에 순치된 문학예술행위를 거부한다. 이정섭이 간파한 햇빛의 냄새에 중독된 행위다. 김수영은 그 알량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온’을 유포한다. 그것은 전위적 행위다. 이 전위적 행위는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험성으로 해서 불온할 수밖에 없다. 이정섭 시인도 그것을 꿈꾸는 것이다. 일체의 권력적 헤게모니로부터 자유로운 유목인이 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버린 지하의 세계로 함께 가기위해 또 클릭!
4. 그늘을 향해 탈주
다시 틀뢰즈와 가타리에게 왔다. 그들은 말한다. 탈주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창조적인 생성행위라고. 기관화된 사회로부터 탈주함으로써 새로운 사고와 가치를 생산해 그동안 불온시하고 부정되었던 인간 존재의 차이와 복수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경직된 사회를 보다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이정섭이 포착한 말랑말랑한 관계이며, 어둠이 감싸 안은 안온한 세계이다. 이제 서기 2013년 종말 이후, 이정섭이 탈주한 세계로 가야겠다.
물방울이 낳은 검은 아이들이
웅덩이를 닫고 제방의 주둥이를 메우고
웃자란 터럭을 매끈하게 깎아낸다
......
좁은 관 속에서 무럭무럭 잠을 키운다
......
빳빳하던 이승은
나비가 앉고 뜨기를 반복해서야 비로소
붉게 누워 얌전해진다
-<장마 이후>에서
대홍수이후 지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전멸하고 다시 시작하는 세상과 만났던 신화 속 인물처럼 이정섭은 담담하게 새로 펼쳐진 세상을 보여준다. 그 세상은 ‘빳빳하던 이승’과 대비되는 곳이다. 햇빛기계 아래 경직된 곳이 아니라 신체 없는 관속의 아이처럼 얌전한 세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통과한, 새로운 탄생이 거듭되는 놀라운 생성의 신비를 목격하게 된다. 기관없는 신체, 그 아이들은 과거 순백색의 태양의 아이들이 아니다. ‘검은 아이들’이다. 시인이 탈주하여 재영토화한 세계가 얼마나 다른 세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곳은 동물적 생존만을 의식하여 ‘밥과 안부로 포장’된 삶을 부끄러워하는 회색지대다(<회색을 말한다>). 그동안 ‘효율성’만 따지는 자본의 분별 때문에 소외되었던 사실을 망각해 버린 무의식의 세계다. 그곳에서 시인은 ‘주인을 삼킬 수 있는’ 야성을 깨우며 순치될 수 없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순한 양>). 그것은 움직이는 식물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을 삼켜버리는 기존 체계의 전복이다. 그 곳의 출입은 ‘매일 열려 있으나 매일 닫히는 문’을 통해, 혹은 ‘매일 닫혀 있으나 매일 열리는 문’을 통해 가능하다. 이 변화무쌍한 말랑말랑함을 시인은 ‘자유로운 고립’이라 명명한다(<문 앞을 서성이는 그림자들>). 우리가 좀체 경험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와 역설이 그가 꿈꾸는 종말 이후의 세계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서기 2013년의 보고서를 쓴다.
1. 긴 평화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하늘하늘 내리는 봄볕. 반가운 살육의 계절이 돌아왔다. 널찍한 도시를 향해 원정을 떠난다.......
5. ......전쟁의 시대는 바야흐로 너희들의 놀이터.......
7. 인해전술 : 포탄 대신 사람 투하하기. 전면전 막바지 아이템이 바닥난 종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술. 바닥에 떨어지기 전 대부분 사망하지만 생명을 유지한 것들은 좀비가 되어 적진 깊숙이 침투, 게릴라전을 벌인다. 원격조정으로 지하 곳곳에 암약해 바퀴벌레로 변신, 적진을 습격하기도 한다.
-<봄에 대한 보고서>에서
이 보고서는 지구의 종말과 종말 이후가 가상세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평화’는 진실인가? 그것을 시인은 되묻고 있다. 우리가 유지하고 하고 있는 비겁하고 잔인한 평화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이름하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타자화시키며 획득한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전쟁기계로 만들어 사지로 내몰고 있는 전지구적 침묵의 카르텔이 만든 폭력의 유산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전쟁을 선언한다. ‘반가운 살육’이라는 자연의 힘을 통해 인간이 만든 도시, 태양의 제국을 향해 진격하는 시나리오를 제공하고 있다. 이 탈주의 비밀은 전쟁의 시대를 놀이터로 만드는 신비한 체험을 가능케 하며, 포탄 대신 투하된 사람들. 그 인해전술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이루어 내는 새로운 영토를 꿈꾸고 있다.
5. 다시 시(詩)의 품으로
이제 우리의 하이링크행위도 그만 멈춰야겠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원래 하이퍼텍스트의 용이한 접근성이 보이는 결말이 그런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로 갔다와 보자. 그들은 탈주선이 지배권력에 의해 재영토화되어 차단되고 소멸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더불어 긍정적인 생성능력이 고갈될 경우 부정적인 죽음의 선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다음 시를 조용히 음미하며 이정섭의 시집을 덮는다. 그가 저장한 슬픔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 밤이었을 거예요 언제나 왼편 어디쯤 서성이는 우리는 연등 하나 밝힐 수 없었는데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무슨 말인가 목쉰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눈물만 요란했는데요 초파일은 지난 지 오래 가난한 길손 대신 손등을 드는 밤, 추녀에 매달린 왼쪽 날개가 상하고서는 못 속에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없었겠지요 흙먼지 휘감듯 멱살을 잡는 산길의 반란으로 의지할 먼 불빛도 없이 돌아온 장터, 막차는 벌써 우리를 등졌던데요 그 날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술 취한 아버지는 비틀거리고요 바람의 화법을 채 익히지 못한 비구는 늙어 헛바퀴만 밟아대고요 팔십년엔가 지어졌다는 다리 밑에서 부쩍 해쓱해진, 연꽃 그 참담한 경계, 이백 미터를 넘어가면 다리도 끊기는데 석회더미를 뒤집어 쓴 그 날 밤처럼 연꽃은 알 듯 모를 듯 새하얀 미소만 허, 날리는데요 닿지 않는 거리를 두고 숭숭 씨앗만 날아드는 왼편의 물은 허허벌판 등 시린 겨울인데요
-<연꽃 근처>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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