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승일<2011년 6월 23일>외1편

미송 2011. 10. 19. 23:53

 

 

김승일

 

 

 

2011년 6월 23일

 

 

너희들 고전 속의 주인공들은 자살하기 전에 항상 독백을 하지. 주인공이 자살하는 소설만 골라; 읽었다. 고전 위주로.

 

당신들의 독백을 독서합니다. 나도 곧 자살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은 타당하지 않았다. 그 책도 불가피하지 않았다. 그 책의 독백은 숭고했으나…… 내가 써먹기엔 너무 거창하였다.

 

안 되겠어 차라리 내가 써볼까? 그래, 고전을 써보는 거야.

 

서사시

 

책상 앞에 창문이 뚫려 있었다. 책상 뒤에 앉아서 시 쓰는 일은 창밖을 신경 쓰는 일이 되었다.

 

매달려 있는, 에어컨 실외기가 비장하였다.

 

나보다

 

실외기가 비장하였다. 실외기가 시 쓰는 데 방해되었다. 고전을 쓰려고 책상에 앉은 비장한 시인을 방해하려고.

 

실외기 위에 누가 있었다.

 

새하얀

 

종이 한 장을 활짝 펼친 채로 살짝 잡고서. 실외기 위에 서 있는 사람. 반백발의 남자가 날 가리켰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네가 쓴 시야. 이걸 써서 이제 나는 자살할 거다.

 

반백발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러면

 

그 시는 서사시겠군? 타당하고 불가피한 고전이겠군? 당신은 미래의 김승일이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는데.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당신이 정말로 곧 자살할 거면, 신속하게 내 질문에 답하도록 해. 자살이 어떻게 불가피하지?

 

활자가

 

채워진 종이 한 장을 반백발의 김승일이 흔들어 댔다. 그렇게 재수 없게 흔들지 말고.

 

낭송을 해줬으면 좋겠어. 너처럼 자살을 할 수 있도록,

 

낭송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걸 한 번도 읽어 보지 않고서.

 

똑같이 쓸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무릎을 꿇고

 

빌었고

 

너도 쓰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반백발의 남자가 위로하였다. 어째서 그가 자살하는지 쓰여 있는 종이를 살살 흔들며.

 

"네가 이 시를 썼어."

 

 

실외기가 한동안 시끄러웠다. 타당하고 불가피한 고전 작품을 실외기 밑으로 떨어뜨리고.

김승일은 영원히 말이 없었다.

 

가볍게

 

툭 건드리자, 그것은 서서히 기울어졌다. 나보다 비장한 실외기 위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  순식간에 일층으로 내려갔었다.

 

여기 어딘가에 떨어져 있는 불가피한 고전을 내가 쓰려고.

 

 

 

 

나의 자랑 이랑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 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까?

너한테 불러 줄 수도 없는데.

네가 그린 그림들은 하얀 벽에 달라붙어서

백지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고.

단아한 가방들은 내다팔기 위해 만든 것들, 우리 방을 공장으로, 너의 손목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들.

그 가방들은 모두 팔렸을까? 나는 몰라,

네 뒤에 서서 얼쩡거리면

나는 너의 서러운,

서러운 뒤통수가 된 것 같았고.

그러니까 나는 몰라,

네가 깔깔대며 크게 웃을 때

나 역시 몸 전체를

세게 흔들 뿐

너랑 내가 웃고 있는

까닭은 몰라.

 

먹을 수 있는 걸 다 먹고 싶은 너.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오리발 같아 도무지 신용이 안 가는 너는, 나무 위에 올라 큰 소리로 울었지.

네가 만약 신이라면

참지 않고 다 엎어버리겠다고

입술을 쑥 내밀고

노래 부르는

랑아,

 

너와 나는 여섯 종류로

인간들을 분류했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막 박수치면서,

네가 나를 선한 사람에

껴주기를 바랐지만.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시작노트]

 

이랑이라는 내 친구와 작업실에 있었다. 이랑은 옆에서 노래를 녹음하고 나는 시를 썼다. 요 근래 시 쓸 때 좀 심란했는데,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되었다. 이랑 때문에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랑에게 '나의 자랑 이랑'이라는 시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시를……. 다 써서 이랑에게 보여줬는데 별로라고 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혹시 너무 감동해서 그러나? 부끄러워 죽고 싶었고. 그래서 자살에 대한 시를 썼다. 보르헤스의 「1983년 8월 25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2011년 6월 23일」이라고 썼다.

 

 "너의 날짜로는 오늘이 며칠이지?" 그날은 3월 17일이었다. "오늘은 2011년 6월 23일이야. 어제가 내 생일이었지." 우리들의 생일이 어제였다고? 나는 그였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이게 아마 9연쯤 들어갔던 것 같은데. 퇴고를 하면서 이 연을 지워버렸다. 보르헤스 소설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싫었다. 그래서 제목이 내용과는 다소 동떨어지게 되었다.

 

《문장웹진 4월호》

 

 

2010년 9월 11일 <같은 부대 동기들>을 재밌게 읽었지. 검색창을 통해 逆으로 들어가서 보게 된 K의 홈에서 보잘것없는 내 감상문과 함께 시를 올려둔 걸 발견하고 웃었지. 그리고 석 달 후 <부담>이란 시도 읽었지. 오늘도 잠 들기전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 K의 이름이 보여 얼른 시를 열었지. 오늘은 좀 일찍 자자고 약속해 놓고 또 이렇게 앉아 시를 보며 빙긋거린다. 보르헤스. K는 참 성숙하다. 난 마흔 중반, 그니까 3년 전 어쩌다 만나게 된 보르헤스를 벌써 이미 만났다니. 내 아들과 나이도 비슷하고 오늘 인물사진을 보니 잘생긴 분위기도 비슷하네. 건방지고 얼토당토안한 말이겠지만 난 K가 대견하다. 시를 쓰는 젊은이라서 시인이란 이름의 소유자라서도 그렇지만 보르헤스를 이미 알고 있었단 사실과, 또 시를 써서 친구에게 보여줬다는 대목 때문이다. 소통을 지향하는 점이 더욱이.

 

시작노트를 읽으며 언젠가 내가 가는 유일한 문학싸이트 '같은 부대 동기들' 감상문을 써서 올렸던 그 싸이트에서 들었던 어떤 코멘트가 떠올랐다. 시 아래에다 시작노트를 쓰고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을 다는 건 이미 詩답지 못한 실패된 詩作이란 말. 그러나 그게 다 옳은 말이었을까, 새삼 K의 시작노트를 보며 생각이 든다. 암튼, 내일을 위해 오늘은 쉬기로 하며 홧팅을 불러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