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마할과 알함브라궁전의 아름다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재생이며 해석이다. 언어와 이미지와 리듬은 시인의 정신과 욕망에서 태어나지만 결과가 표현된 시/텍스트는 잡지나 시집안에서 드라큐라의 시체처럼 누워있다. 이 시/텍스트는 독자/해석자의 감정과 정신이라는 피를 받아서 부활한다. 시의 뼈에 인식의 살이 붙고 감정의 피가 돌면서 시의 눈은 열리고 호흡이 시작된다. 이제 시는 관속에서 걸어 나와 독자/해석자의 피를 요구한다. 자신의 목숨과 영생이 이 수혈에 달려있다는 듯이.
시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진리의 자기현시일까. 칸트가 주장하는 미적형식으로서의 자기놀이일까. 인간의 역사적 경험이 특수한 형식으로 전승되는 모범일까. 해석자마다 다른 기준을 세울 수 있지만 독자의 피 속에서 다시 태어난 시는 여전히 시인의 시적 힘과 어두운 정열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근대시가 어느 때인가부터 문예의 형식미학에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다. 시와 산문과 철학언어의 차이는 문학적 형식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이러한 형식의 차이는 문학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요구의 차이에 기인한다. 언어적 형식이란 내용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을 때 형식의 존재가치가 성립한다. 문학은 예술의 미적형식에 관계하면서 동시에 이를 벗어나 있다. 시가 문예의 좁은 형식미학에 갇혀 있으면 시의 지평은 제한되며 생명력을 상실할 수 있다.
시인들은 문화나 문명의 사회적 책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시를 쓴다고 믿지만 사실상 시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인식은 전대의 모든 작가들의 정신과 상상력의 피가 만들어낸 표현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적 텍스트란 태생적으로 다중의미와 반어적(ironic)인 의미를 지닌다. 비평이란 이들의 해석을 드러내는 일인데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평자들은 그 해석의 타탕성을 입증하느라 또 다른 텍스트의 전거를 끌어들이는 텍스트의 폐쇄회로에 갇히기 쉽다.
텍스트의 진짜모습은 텍스트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리뷰나 비평을 하면서 반드시 텍스트 원문전체를 사용하는 이유이다. 타지마할이나 알함브라궁전에 비유할 수 있는 텍스트의 아름다운 구조와 정신이 있다. 텍스트가 어렵다면 독자는 나 같은 여행안내인의 해설에 의존한다. 그러나 눈 밝은 독자는 텍스트의 미궁에 있는 건물구조며 기능, 회랑의 미묘한 색깔과 무늬. 빛과 어둠이 혼합된 채광과 조명을 직접 향유한다.
1
시작 강의 / 최영철
그것을 발효라고 한다, 처음의 형체가 없어지는 것, 썩어 문드러져 삽시간에 사라져버린 것, 무척 기다린 자에게만 찾아온 보상, 바람과 꽃과 울며 가는 소녀의 아픈 가슴, 몰래 엿본 것, 훔친 것, 어루만진 것, 가시 박힌 심장 피멍든 눈망울, 그것으론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정처 없는 우울 불안 두통, 행복하면 형벌 배부르면 형벌, 아무도 그립지 않으면 감옥 아무도 아프지 않으면 감옥, 그때 그걸 보았다는 걸 잊어버린 것, 주머니 탈탈 빌 때까지 따라다니며 윽박지른 것, 아무도 짓누르지 않으면 죽음, 아무도 돌팔매질 않으면 죽음, 그리고 또 오늘은 썩어 문드러져 이렇게 진죽한, 육체는 산산조각 정신은 혼비백산, 흔적도 없는 자리의 지독한 적요 그리고 아우성, 남은 밑천 깡그리 탕진할 때까지 오늘은 날개만 남아 홀로 떠돈, 아무도 꿈꾸지 않은 처음의 빛, 훨훨 다 날아 오른 것 같으나 여전히 까마득한 미궁, 바닥에 처박혀 바닥에서 벗어나고자 발부둥친, 미친 먹구름 때를 따라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그리고 또 내일은 그것으론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계간 『시와 환상』 2011년 여름호 발표)
최영철이 시작(詩作)의 과정을 발효로 비유한 점이 흥미롭다. 낭만주의 해석으로는 시는 영감에 의해 쓴다. 그러나 현대시는 보다 이지적이고 다의적인 주제를 병첩하는 여러기법에 의존한다. 현대시가 의미정보와 예술정보의 굴절이 심한 미로의 주제를 드러낸다고 할 때 이 시는 시작(詩作)의 과정자체도 그러함을 말한다. 감각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 감정을 만들고 이미지와 개념을 만들며 어두운 무의식에서 발효한 언어들이 시어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흥미롭다. 개념에 의지하는 일반시론으로는 시창작의 비밀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렵다. 일반 시론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주제와 형식의 공통패턴을 살펴 시창작의 일반화를 꾀한다. 그러나 시인의 가슴에 발효하는 매 시편들은 시인의 특수한 시적상황과 개인적인 경험의 깊이에 의존한다. 시의 보편 형식을 공부한 문학교수들과 평론가들이 개별적인 창작을 못하는 이유이다.
시는 시인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도 항상 잉여와 여분을 남긴다. 시가 계속해서 다른 주제와 형식으로 다른 시인의 가슴에서 발효하는 이유이다. 최영철은 이런 시인의 상황을 “육체는 산산조각 정신은 혼비백산”이라고 말하며 “훨훨 다 날아 오른 것 같으나 여전히 까마득한 미궁”이라고 묘사한다. 발효로 본 시란 서구인들이 즐겨 먹는 치즈맛과 비슷하다. 각 지방마다 치즈생산의 비밀이 달라 재료와 온도, 발효시간등 전통비법에 따라 치즈의 맛은 천차만별이다. 자신이 먹는 치즈에 중독된 현지인들은 서정시와 리얼리즘시와 모더니즘의 발효방식에 중독된 시인들에게 비유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들 지방의 치즈가 제일이라고 믿는다.
2
너는 반박하지 않는다 / 허정애
― 격포에서
관자놀이에 갖다 댄 네 손가락이 덜 마른 석고 빛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럴 리가 없어― 손끝에 엉겨붙는 반죽을 떼어내듯 네가 혼잣말을 한다
햄릿의 문제는 무엇에서 비롯되었는가 음울한 상념인가? 유령이 전한 말인가? 호두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어도 자신을 우주의 주인으로 여길 수 있다는 햄릿, 생각이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한 자연주의자들, 생각이 모든 것을 위로한다는 샹포르의 금언, 코기토보다 차갑고 극단적이고 사심私心으로 가득찬 정념이 있을까? 라고 한 들뢰즈
소요하는 상념이 뒤엉킨 사태의 기원을 찾고, 이면에 놓인 씁쓸한 논리를 알아간다는 것인가
채석강 암벽에 빼곡히 새겨놓은 바다의 문장들, 격포가 답을 줄 것인가
너는 벗은 발에 집중한다 물 나간 자리 포석처럼 드러난 바위에, 하얗게 붙어 있는 석화에, 바위틈을 들락거리는 작은 벌레에, 수면을 스치며 날아가는 갈매기에, 등대로 이어지는 긴 방파제에, 구름 낀 하늘에, 인적 없는 백사장에, 섬처럼 떠있는 바지선에, 출항을 준비하는 고깃배에, 혈관 속으로 번지는 이른 아침 포구의 냄새에
너는 집중한다
그럴 리가 없어― 발밑에서 파도가 부서지는데
안개에 덮인 잿빛 바다는 입을 닫고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웹진 『시인광장』 2011년 9월호 발표)
허정애는 예술가의 정신과 예술대상에 대한 철학적인 관계를 주제로 시를 쓰고자 시도한다. 외적 실재(實在)에 대한 내적 관념의 우위를 주장하는 관념론을 “햄릿”에 비유하고 자연주의자 루소와 모랄리스트 상포르와 데카르트의 ‘코키토(cogito)'를 비판한 들뢰즈의 생각들을 인용한다. 허정애는 이 생각들을 마치 꼴라쥬의 기법처럼 붙여 ’생각‘의 캔버스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화자는 자신이 그린 관념의 캔버스를 현실의 격포에 있는 풍경과 대비한다. 채석강의 굴곡을 “바다의 문장”들이라고 비유해서 인간의 생각과 자연의 생각이라는 ‘차이’와 풍경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적전략을 구사한다.
이 시는 주제가 선명한 구조 같으면서도 선명하지 않은 관계의 여운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인적 없는 백사장에, 섬처럼 떠있는 바지선에, 출항을 준비하는 고깃배에, 혈관 속으로 번지는 이른 아침 포구의 냄새에”로 묘사한 현실이미지들의 꼴라쥬 때문이다. 동원한 이미지들이 생각하는 주체의 ‘객관화된 정신의 현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텍스로서의 시는 흥미롭다. 이 시의 구조가 관념과 현실을 서로 낯선 풍경에 대비시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데뻬이즈망의 기법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르트만의 미학이론은 예술작품을 ‘물질적 바탕’에 ‘정신적 내용’이 현상하는 것으로 본다. 예술가와 예술대상의 관계주의를 상기하게 하는 암시가 이 작품의 구조에는 있다. 이 작품은 수용자의 해석능력에 따라 시의 불꽃의 크기와 조도가 달라진다. 해석자의 지적교양과 세계관이 이 시를 감상하는 주요관건이다.
3
비자흔飛刺痕 / 김윤이
밤, 읽히지 않은 통사구조를 읽다, 전자렌지를 들여다보면, 반복 돌아가는 내열그릇이 있다, 문 안쪽 던져진 구랍장미와 말리꽃다발이 있다, 들여다볼 수 있게 고안된 구멍에 밖에서 내내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 있다, 표정에는 반복되는 시간이 있다, 수지樹脂를 주르르 흘리는 거리가 있다, 어느 삽상한 바람내 몰고 오나보다 새 등을 밀어 올리는 안개손 창 아래 케이블에는 신선한 기포가 뚜껑을 열고, 의심은 환영으로 송출하는 소리 있어, 그녀가 반복해 울고, 그 방영되는 시절 반복한다면, 내가 그녀 눈을 가려 데려오고 싶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하느라 신문과 우유는 부글부글 쉰다, 침묵으로 증식하는 글자에, 드러눕고자 하는 세상, 소극적 대처의 날들에서, 속보를 즐기는 이, 일요전단지 같은 나날, 나에게 올 해묵은 봉투더미, 흡음성이 뛰어나, 집합을 부르는 호각소리, 비브라토의 고음 같은 가두신문, 서울 호우경보… 잠수교 보행 통제 얼룩은 들여놓지 않은 것들에 번지는 혈흔, 흩튀는 진흙, 흩튀는 마음, 속시원히 말해다오, 부삽을 들고 나서는 바지들, 신원미상의 군홧발, 신문지상은 일렬종대로 낙수 지는 지면, 꽉 잠긴 센 수압의 수도, 얼핏 들어본 나라는 희미한 활자, 이 역逆한, 동일 궤도로 자전하는 지구에, 읽히는 건, 그래도 사랑이 패하는 시절
하여 나는 상처를 휘어 두르고 간 그곳의 광휘를 본다
그래 무엇이든 날 끌고 오라 퍼덕이는 단 한번 생명을 오랏줄에 묶고 가듯이 엉겁결에 소모해버린 청춘
나직한 어느 지상에 붙어있으이!
마름풀처럼 물 위에 드리우는
착란으로 이산離散하는 찬란이야……
(계간 『시인세계』 2011년 가을호 발표)
비자흔飛刺痕 이란 어려운 제목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상처가 날 때 주변에 튀는 핏자국’이라 한다. 제목처럼 시의 상처가 드러낸 이미지들이 잭슨 폴락의 그림처럼 흩뿌려진 작품이다. 잭슨폴락의 그림은 의미를 배제한 채 물감이 뿌려지는 우연으로 작가의 인위적인 의도를 배제한 오브제를 드러낸다. 관객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질서)’을 잭슨 폴락의 그림에서 찾으려하나 쉽지 않다.
김윤이는 파도처럼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연상으로 시를 드러낸다. 연상기법은 프로이드가 무의식의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기법이니만큼 이 시가 ‘연상(聯想)’에 의해 쓰여졌다면 연상을 일으키는 심리적 원인이나 실체가 있어야 한다. 시에서 드러낸 이미지들의 심상에 의해 짐작이나 암시는 가능하지만 그 무엇을 딱히 집어내기는 어렵다. 독자는 종반부의 “겁결에 소모해버린 청춘”과 “착란으로 이산離散하는 찬란”의 진술로 역시 암시를 받을 뿐이다.
이 시의 덕목은 집요하게 드러내고자 하는(잭슨 폴락에 비유하면 집요하게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자 하는)시인의 열정에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 행위가 ‘텍스트’를 만들고 미적정보를 드러낸다고 믿는 작가의 신념도 거론할 수 있다. 현대예술은 의미정보를 줄이고 ‘표현’으로만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21세기 한국시단은 그러한 시들이 지배해서 ‘미래파’의 논쟁을 불러왔지만 어디가 적정한 경계일지 시인 스스로가 측량해야 할 문제이다.
4
칼에 대하여 / 오태환
―몽유도원도에 늦은 발문을 써서 부치다
1.
몽유도원도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이 꿈에 본 풍광을 현동자 안견에게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1447년 세상에 나온다 한 화폭 안에 고원법과 심원법과 평원법을 두루 섞어 소재를 여러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 그림은 五代·北宋의 李郭風을 기저로 화사하고 현란한 필법을 구사한, 조선조의 으뜸가는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글씨에 진작 일가를 이룬 안평이 몸소 題하고 남긴 墨跡과 박팽년·성삼문·신숙주·서거정 등 내로라하는 문사들의 撰文은 당시대의 문화사, 또는 지성사적 의미를 돋워 비추기에 모자라지 않다
2.
이 그림은 꿈에 본 도원경과 현실세계의 두 조각으로 나뉜다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오른쪽 상단에서 먼저 드러나는 모습이 도원경이다 수척한 기암과 괴석이 샅샅이 벼랑들을 거느리는데, 붓선을 수직으로 조급히 겹쳐 내리닫는 준법(皴法) 때문에 산세는 한결 머흐롭고 가파르다 象嵌七寶한 영지버섯 같기도 하고, 무쇠를 부어 만든 박쥐경첩 같기도 하고, 水墨色 연꽃대궁 같기도 하고, 새녘 하늘을 질러 막 솟구치는 彩雲 같기도 한 멧마루들이 복숭아나무밭을 휘영청 감싸돈다 우뚝한 산악과 깊은 골짜기 마련해서는 우정 앞당겨 묘사한 복숭아나무가 희붐한 이내[山嵐] 속에서 紅彩와 泥金의 복사꽃을 언뜻언뜻 소매 사이로 띄워 놓는다 밭의 한쪽 끝에는 띳집 몇 채가 허리를 숨기고, 그와 맞선 쪽으로 폭포와 개울이 아슴아슴 자리잡고 있다 끊길 듯 끊길 듯 구절양장을 따라 화폭 왼편을 더듬으면 도원경으로 더위잡는 굴이 이상한 빛을 발하고, 그 바깥에서 노루꼬리처럼 짤막하게 현실세계의 풍경이 끊어진다 도원경의 산세가 매섭고 화려한 부벽준(斧劈皴)에 가깝게 묘사된 데 비해 이곳의 그것은 손길이 가다 멈춘 듯 성글고 초라한 미점준(米點皴)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도원경이 성찬의 흐벅진 진미라면 현실계는 그저 가마솥에 도낏자루를 담가 삶은 국물맛에 지나지 않는다
3.
내가 이 두루마리그림에서 불현듯 겪은 것은 칼이었다 그 칼은 겨누지 않아도 먼 데서 치는 우렛소리를 내며, 휘두르지 않아도 햇무리 낀 아침처럼 크고 맑다 또한 그 칼은 석 자가 채 안 되는 칼집의 어둠을 고요하게 지키면서, 일곱 벌판과 다섯 산맥의 모가지를 차례로 버힌다 나는 한동안 이 뜬금없는 꼭두[幻影] 속에서 스스로 마음만 붐비며 어쩔 줄 몰랐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림의 모티프가 된 「도화원기」에 따르면 이곳은 秦나라의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피해 온 유민이 새로 일으킨 마을로, 세상 인환의 시간에서 은연히 비껴 있는 선경이다 그림의 도원은 절세의 승경뿐 아니라 고답과 화평의 상징인 셈이다 더구나 배후에 깔린 도가적 분위기까지 합세하면 내가 겪은 칼의 꼭두는 엇나가도 한참 엇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십 수차례 눈시위에 푸른 이끼가 낄 지경으로 그림을 톺고 따져도 그것은 머릿속에서 가셔지지 않았다
4.
취모리검이라는 게 있다 날 위에 얹은 머리카락이 가벼운 입김만 어려도 베일 정도로 예리한 칼을 일컫는다 어지간한 절에는 尋劍堂이라는 절집을 두는데,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을 품는다 이때 지혜의 칼이 가리키는 것은 취모리검이다 불가에서 취모리검은 무지와 번뇌를 표상하는 無明草를 베고 진리인 慧明을 얻어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이다
『莊子』에 '庖丁解牛'라는 말이 나온다. 전국시대의 백정 포정이 산 채로 소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동작은 그 지극함이 桑林의 춤사위와 經首의 악률에서 반 발짝의 어긋남도 없다 뼈와 힘줄과 살과 신경 사이에는 바늘귀만큼씩 하더라도 틈이 있을지언정, 그의 칼날은 두께가 아예 없어 무심으로 허공을 베는 듯하다 하여 그의 칼바람 서슬에 고스란히 해체되는 동안 핏물 한 방울 튀기지 않는다 소는 아픔을 느끼기는커녕 저도 모르는 겨를에 마지막 숨을 놓는다 포정의 칼은 19년 동안 숫돌에 간 적이 없다 그것을 일컬어 '遊刃의 칼'이라 한다
취모리검은 공리에 이바지하는 낌새가 짙고, 무엇보다 방법론적 의미가 도드라져 서늘한 氣와 韻을 만지기 어렵다 내가 겪은 꼭두의 칼과는 거리를 둔다 '유인의 칼'은 칼이 아니라 칼을 다스리는 주인의 솜씨에 대한 사유다 포정의 손아귀라면 10년을 땟장 속에 묵힌 낫이라도 날끝에 무지개가 서릴 만하다 애초부터 내가 겪은 칼의 꼭두와 나란히 놓고 헤아릴 수 없다
5.
안평은 둘째 형 수양과 팽팽한 정쟁을 벌이다가 1453년 계유정란을 당하여 물러난 뒤, 강화도로 귀양 간다 아버지 세종과 큰형 문종에 대한 극진한 丹心을 지키고 개결한 절의를 다하려 했으나, 문과 예를 탐식한 기골로 술수와 담력을 양수겸장으로 하는 수양과 겨루기에는 부칠 수밖에 없었을 터다 더구나 예하의 신숙주·정인지 등 철석같이 믿었던 동지들이 번번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야
아들 우직은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고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딸 무심은 쿠데타세력의 노비로 영락한다 그도 유형지인 강화도 교동에서 사약을 받는다 머리칼을 풀어헤친 안평이 엎드려, 사약에 녹은 砒霜과 생금과 게알[蟹卵]의 찌끄래기를 질근질근 어금니로 씹으며 새겼을, 비장 속까지 후벼 파는 원과 한은 짐작 못할 게 없다
허나 그토록 아꼈던 그림에 寒天을 떠돌던 그의 흉흉한 넋이 빙의되고, 높새바람에 靑대처럼 서슬퍼런 원과 한이 전염되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대도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겪은 칼에 견줄 게 못 된다 안평의 칼날은 음기가 너무 성하여 아무리 날카로워도 수챗물처럼 탁하고, 아무리 빛을 뿜어도 삼경처럼 어둡다
6.
내가 몽유도원도를 열흘 가차이 화첩과 모니터를 번갈아서 살피고 뒤진 것은 그림이 주는 조형과 채색의 감동 때문이 아니었다 (외려 옹기뚜껑에 꼭지처럼 붙곤 하는 무슨 '절후의 명작' 따위 상찬에는 닭살이 돋을 지경이다 내게 한사코 품평을 시킨다면 능호관이나 공재, 완당의 묵적에 더 후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꼭두처럼 겪은 칼의 바탕과 내가 하필 칼을 겪게 된 까닭이 궁금해서 이기기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그림을 읽는 내내 耳鳴처럼 문득 등 뒤에서 나타나 아스라이 스러지곤 했던, 어떤 종잡을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그림에서 칼의 꼭두를 지우려 조바심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태 칼의 바탕도 칼을 겪은 까닭도 밝히지 못했고, 여전히 칼의 꼭두도 걷어내지 못했다
7.
아아, 칼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월간 『현대시학』 2011년 7월호 발표)
이 긴 시를 읽기에는 동양화와 동양정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동양정신이란 일원론에 기반한 ‘유불선(儒彿仙)’이나 ‘도현(道玄)’으로 기표하는 실재(實在)의 드러남을 말한다. 인간의 성정(性情)에 통해있으며 만물의 명운(命運)을 주관한다고 보기도 한다. 동양화법은 유파에 따라 농담의 차별이 있으나 표현미학보다는 재현미학에 기반을 둔다.
동양의 화풍은 사물에 내재한 제일원인인 동양정신을 드러내야 하는 격조(格調)를 중요시한다. 예술작품에 신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서양중세의 고전주의와도 유사하다. 동양화는 현대회화의 자유분방한 표현대신 미묘한 실재의 근원이 어떤 형식으로 드러났는가를 관조하는 심미를 내세운다.
이 시에 드러난 오태환의 구체적인 견식과 시적탐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술한 내 상식을 뛰어넘는다. 오태환은 서화의 필법을 ‘취모리검’에 비유하고 안평의 ‘환상’을 화자의 ‘환상’에 전이(轉移)한다.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칼’의 정체는 '포에지(poesie)'라고 부르는 예술정신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상징은 체현(體現)과 은폐를 동시에 거느린 비유이다. ‘칼’의 드러남은 서화의 제작이나 '포정해우(庖丁解牛)'의 현실행위이지만 동시에 ‘몽유도원(夢遊桃園)’로 상징되는 세계를 안으로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오태환은 ‘칼’을 찾는 구도행위의 험난함을 “나는 여태 칼의 바탕도 칼을 겪은 까닭도 밝히지 못했고, 여전히 칼의 꼭두도 걷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지막 연의 “ 아아, 칼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하는 탄식은 예술행위가 시지프스의 노력처럼 재귀(再歸)회로에 갇힌 운동임을 말한다.
인간의 갇힌 앎을 뛰어넘어 실재(實在)를 인식하고자 하는 구도가 모든 철학과 종교의 목표이다. 선비와 화가와 검객은 모두 ‘도(道)’라고 부르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서 서화(書畵)와 검도(劍道)를 익힌다. 예술행위를 개인의 욕망과 환상의 표현으로 보는 근대미학과는 달리 전통(재현)미학은 이런 도(道)나 ‘이데아’같은 실재(實在)에 대한 열망에 기인한다. 근래 시단의 일반 창작 태도와는 차별된 오태환의 지적교양과 시적 관심이 남다르게 보이는 이유이다.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등이 있음.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主幹. 계간 『시와 표현』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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