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시는 ‘무의식에서 길어 올려 의식에서 빚어내는 말(하기)’ 입니다. 담당자께서 절 방금 소개하시다가 제 첫 시집을 ‘직선 위에서 떨어지다’라고 말하셨는데요. 시집 제목은 ‘직선 위에서 떨다’예요. 그런데 얘길 들으니까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과 관련한 얘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직선 위에서 떨다’라는 시가 첫 시집의 표제시기도 합니다. 제가 20대 중반 옥탑방에서 살면서 썼던 시입니다. ‘나 어떻게 살아야지, 먹고는 살아야겠지만 뭔가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고, 그러던 시절에 한강을 왔다 갔다 건너다보니, 세상의 모든 다리가 다 직선인 거예요. 커브로 돼 있는 다리는 없어요. 건축공학적으로 비용 같은 것을 고려했을 때도 직선으로 다릴 놓는 것이 돈도 덜 들고, 또 견고하기도 하겠다 싶었습니다.
한편으론 물 위를 건너갈 적에는 가장 짧은 시간에 그 위험을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그래서 위험을 건너가는, 한 개인의 실존의 떨림 같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에 처하기 십상이죠. 내 마음의 떨림, 진심, 외나무다리 위를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시에서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직선 위에서 떨어지다’란 잘못된 소개를 들으면서 나의 진심은 직선 위에서 떠는 것이 아니고 떨어지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위험을 건너가는 사람이 떨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위험이 기다린다 해도 우리 맘속에는, 고통이 예비돼 있지만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저는 떠는 것만이 진심이라고 했는데, 제 무의식의 깊은 충동은 떨어지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떨어지다’라는 내 마음의 깊은 진실은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죠.
지금 소개를 듣고 보니까 시는, 내가 알고 내가 꺼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손이 지적해주고 말해주고 알려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시적인 순간과 만나고 체험하고 하는 것은, 그냥 직선에서 떨고 있는 의식의 표면, 그 상태가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에서 발생해서 잘 알 수 없고, 꺼내서 만져보기 어려운 진실과 조우했을 때일 것 같습니다. 잘 안 보이는 것을 보고 안 보이는 것을 만지는 게 시적인 순간이 아니라면, 시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지요.
제 얘기는 지금 이 이야기의 연속이거나 확장이 될 겁니다.
처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이 시를 쓰게 하는가’ 하는 물음인데, 이 물음은 이상한 물음이죠. 우리는 보통 이렇게 묻지 않고 ‘왜 시를 쓰는가?’ 하고 묻죠. 그러나 무엇이 시를 쓰게 하는가, 물을 수밖에 없는 게 제가 보기엔 더 정확한 것 같아요.
이규보의 ‘구시마문’이라는 글 중 일부입니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시킨 것이다.”
─ 정민, 『한시 미학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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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광 시인 약력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 영문과,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빙폭」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등 발간. 2008년 「물불」 외에 4편으로 8회 노작문학상 수상. 2010년 『아픈 천국』으로 지훈문학상 수상. 현재 ‘문장’ 공모 시 부문 심사위원. 연희문학창작촌 시 부분 가을학기(9.20~12.6) 강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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