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문학 오디세이] 김연수―보르헤스의 보검
아르헨티나의 세계적 문호 보르헤스(1899∼1986)의 모든 소설은 도서관 냄새를 풍긴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도서관직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유전적 요인과 지나친 책읽기 탓에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에도 왕성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작품은 과거의 어떤 곳으로 돌아가서 정론으로 기록되지 않은 어떤 희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는 대개 의도적인 가짜들이다.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보르헤스의 작법으로 요즘 우리 문단의 고수들을 종횡무진 쓰러뜨리고 있는 소설가가 김연수다. 그가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에서는 보르헤스의 보검이 내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때로는 한 사람이 세상 모두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이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만을 생각할 때도 있다.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이 보르헤스라고 했던가.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보르헤스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게 옳은 말이라고 전해주고 싶다."('연재를 시작하며')
김연수의 이번 소설은 그동안 '빛의 제국'을 연재하던 소설가 김영하가 연재를 마치지 못하고 도중
하차한 지면을 이어받고 있지만 같은 세대이면서도 두 사람의 글쓰기를 불연속성으로 구획하는 상징적인 의미마저 지닌다고 할 것이다. 김영하가 1990년대의 '쿨'한 감수성의 세례를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반해 김연수는 쿨한 감수성에 한없이 서툴다. 그러나 김연수 소설의 유연함과 진지함은 그 서툼에서 비롯된다.
광주민주화 운동,박종철 고문치사 사건,6·10항쟁,유서대필 사건 등을 중고교때 겪은 뒤 대학에 들어온 그는 '우리'가 국가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한 세대에서 '내'가 국가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한 세대로 성장했다. 예컨대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으로 무엇인가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김연수는 동일성의 지배를 받는 공동체의 기억에 묻혀 망각된 개인의 기억을 통해 전체주의의 허구를 파고 든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에 등장하는 1인칭 화자 '나'는 9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전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세상의 일처럼 여긴다. 김지하의 글과 박홍의 기자회견으로 시작된 90년대의 혼란은 유서대필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정원식 총리를 향한 계란과 밀가루 투척 사건으로 완결되었다. 그러나 그건 역사가 자신의 논리를 위해 수많은 진실을 버리고 취사선택한 공동체의 기억에 불과하다.
김연수는 역사적 기록들의 틈새에 처박힌 개인의 진실을 파고 들어, 역설적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화자 '나'가 화양리를 걸어가다 들어간 한 서점에서 들춰본 신간 서적의 한 구절은 김연수의 이같은 작가적 의식을 보여준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소설에는 1990년대를 살았지만 그 주변부에 내팽겨져 있던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애인과 헤어져 독일로 가게된 '나',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돼 남양군도까지 가야했던 할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가 베를린에서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애인과 헤어져 독일에 가게 됐으며, 두 남자의 기이한 운명에 관해 듣게 됐다. 그 두 남자는 딱 한번 베를린에서 서로 만났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좋았다. 나와 만난 뒤, 한 남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다른 남자는 대한민국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두 나라의 인구 수치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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